소통으로서의 논문 쓰기에 관한 잡설[서울대 사이버문화 2007-1학기]

!@#… 서울대 정보문화학 연합전공의 2007년 1학기 강좌 ‘사이버문화’에서 학생들이 작성한 영어논문 지도에 참여한 후, 학기말에 제작한 자료집에 간단한 작업소감 겸 덕담(?)을 의뢰받아 쓴 글. 항상 그렇듯, 이런 기회에 나 자신의 생각을 한번 정리해 볼 수 있게 된다. 비단 논문 뿐만 아니라, 모든 종류의 “진지한 사실에 근거한 논설문” 쓰기에 해당될 수 있으리라.

[후기] 소통으로서의 논문 쓰기에 관한 잡설

김낙호 (위스콘신대 언론학과 박사과정 / 영어논문 에디터로 참여)

솔직하게 말해서, 영어로 논문을 쓴다는 것은 참 귀찮은 일이다. 특히 한국의 사례를 연구하는 논문이라면, 더욱 그렇다. 고유명사의 영어 표기 같은 자잘한 문제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한국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워 죽겠는데 무려 영어로 옮기기까지 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압박감은 거의 두려움의 대상이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왜” 굳이 영어로 써야 하는가에 대한 회의 그 자체다. 어차피 한국의 사례에 대해서 한국인들이 보도록 하는 것이라면 어째서 영어로 스스로를 자학하는가. 사실, 이것은 자연스러운 귀찮음이고 당연한 회의적 반응이다. 이런 저런 글을 좀 더 많이 써본 편이고 현재 미국에 유학까지 나온 상태의 필자라고 할지라도, 정도 차이는 있지만 뇌리 한 켠에 항상 간직하고 있는 침투적 사고다.

그래도 영어로 쓰는 이유, 영어로 쓰는 방법을 제대로 알아야 하는 이유는 바로 소통 때문이다. 연구라는 것은 본질적으로 소통량에 따라서 그 가치가 결정된다. 더 넓고 깊고 다양한 층위와 성향의 동료 연구자들에게 소통이 될수록, 그래서 학문적 지식체계라는 커다란 사회적 집단지성의 연결망 속에 놓여진 보다 크고 강력한 노드가 될 때 연구는 효과적으로 자기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즉, 영어로 연구논문을 쓰는 것은 한국학계의 영미권 학문에 대한 종속이나 사대주의적 타협이 아니다. 바로 내 연구가 보다 더 중요한 지식으로 기능하고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하는 자발적인 소통 의지다.

이번에 수업의 일환으로 실제 영어 연구 페이퍼를 써보는 행위 자체가 첫 단추였다면, 이 과정을 통해서 드러난 부족한 점을 곱씹어보고 잘 된 점을 더욱 키워나가는 것이 이후의 작업이다. 단순히 기계적 기술의 수련을 넘어, 영어로 연구 글을 쓴다는 것의 이유와 의미에 대해서 고민해보고, 스스로의 납득할 만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움직일 수 있도록 한번쯤 잠깐 숨을 고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작업과정에서 필자가 느낀바 이번 코스에 참여하신 여러분들의 향후 연구작업에서는 좀 더 강조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을 몇 가지 이야기해볼까 한다.

1) 영어 이전에, 연구가 먼저다
영어는 어디까지나 도구다. 아니 영어가 아니라 어떤 언어라도 사실 도구고, 핵심은 연구 내용 그 자체다. 말로 어떻게 표현할까를 고민하기 이전에, 먼저 연구 내용 자체에 대해서 뚜렷하게 틀을 잡는 것이 순서다. 문제의식을 세우고, 그 문제의식이 혹시나 뒷북이 아닌지 기존 문헌을 살펴보고, 양적 또는 질적 데이터를 모아서 문제의식에서 세워놓은 논거들을 검증하고, 연구의 결과가 전체 학문의 지평에서 혹은 사회적 실용성의 측면에서 어떤 의미가 있는지 뚜렷하게 주장을 도출하는 것이다. 그 내용물이 갖추어진 후, 비로소 언어를 입힌다. 그것이 영어가 되었든, 한국어가 되었든, 양쪽 모두가 되었든 말이다. 이번 논문 에디팅을 하면서 종종 눈에 들어온 것이, 아직 생각이나 데이터가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선 처음 부분부터 순서대로 집필을 해나가다 보니 논지가 꼬이거나 소실되는 경우다. 설상가상으로, 언어 특성상 논지가 꼬일 경우 한국어보다 영어가 더 뚜렷하게 표시가 나기 마련이다. 곧바로 완성본에 착수하기보다, 연구의 내용을 확실히 갖춘 이후에 언어로 살을 씌워나가는 것이 좋다.

2) 번역이 아니라, 설명이다
영어로 논문을 쓰는 것은, 그 연구를 영어로 읽을 사람들에게 연구의 내용을 알리는 것이다. 즉 한국어를 영어로 번역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맥락에서 일어난 사례에 대한 연구를 영어권 독자에게 설명하는 것이다. 우선, 한국 사회 내의 ‘암묵적’ 코드들을 모두 풀어서 설명해야 한다. 아니 애초부터 연구논문의 세계에 ‘당연한’ 것은 없다. 과학적 학문 추구의 기본은 근거를 요구하고 끊임 없이 회의와 부정을 하는 것이니 말이다. 상대방이 이해력은 뛰어나지만 나와 같은 상식을 공유하는 지점은 전혀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래서 간결 명확하게 개념과 현상들을 설명하고 적절한 외부 문헌으로 독자들을 인도하며 논지를 전개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특히 이번 코스에서 다룬 사이버문화의 경우, 한국 특유의 현상들이 워낙 많은 편이라서 그 지점을 너무 당연시하는 경우들이 여럿 보였다. 비한국인 독자들에게는 물음표를 남길만한 것.

