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체적 현실 속의 설렘 – 수업시간 그녀 [기획회의 357호]

!@#… 우리는 다들 누군가에게 호구.

 

구체적 현실 속의 설렘 – [수업시간 그녀]

김낙호(만화연구가)

우리 사회에서 성장해 나아가는 과정에서는 중고등학교에서 신체적 성장과 함께 맞이하는 원래의 사춘기 말고도 종종 한번의 사춘기를 더 거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졸업 후 스무 살 남짓에 자신의 의지와 책임으로 만들어내는 인간 관계를 만들면서 맞이하는 두 번째 사춘기다. 입시 위주로 돌아가던 과중한 조직생활의 중고등학교 시절과 달리,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감정에 충실하고자 할 때 자신의 모든 생활을 비틀어 열성을 다할 수 있는 더 큰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것이 과연 보편적인가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실패한 첫 사랑의 기억을 왜곡하고 회피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30대 아저씨가 주인공인 영화 [건축학개론]이 상당한 공감대 속에 히트를 쳤던 것도 사실이다.

[수업시간그녀](박수봉 /애니북스)는 대학생 초반의 첫사랑의 애틋함과 미숙함을 현실감 넘치게 다룬다는 점에서[건축학개론]과 자주 비견되곤 했지만, 추억이라는 필터로 민감한 부분을 적당히 감상적으로 포장하지 않고 매몰차게 달려가면서 동시에 나름대로 건강한 성장담이다. 한 남자 대학생이 자신이 듣는 수업에서 우연히 옆자리에 앉은 여학생에게 반해서 여러 시도 끝에 구애한다. 한 여자 대학생이 친구처럼 털털하게 지내는 그 남자 대학생에게 어느덧 호감을 가지고 구애를 시도한다. 따지고 보면 나름대로 흔한 패턴일 수도 있지만, 주요 인물들의 성격, 그들이 상황에 대처하는 방식, 무엇보다 그 과정에서 묘사되는 감정선의 흐름의 탁월한 묘사가 이 작품을 주목하게 만든다. 설렘과 추억으로 접근하는 것이 아니라, 설렘과 현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사람들간의 관계를 탐구를 하기 때문이다.

설렘이란, 누군가를 갑자기 좋아하게 된다는 소재 특성상 가장 먼저 부각되는 부분이다. 이 작품에서 설렘은 감정이 담겨있는 시선, 그리고 다른 감정을 무시하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좋아하게 되니까 사방에서 불꽃이 반짝이고 뒤에서 후광효과가 나는 아이콘화된 표현이 아니라, 남자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서 감정이 전달된다. 자신이 좋아하게 된 단 한 명을 바라볼 때에만, 살짝 드러나는 목덜미를 바라보는 시선, 머리를 살짝 쓸어 올리는 손짓을 보는 시선만으로 육욕과는 다른 어떤 설렘 가득한 호감이 절로 전달된다. 또한 그 사람을 대할 때 그런 설렘을 가지고 하는 모든 행동은, 일반적인 사람 대 사람으로 교류하며 비슷한 상황에서라면 느껴야 할 다른 감정이나 이해를 무시한다. 착한 것이 기본 성격이라면, 설렘이 있는 사람을 대할 때는 아예 호구가 된다. 조별과제에서 덤탱이를 쓰든, 무리한 선물을 계획하든 의식하지 않고 당연하다는 듯 달려갈 따름이다. 여왕에게 복종을 종용해서가 아니라, 스스로 설레여 하며 그렇게 하는 연심이다.

