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르문학/문화 전문 잡지로 최근 창간된 ‘월간 판타스틱’에 연재를 시작한 칼럼… 이기는 하지만, 2호까지만 한 후 칼럼 포맷을 버리고 특집 기사 식으로 스위치될 예정. 여튼 창간호에 들어간 글. 장르나 작품, 작가, 지면 등 뭔가 SF환타지 쪽 감수성으로 설명해내는 만화. 원래는 작년 말 쯤 이 글로 일찌감치 마감했다가, 중간에 기획방향을 바꾸면서 환타지 만화 잡지 ‘헤비메탈’을 다룬 다른 글로 바꿨다가, 마지막 편집단계에서 일련의 과정에 의하여 결국 이게 다시 들어가버린 특이한 케이스. 보통 그렇듯, capcold.net 에서 공개하는 버젼은 편집전 제출본 원고.
SF만화, 대학살의 상상력
김낙호(만화연구가)
SF적 상상력에는 고작(?) 평범한 괴물 하나쯤 등장한다거나 가상의 연인들이 염장을 떠는 소소한 것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아예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 내려는 욕구가 있다. 그런데 세계창조의 상상력이 가장 극단에 달하는 환타지와 SF 장르의 느슨한 경계선이 있다면, 아예 다른 구성 원리로 만들어진 별세계를 만드느냐 아니면 지금 세계의 나름대로의 작동원리인 ‘과학적 현상’을 바탕으로 하는 다른 세계를 만드느냐 정도 차이일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현실세계와 연계가 있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면, 즉 지금 세계의 가장 기본적인 법칙은 비슷하게 유지하되 근간을 뒤흔들어놓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할까. 해답은 간단하다. 세계는 놔두고, 그 속에 사는 사람들은 쓸어버리는 것이다. 즉 대학살이다.
대학살의 상상력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역시 핵전쟁이다. 핵전쟁이라는 개념이 도입된 2차대전 이전의 고전SF는 외계 종족에 의한 인간 노예화라든지 자연재해나 전쟁에 의한 비참함을 이야기할 뿐, 인류 자신의 손으로 종의 절멸이라는 대형 사고를 칠 정도로 멍청하다는 상상이 부족했다. 하지만 현실에서 핵폭탄은 터졌고, SF적 상상력은 대학살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얻었다. 특히 실제로 핵폭탄을 맞은 역사적 경험이 있는 일본에 있어서 그 공포는 각별했다. 80년대 일본 SF만화의 기념비적 걸작 ‘아키라’ (오토모 가츠히로)는 명시적으로 핵은 아니지만, 뚜렷하게 핵폭발의 모티브를 차용하고 있다. 원래 80년대의 일본 SF만화는 냉전말기의 긴장감 속에서 더욱 그 공포감을 장르적 소재로 활용했는데, 일본 SF에 있어서 새로운 전기가 마련된 시기이기도 했다. 70년대 후반의 ‘우주전함 야마토’라든지 ‘스타워즈’ 등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활극형 영상물로서의 SF가 새로운 세대의 주류로 오른 것이다. 즉, 비주얼의 SF적 완성도에 대한 추구와 함께, 전공투의 사회변혁에 대한 기억이 후일담의 영역으로 넘어가고 신세대의 대두가 주목을 받았던 사회분위기를 그대로 반영하는 작품들이 등장하던 시대였다. 이런 시대의 산물인 ‘아키라’의 내용 속에서는, 도시를 멸망시키다시피 하는 아키라의 대폭발 후 네오 토쿄의 혼란과 무정부주의적 젊은이들이 신세계 재건을 기치로 건다. 이런 모습은 2차 대전후 일본의 모습이라든지, 경제 버블이 붕괴된 8-90년대의 무기력함을 타파하고자 하는 욕구가 뚜렷이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신경질적으로 빼곡히 들어선 대형건물들이 스스럼없이 무너지는 쾌감은 곧은 펜선으로 만들어지는 특유의 공간감 속에서 더욱 강력한 임팩트로 다가온다.
