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유능력의 부자 되세요 [팝툰 21호]

!@#… 팝툰 만화프리즘의 신년 첫 칼럼이었던 셈인데, 문화 관련 긍정/진취적 이야기로 좀 가보자는 것이 과해서 너무나 건전발랄한 메시지가 되어버렸다는… -_-;

향유능력의 부자 되세요

김낙호(만화연구가)

인터넷이 보편화된 이래로 주기적으로 만화나 영화나 드라마 같은 대중문화 작품들의 불법 복제에 대한 이야기가 중심 이슈로 떠오르곤 한다. 항상 끌어안고 사는 화약고라서, 약간만 불을 붙일 사건이 터져주면 일시에 타오르는 것. 물론 불법 복제의 죄과는 그냥 상식적인 이야기지만, 이 모든 것의 너머에 근본적으로 깔려 있는 문화적 문제라면 역시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자신들이 불법 다운로드를 통해서 구할 수 있는 그 정도에 만족하더라는 것이다. 정당하게 즐기든 불법으로 즐기든 별 차이를 느끼지 않고 즐긴다는 현상 말이다. 이것은 사실 비단 불법 복제뿐만 아니라 작품 품질과 상관없이 좋은 작품이 처절하게 묻혀버리고 반면에 수준미달임에도 국민적 호응을 얻어서 히트치는 이상한 사례들의 축적과도 연결된다.

『얼렁뚱땅 흥신소』라는, 3% 시청률을 오갈 정도로 턱없이 과소평가되었던 2007년 하반기 최강의 명품 드라마가 있었다. 별 볼일 없는 루저들의 보물찾기 모험을 빙자한, 가족과 인생에 대한 성찰로 가득한 특이한 잡탕이랄까. 그런데 주인공 중 하나가 만화로 익힌 “방대하면서도 접시물 만큼 얕은 지식의 소유자”인 만화 가게 주인이고, 만화의 대사나 상황들을 중요하게 인용하며, 심지어 드라마의 문법상에서도 챕터별 번외편을 사용할 정도로 지극히 만화와 친한 작품이다. 철학적 터치의 동물 코미디 만화 『보노보노』에서 인용하는 “늙은 도마뱀은 쓸 데 없는 짓은 하지 않는다”는 대사가 그 어떤 고전 경구보다 더 심오하게 들릴 정도로 말이다. 그 중에, 가진 것 없는 주인공들이 하는 명대사가 하나 있다. “부자는 자신감이야. 비오는날 공원 벤치에 앉아, 컵라면에 단무지를 먹어도, 부자는 당당해. 왜? 돈이 없어서 먹는 게 아니라 먹고 싶어서 먹으니까. 가난이 왜 힘든 줄 알아? 눈치를 봐야 하거든. 남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까.”

이 이야기에서 부자를 재정능력이 아니라 스스로 무언가를 즐길 줄 아는 능력이 얼마만큼 쌓여 있는지, 즉 “문화향유 능력”으로 치환해보면 어떨까. 향유능력의 부자들은 어떤 만화나 영화를 보든, 그저 보고 싶어서 본다. 하지만 향유 능력이 가난한 자들은,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 그 자체로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변의 대세에 따라가며 줄거리만 대충 소모할 뿐이다. 그러니까 불법 다운로드로 모니터에서 대충 보든 책이나 DVD로 소장하고 작품 자체의 여러 가치를 향유하든, 반짝이는 재기발랄함이 가득한 작품을 보든 겉모습만 화려했지 알맹이는 빈약한 작품을 보든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하고 그저 기회만 닿으면 양적으로 흡수하기에 바쁘다.

