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단결 한마음의 어두움 – 『이끼』[기획회의 080215]

!@#… 하지만 이왕이면 ‘발칙한 인생’으로 돌아와주기를 바랬다…;;;

 

일치단결 한마음의 어두움 – 『이끼』

김낙호(만화연구가)

인류라는 종의 생존을 뒷받침해준 하나의 철칙이 있다면 바로 뭉치면 강해진다는 것이다. 이것은 맘모스 사냥할 때의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서 철저하게 뭉치고 타인을 배제하는 지극히 현대적인 이합집산에 정통으로 들어맞는다. 특히 같은 지역에 살기에 공동의 이익을 지니는 동네 사람들끼리 뭉칠 때 그 힘은 가공할 위력을 발휘한다. 그것이 주거단지에서 임대아파트 세입자들을 내쫒고자 하는 펜스 세우기든, 동네에 위치한 공고를 문 닫게 만들기 위한 실력 행사든 말이다. 자신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단결이야 당연한 행동이지만, 그것을 위해 타인에 대한 해코지를 당연시하는 순간부터 광기는 천천히 그리고 조용히 번진다. 마치 습한 바위 밑의 이끼처럼.

미스테리 스릴러 『이끼』(윤태호 / 아이비에스넷 / 1권 발행중)의 주인공 류해국은 문제가 있다고 판단하면 그 경중에 관계없이 결국 끝을 보고 마는 종류의 인간이다. 중간에 합의를 보고 마는 것이 모두에게 그나마 이득인 순간임에도 불구하고 일어나는 것은 불굴의 정의의 구현이라기보다는 순수한 집념에 가까운데, 그 집념이 대단히 높은 것이다. 명백하게 부당하지만 비교적 작은 사건 하나 때문에 자신의 가족과 직장을 잃은 것은 물론 연루된 상대방과 심지어 담당 검사까지 확실하게 ‘동귀어진’ 시킨 그가, 시골 마을에서 사시던 부친의 부고를 연락받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한다. 집을 정리하러 내려간 그 외딴 마을의 주민들은 그러나 무언가 그 죽음에 연관되어 있는 듯 수상한 모습을 보이며 그를 서울로 돌려보내려는 눈치다. 어차피 소원하기 그지없던 아버지의 일이고 마을에 눌러앉아 있을 이유도 없는 그가, 마을에 눌러앉아 조사를 시작한다. 효성도 애매한 복수심도 아니라, 끝을 보겠다는 식의 일념으로 말이다. 그러자 마을 이장과 그 협력자들 – 사실상 마을 전체 – 은 검은 속내를 하나씩 풍기기 시작한다. 1권 표지의 의미심장함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눈과 귀와 입을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막지만, 한쪽 눈은 결국 부릅뜨는 주인공 얼굴의 클로즈업.

줄거리 소개를 살짝 했지만, 사실 책 한권이 주욱 진행되도록 정작 사건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많이 일어나지 않는다. 한적한 지방에서 연쇄살인이 나는 것도 아니고, 거대 조직의 음모가 있고 조직원들이 출몰하는 것도 아니다.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무언가를 숨기고자 하며 주인공이 마을을 나가도록 종용하려는 마을 사람들의 음흉한 압박을 묘사하는 것에 할애된다. 무표정과 불안을 오가며, 당장 내쫒고 싶다는 목표를 겨우 억누르는 사람들의 얼굴과 행동거지 하나하나가 초점이다. 아버지의 죽음을 둘러싼 진실 그 자체는 단지 그것을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고, 중요한 것은 바로 그런 행태 그 자체다. 집합적 이기주의로 똘똘 뭉친 그 마을 주민들이 자아내는 섬뜩한 분위기.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는 쇼크라면 한 순간이겠지만, 음습하게 짓누르는 그 일견 순박하다 못해 순수해 보이는 악의의 물결은 지극히 일상적으로 보이기에 더욱 모골이 송연해지게 만든다. 이런 것이야 바로 웰메이드 스릴러의 힘이다.