그런데 적당히 달콤한 러브코미디로 빠지지 않게 하는 매력은 바로 ‘현실’이다. 마음의 설렘으로만 보면 남주인공은 세상 어떤 여자라도 반하게 할 기세지만, 실제로 옮길 수 있는 행동은 흥미로울 것 없는 뻔한 접근, 상대가 부담스러워지는 미숙한 고백이다. 안 그래도 미숙한데, 조언을 구하는 주변 지인들도 호사 취미만 있지 실질적 도움은 거의 되지 않는다는 점이 특히 더욱 현실적이다. 학교에 나오고 수업을 같이 듣는 것에서, 드라마틱한 사건은 없다. 게다가, 설렘 속에 헌신하는 상황의 이면에는 현실의 대가가 항상 따른다. 수업시간 과제 같은 조가 되어 좋은 인상을 남기기 위해서는 자신이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에 대해서 무리해서 공부하여 발표해야 하고, 선물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알바를 뛰어야 한다. 알바에서 겪는 현실은 러브코미디가 아니라 비정규 미숙련 노동자의 차가운 현실이며, 그것조차 넉넉치 않은 형편 속의 등록금 마련이라는 자신과 가족의 현실에 애써 등을 돌린 상태에서 하고 있다.

이렇듯 구체적 현실 속에서 설레여 하는 것이기에, 사람들은 알게 모르게 누군가에게 폐를 끼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상대를 생각하는 마음들이 엇갈리는 것은 기본이고, 오히려 상호적인 만남이 예외적 상황일 정도로 서로에게 미숙하다. 나아가 남자 주인공이 설렘을 품은 수업시간 그녀의 정중하게 친절한 행동들이 화답을 받지 못하게 되었을 때 더욱 큰 상처로 독자들에게도 전달되는 것은, 단순한 마음이 아니라 현실의 대가를 치르면서 쌓아 올린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시에, 그는 그것이 자신이 친구처럼 지내는 동기 여학생에게 보였던 행동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을 깨닫게 된다. 이 모든 것은 여느 주말드라마들처럼 선남선녀들이 서로 양다리를 걸치고 ‘어장관리’라도 했거나 무슨 치명적 매력의 팜므 파탈, 옴므 파탈 같은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저 각자 자신의 처지에서만 평범하게 충실히 움직인 결과일 따름이다. 그저 그럴 뿐인데도 상처를 입고 입히는 것이 바로 사람들 사이 호감이라는 감정이 만들어내는 관계인 것이다.

[수업시간 그녀]의 미덕은 이런 내용을 담아내는 과정에서 직설적 훈계도, 끈적한 최루성 드라마도 배제하고, 섬세한 시각표현과 연출의 매력을 극대화한다는 점이다. 우선 보편적 이입을 위한 장치들이 촘촘한데, 주인공들의 이름을 작품에서 한번도 호명하지 않는 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감정 묘사의 직접적 전달을 위해 가장 중요하게 활용되는 요소인 캐릭터의 눈을 지워버린다. 다른 누군가의 감정을 목격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독자 각자가 그런 상황에서 생각나는 누군가를 넣어도 될 듯 말이다. 그 대신 작품 전개를 위해 필요한 감정 흐름의 전달은 앞서 언급한 시선, 그리고 몸짓을 통해서 이뤄낸다. 사람들 사이의 거리감, 지향성 같은 것을 담은 포즈 요소부터, 귀밑머리를 쓸어 올리는 어떤 순간의 발견들까지 섬세하고 촘촘하게 상황의 공감대를 유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간결한 흑백 선을 통해서 순간크로키처럼 지극히 효율적으로 전달해낸다.

설렘이 있고, 그것을 현실의 자장 안에서 추구하며, 그 과정에서 상처를 입기도 입히기도 하면서 살아가게 된다. 그것을 알면서 살아갈 때 경험만큼 뭉툭해지고, 스스로 되새김질하고 소화하는 만큼씩만 나아갈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좀 더 결연하게 이뤄지고, 또 다른 이들에게는 꽤 오랫동안 고뇌도 하고 나름의 방법으로 열심히 사과하고 그러다가 군대에서 몇 년 보내기도 해야만 겨우 이뤄질 수도 있다. 하지만 결국 어떻게든 그 지점에 도달할 때, 그렇게 또 한번의 사춘기가 지나가고 좀 더 성장한다. 그러다 보면 비로소, 또 다른 새로운 만남도 찾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수업시간 그녀
박수봉 지음/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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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516 공화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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