드라마 속 대사는 계속된다. “돈이 없는데 어떻게 당당하냐”는 타당한 반문. 그런데 다행히도, 문화향유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은 돈을 불리는 것보다는 그나마 쉬운 편이다. 우선 문화향유능력 재테크의 기본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대해서 정당한 비용과 시간을 들여서 스스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다. 팔짱끼고 한걸음 뒤에 서서 나를 한번 즐겁게 해보라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좋아하는 것을 더욱 좋아할 수 있도록 스스로 노력을 해보는 시도 말이다. 예를 들어, 산업의 앞날과 작가의 생계를 생각해서 불법 스캔본 다운로드를 거부하고 만화책을 사는 것이 아니라, 정식 출간본 쪽이 더 향유가치가 높기 때문에 정당한 투자와 가치를 부여하면 어떨까. 혹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한정적인 투자능력 한도를 명백하게 인식해서, 대세라면 닥치고 대충 흡수하려고 하기보다는 이왕이면 더 우수해 보이는 작품 쪽에 집중적 애정을 던지면 어떨까. 그런 식으로 자신의 만족도를 위해서 그런 경험들을 반복하다보면 문화 향유능력이 차곡차곡 쌓인다. 즉, 문화 향유 능력 부자의 길을 걸어가게 된다. 새해에는, 한번 당당한 문화향유 능력의 부자가 되어 보는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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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양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만화를 가져오는 방식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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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thoughts on “향유능력의 부자 되세요 [팝툰 21호]

Comments


  1. 저도 지금껏 꽤 많은 만화를 사 모았지만 만화계 자체에서 향유가치, 나아가 소유가치를 높일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단순히 만화를 책을 통해, 혹은 모니터를 통해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뭔가 다양한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게 좋지 않을까요? 그러지 않기에 세상에는 ‘싸고 재미있는 놀 거리’가 너무 많은 것 같습니다.

  2. …예를 들면 만화 한권을 1박 2일로 빌리면 200원이 필요하고, 집에서 느긋하게 보기 위해서는 3,000원정도가 필요하지만, 느긋하게 볼 수 있는 것은 아무래도 후자쪽이란 말씀이군요.
    하지만, 이렇게 된다면 시장자체는 크게 성장하진 않을 거란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즐기려고 하는 품목이 사람마다 다를테니 말이죠. 그렇긴 해도 그건 그때가서 걱정하고 좀 향유하는 능력을 키웠으면 좋겠습니다^^;

  3. !@#… 이승환님/ 향유자용 건전 캠페인글이니까 이렇게 주장하는 것이지, 사실 향유자가 노력을 들여서 가치를 부여할 만한 ‘훌륭한’ 것으로 포장해내는 것은 만화계의 몫이죠. 제작자들이 다른 매체와 경쟁할 수 있는 훌륭한 물건을 만들어내는 것은 물론, 저같은 족속들은 담론적으로 계속 뭔가 대단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여튼 매체 자체로 보자면 오락으로서의 가치를 거의 완전히 잃어버리다시피 한 ‘소설’만 하더라도 여차저차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있는데, 무려 ‘만화’가 죽는 소리하고 있으면 참 한심할 노릇이겠죠.

    달바람님/ 어떤 작품들은 쌓아 놓고 15분만에 독파하고 다음 권을 집어먹는 것보다는 서재에 꼽아놓고 느긋하게 음미하면서 보는 쪽이 더 잘 향유할 수 있다는 ‘향유 품질의 차이’를 느끼는 것이 어떨까, 하는 거죠. 혹은 ‘소장하고 있음’ 그 자체로 얻을 수 있는 다른 만족감이라든지. 이것이 비단 만화 이야기 뿐이겠습니까(예를 들어, 정품 DVD 시장이 죽어버린 한국의 영화시장).

  4. !@#… nomodem님/ 지금와서 다시 읽어보니, 쉽게 풀어버린 것 같지도 않다는… -_-; 여튼 제가 그 쪽 캠페인을 위해 사용하는 ‘언어’는 “조금만 스스로(!)에게 투자하면 100만큼 즐길 수 있는 것을, 10-20만큼만 겉햩기하고 대충 넘어가면 얼마나 아깝겠냐”는 겁니다. 어디까지나 포지티브.

  5. 결국 돈쓸가치가있으면 돈쓰라는이야기로 보이는군요.

    뭐 저도 살만하다!싶은책은 사서보긴하지만.

    확실히 좋다싶어서 산것들은(책이든cd든뭐든.) 두고두고 애착이가더군요.

  6. !@#… 참치님/ 약간 더 자세히는, 돈 쓸 가치가 있어서 돈을 썼을 경우가 돈 쓸 가치가 있는데도 돈을 안 쓴 경우보다 훨씬 더 깊게 즐길 수 있는 여지가 많더라는 것이죠. 향유가치는 단순히 물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가치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쪽의 가치부여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것.

    nomodem님/ 혹은, 법적 강요라는 방법도 있지만… 아름답지 못하죠 확실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