사건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섬뜩함이 중심에 올 수 있는 것은 주인공의 성격 덕분이다. 아버지에 대한 효심이나 추억, 인간적 정으로 무언가를 파본다기 보다, 그저 철저한 집념으로 진상을 후벼파는 인물이니 말이다. 집념은 그를 작품 속 주인공보다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독자에게 보여주는 관찰자처럼 다가오게 만든다. 주인공에 이입해서 현재의 상황이 주는 희망과 절망들을 곱씹어볼 겨를 없이, 그저 주인공과 함께 이 마을에 들어온 이방인이 되어 그 적의의 한가운데에 던져진다. 인간관계를 더 파내든 집 아래에 통로를 발견하든, 발견의 쾌감 따위는 오간데 없고 그저 그 마을 사람들이 뭉쳐서 구축해나간 악의의 역사가 좀 더 한 꺼풀 드러나는 찝찝함만이 남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은 마을 사람들을, 자기 자신을, 나아가 독자들을 괴롭힌다. 멈추지 않고 계속 파고 들어감으로서 말이다. 한마음으로 뭉친 이들의 어두운 악의는 점점 구체적으로 묘사되기 이른다.

이상한 사회적 이기심에 대한 탐구는 이 작가에게 처음은 아니다. 작가의 본격적인 출세작 『야후』역시 사회 곳곳에 숨겨진 이기심으로 무너지기 직전인 현대의 한국을 무대로 결국 분노로 폭발하게 되는 주인공을 내세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야후』이래로 다시 자신의 데뷔 장르였던 개그로 돌아가 상당한 부침을 겪은 후 오랜만에 선 굵고 진지한 극화로 돌아온 『이끼』는 감정의 폭발을 마지막까지 눌러 짓이기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화려하게 폭발시키지 않고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모습을 천천히 집요하게 목격시켜주겠다는 것이다. 사회 정의에 대한 고뇌와 절망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사람들 속 음습한 이기심을 그대로 보일 뿐이다.

이런 접근은 표현력에 대한 상당한 자신감이 없다면 쉽게 도전하기 힘들다. 혼자 집요하게 파고들다가 독자들을 떨쳐내기 쉽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자를 잡아끄는 연출의 강약 조절과 섬세한 묘사, 내용 전개의 능숙함이 요구된다. 다행히도 작가를 스타의 반열에 올려놓았던 능란한 완급의 선과 거침없는 데생이 여전함은 물론, 웹진 연재라는 방식이기에 시도하게 된 채색 역시 탁한 저채도로 선택하여 작품의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다만 이번에 단행본으로 묶여 나온 판본에는 다소의 아쉬움도 있다. 웹에서 종이로 오면서 칸 단위의 재편집을 했지만, 각 페이지 단위에 들어가는 칸들의 양이나 칸 사이의 긴장감 등 화면의 ‘밀도’가 웹에서 볼 때보다 헐거워 보이기 때문이다(공정하게 말하자면, 웹 연재를 하는 장편극화들이 전반적으로 겪고 있는 큰 문제점이기도 하다). 이렇듯 칸 연출의 밀도는 아직 좀 더 갈 길이 남아 있지만, 스토리의 짜임새나 결정적 순간들을 시각적으로 잡아내는 연출력은 여전히 발군이고, 덕분에 단행본판으로 읽더라도 앞선 단점들을 충분히 커버하고도 남는다.

비록 이제 전체 이야기 가운데 1권만이 나온 상태지만, 『이끼』는 지금까지 나온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만한 스릴러다. 개인적으로는 아직 조금 이르다고 보지만, 2007년 대한민국 만화대상에서 우수상을 수상했을 정도로 많은 기대를 모으고 있기도 하다. 부디 작가가 그저 부지런히(!) 연재를 계속하면서 그들의 이기심, 즉 우리들의 이기심의 섬뜩함을 더욱 낱낱이 펼쳐주는 찝찝한 연옥도로 독자들을 괴로운 즐거움으로 몰아넣어 주기를 바랄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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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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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째서인지 080302 기준으로 알라딘에 입고가 안되어 있다. 또 리브로에는 표지가 제대로 업로드가 안되어 있다. 뭔가 유통망 타는 것에 차질이 있는 듯?
만화웹진 만끽에서 연재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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