3) 형식이란, 중요하다
학문의 초입에서는, 연구 내용이 좋으면 되는 것이지, 논문의 ‘양식’에 맞추는 것은 부차적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형식과 내용은 그렇게 뚜렷하게 떨어트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논문의 형식이란 가장 효율적으로 뚜렷한 비교적 객관적 틀의 논거와 주장을 전개시키기 위해서 특화된 시스템이다. 문제제기, 기존연구, 방법론 제시, 데이터 분석, 논의, 참조문헌의 순서로 이어지는 표준화된 전개 과정 속에서 오해와 오독의 여지를 없애도록 되어있고, 상호호환성이 있는 틀 속에 위치시킨다. 그 결과 연구의 가장 핵심적인 주장을 학문적 지식의 네트워크 속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연구는 소통이고, 소통에는 호환성과 표준양식이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특수한 고유명사에 이탤릭체를 적용한다든지, APA 스타일의 문헌 인용 표시라든지 하는 것에도 그대로 해당된다. ‘레터 용지 Times New Roman 12포인트 줄간격 2배’ 같은 소소해 보이는 것들마저도.

4) 발명왕을 목표로 하지 말자
현상이 복잡해지고 논지가 꼬일 경우 가장 흔하게 빠지는 유혹은 바로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것이다. 한번 문민정부 시절의 촌극을 기억해보자. 한창 ‘세계화’라는 표어를 내걸었으나, 진정한 제도개편을 배제한 시장개방 등 특이한 형태로 진행되었던 바 있다. 그 때 이렇듯 globalization과는 뭔가 다른 세계화를 영어로 무엇이라고 번역하면 좋을까, 라는 질문에 정부의 공식 답변이란 바로 ‘Segyehwa’였다. 언뜻 보면 기발한 착상 같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의미도 만들어내지 못하거니와 오히려 혼란을 일으키는 엉성한 오판에 불과했다. 새로운 개념을 발명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다만, 새로운 개념의 발명은 호환성의 문제를 일으켜서 소통을 가로막는다. 상대에게 완전히 새로운 것을 처음부터 이해하도록 강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문제는, 종종 새로운 발명이라고 생각한 것이 사실은 이미 충분히 다른 용어, 다른 개념어로 충분히 통용되고 있는 경우들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발명은 정말로 지금 이미 있는 개념들을 다 소진한 이후에나 하도록 하자. 아니 그 전에, 그냥 현상과 데이터로 설명해도 충분한 것을 자꾸 거창한 개념화를 시도해서 오히려 이해가 어려워지도록 꼬아놓지 말자. 특히 한국어로 개념을 발명한 후 그것을 영어로 번역할 때 엉성함은 한층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영어 독자들은 어리둥절해하고 말이다.

5) 피드백을 두려워하지 말자
벌써 몇 번을 강조하는지 모르겠지만, 연구는 소통이다. 상대가 읽고 비판하고 질문하고 때로는 거의 부술 듯 달려드는 것이 아주 정상적이다. 근거 보충 필요에 대한 코멘트든 논거 자체에 대한 반론이든, 비판적 피드백을 받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고쳐나가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도, 창피한 일도 아니다. 스스로의 연구를 더욱 소통 가능한 것으로 만들기 위한 중간과정이다. 수업시간에 발제를 하는 것도, 학회에서 발표를 하는 것도, 저널에 제출하고는 리뷰를 받는 것도 그 과정의 사례들이다. 이번에 작업한 영어논문 역시 예외가 아니다. 가상문화 수업 담당 교수님의 피드백, 영어 논문 프로그램을 지도하는 선생님의 피드백, 유학생 선배들의 피드백, 그리고 현지인 프루프 리더의 피드백까지 여러 단계의 피드백 과정이 있다. 때로는 영어표현에 대한 것, 때로는 연구 논지에 대한 것, 때로는 두 가지가 같이 결합되어 있는 코멘트들이 활발하게 오갔던 것으로 안다. 어떤 페이퍼들은 그 기회를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반면에 어떤 페이퍼들은 그런 피드백을 끌어내고 반영하는 것에 서툴러서 처음 버전이나 마지막 버전이나 엇비슷한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한가지만 항상 기억하자. 연구논문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완성품이 아니다. 학문적 아이디어라는 큰 흐름 속에서, 서로의 소통을 위하여 잠시 고정해 놓은 임시적 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피드백은 연구의 일부다.

여하튼, 이번 영어 논문쓰기 프로그램은, 에디팅 과정에 참여한 필자에게도 영어로 논문쓰기, 나아가 논문쓰기 자체에 대한 스스로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본 프로그램이 정례화되고 한층 스케쥴 관리와 인력 동원 등이 체계화되어, 이미 거쳐간 여러 분들은 물론 다음에 새로 참여하게 될 분들에게도 좋은 깨달음의 기회가 되어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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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소통으로서의 논문 쓰기에 관한 잡설[서울대 사이버문화 2007-1학기]

Comments


  1. !@#… 시바우치님/ 에이, 진짜배기 ‘신세’ 레벨의 극악무도 페이퍼들 앞에는 명함도 못내미십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