그 동안 한국의 80년대 역시 핵에 의한 대학살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등장했다. ‘핵충이 왔다’(신종봉)에서 인류는 핵전쟁 이후 아예 절멸했고, 핵오염으로 완전히 바뀌어버린 생태계를 점유하는 것은 ‘핵충’이라는 새로운 인간 비슷하게 생긴 생물들이다. 이제는 유적만으로 남아있는 인간 사회의 모순과 우매함을 풍자 카툰의 필치로 풀어나가기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설정 아닌가. 장르SF가 쇠퇴하고 현실에 대한 직접적 목소리가 중요시되던 한국의 80년대에, 환경오염 및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세태풍자라는 방식을 통해서 상당히 쓸만한 SF적 상상력이 펼쳐졌던 셈이다.
문명의 근간을 뒤집는 대학살은 그러나 꼭 인류가 전부 죽어 없어져야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특정 계층이 한꺼번에 죽어 없어지기만 해도 무방하다. 그렇다면 세계의 가장 큰 계층 구분인, 성별에 의한 대학살은 어떨까. ‘Y – the Last Man’ (브라이언 본 글, 피아 구에라 외 그림)이라는 국내 미소개 작품은 어느날 갑자기 Y염색체 보유 개체, 즉 수컷들이 모조리 죽으면서 시작한다. 주인공 요릭과 수컷 애완 원숭이 앰퍼샌드만 남기고 말이다. 그 결과 남성의존적인 사회체계는 대혼란에 빠지고, 행정은 마비된다. 하지만 결국 몇 년의 시체처리와 혼란기를 보내고 나자, 세상은 여하튼 굴러간다. 그 동안 미국은 유일한 여성 내각 관료였던 농림부 장관이 대통령이 되며, 원래 여군도 전투원으로 배치되어온 이스라엘이 군사강국으로 급부상하는 등 마비된 사회에 일대변혁이 일어난다. 여기에는 9/11 테러 이후 미국 장르 문화 일반에 널리 퍼져있는, 대형 테러에 의한 사회 혼란과 권력구도 개편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슈퍼히어로들의 세계에도, 미래세계에도, 환타지 세계에도, 테러로 인한 대학살과 혼란의 모티브가 그 어느 때보다도 충만한 것이다.
하지만 결국 대학살의 상상력은 결국 생존자들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사회에 관한 것이 많다. ‘그의 나라’(박흥용 / 미완)의 경우 이유 모를 전쟁의 결과 국가로서의 한국이 괴멸되고, 주인공 등 생존자들이 젖과 꿀이 흐르는 식량창고를 찾아서 성서적인 엑소더스를 떠나는 처지에 내몰리는 이야기다. 다른 작품인 ‘설국열차’(장 마르끄 로셰 & 뱅자맹 그르랑)은 영원한 겨울이 찾아온 세상에, 한 특이한 열차에 탄 승객들만이 유일한 생존자인 세상이다. 어디로 달려가는지 누가 운행하는지도 모르는 열차 속에서, 승객들은 그들만의 작은 사회를 만들어낸다. 하지만 소규모 이상향 공동체가 아니라, 계급도 욕심도 범죄도 사이비 신앙도 모두 극명하게 다시 만들어내는 것이다. 두 작품 모두 결국 아무리 세상이 변해도 사람은 변할 것이 없다는 전제를 강하게 이야기하고 있기에 더욱 강한 울림을 준다.
이것은 비단 이 작품들 뿐만 아니라, 대학살을 상상하는 SF가 보통 이야기하는 바다. 즉 새로운 세계를 만들고 싶다며 리셋을 꿈꾸곤 하지만, 아무리 새 부대에 넣어도 헌 술은 헌 술이라는 비정함이다. 아니, 오히려 각종 욕망이 더욱 극단적이 된다는 것. 인간사회는 약간만 대학살이 일어나도 망가질 정도로 대단히 취약하면서도, 그 근본에 있는 권력과 욕망들은 어떻게든 인간이 있는 한 지속되어 다시금 인간의 사회를 만들어나가도록 한다. 뭐 인류역사도 세계대전 같은 대학살이 한 번씩 일어나고 나면 사회체제들이 급속히 뒤바뀌곤 했으나 결국 형태만 조금씩 바뀐 거대한 탐욕의 도가니가 지속된 바 있는데 그리 신기한 일도 아니기는 하지만 말이다. 자고로 상상은 현실의 중력장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법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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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판타스틱>. 페이퍼컴퍼니 발간. 대중 장르문화, 특히 SF판타지의 범주에서 만화를 소재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 칼럼. 주로 작품/작가/장르 소개 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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