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귀여움으로 진입장벽을 낮춰준, 속깊음의 이야기.
받아들인다는 것 – [고양이 낸시]
김낙호(만화연구가)
어떤 집단이, 기존 성원들과 상당히 다르다고 여기는 존재를 일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여기서 “다르다”에는 성적 지향, 인종, 출신, 장애, 종교 등 온갖 것을 적용할 수 있다). 사람의 사고방식이란 아무래도 효율성을 추구하기에, 어떤 개인을 깊게 알아보기 전에 먼저 그 개인이 포함된 가장 커다란 범주로 판단한다. 내가 생각하는 내부 집단 안에 속한 이에 대해서라면 세부적으로 자세히 다양한 측면을 비견해보며 판단을 내리지만, 외부라고 선을 긋고 나면 커다랗게 뭉뚱그려진 타인들의 집단에 속한 몰개성적 부품일 뿐이다. 그런 사고과정을 자체를 막을 방법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닌데, 그럼에도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과정은 그렇다면 어떻게 이뤄지는가. 어떻게 사람들은 다른 이에 대한 편견을 걷고 온전히 평등한 일원으로 받아들이게 되는가.
[고양이 낸시](엘렌 심 / 북폴리오)는 쥐 마을의 쥐 가족이 문 앞에 버려진 아기 고양이 낸시를 거둬들이며 벌어지는 이야기다. 쥐의 천적인 고양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고민하지만, 천적이라는 범주보다 결국 자기 집에 도달한 아기 딸, 즉 가족이라는 범주로 받아들이는 것을 선택한다. 그 집의 아들인 지미 또한 낸시를 새로 생긴 여동생으로 받아들이고, 든든한 오빠의 모습을 보이고자 한다. 마을 사람들, 아니 마을 쥐들도 처음에는 고양이를 보고 고민한다. 하지만 결국 천적이 아니라 괜찮은 이웃 더거씨네 작은 딸으로 간주하게 된다. 그리고 낸시가 자신이 남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고양이라는 사실을 알고 실망하지 않도록, 온 마을의 노력이 시작된다.
이 작품은 원래는 트위터에서 짤막한 연작으로 하나씩 공개하던 것을, 폭발적 인기 속에 이야기 흐름을 보충하고 책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한쪽으로는 트위터 같은 사회관계망에서 광범위한 호응을 얻는 ‘냥줍’, 즉 길고양이를 데려가서 키우는 사연을 이야기의 기본 재미 코드로 삼는다. 그리고 그것을 쥐 사회와 접목하며, 차별과 관용에 관한 훈훈한 우화로 완성하는 절묘한 성과를 보여준다.
냥줍이 주는 재미 코드의 핵심은 귀여움이다. 고양이, 특히 아기고양이의 귀여움은 날선 공격성을 구사하는 까칠한 논쟁 달인으로 오랫동안 명성을 누린 이라고 할지라도 좀처럼 거부하기 어렵다. 보송보송한 털, 귀여운 초승달과 큰 눈망울을 오가는 눈빛, 도도함과 치대기가 수시로 교차하는 몸짓, 기타 고양이다운 습성들이 넘치기 때문이다. 태생적으로는 천적에 해당하는 낸시를 과연 쥐 마을 일원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대해서 주민들은 기본 입장이 거부 쪽일 수 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민을 하게 만드는 반대급부의 가치가 바로 압도적인 귀여움이다. 귀엽기 때문에 도저히 비정하게 내칠 수 없고, 좀 더 곁에 두게 된다. 이것은 이질적인 누군가를 받아들이는 것에 수반되는 갈등, 특히 현실세계에서 수많은 불관용의 문제를 만들어내는 뿌리 깊은 감성 차원 거부감의 문제를 간편하게 뛰어넘게 만든다.
이런 귀여움의 효과는 그림체의 산뜻함과 만나면서 더욱 강력해진다. 낙천적 느낌의 둥글고 열린 선이 만드는 오밀조밀한 의인화 동물들은 파스텔 톤의 가벼운 색채와 구분선 없는 칸으로 이야기를 펼쳐나간다. 격한 드라마보다는 소소한 감정의 순간들이 느린 속도로 흘러간다. 이런 방식은 2000년대 초반 ‘에세이툰’ 부류의 유행에서도 드러난 바 있듯, 감성적 여운에 매우 적합하다.
하지만 냥줍의 귀여움은 일차적 편견을 걷어내는 기능일 뿐, 낸시가 받아들여지게 되는 이유는 그 너머에 있다. 고양이에 대한 거부감이 박혀있는 어른 쥐들은 귀여움 때문에 그 편견이 풀린 상태에서, 그리고 어린이 쥐들은 별다른 편견이 없기 때문에 처음부터, 낸시라는 개인을 바라보게 된다. 쥐 마을에서 함께 자라난 낸시는, 고양이든 뭐든 그냥 무엇보다 낸시다. 분홍 리본 머리핀에 기뻐하고, 공주님 놀이에서 공주 역할을 좋아한다. 마음 씀씀이 좋은 오빠를 늘 아끼고, 자신이 원하는 바와 친구들에 대한 배려 사이에서 늘 속 깊은 선택을 할 줄 안다. 마을 어른들과도 잘 지내고, 아이들과는 더욱 잘 지낸다. 다만 쥐들 사이에 유일한 고양이다보니, 덩치가 좀 많이 크고 힘이 세고 꼬리가 유난히 복실복실할 따름이다.
낸시가 그런 성격으로 자라나고 생활할 수 있는 것은 마을 전체가 기울여준 배려의 힘이다. 자신이 뭔가 다른 존재, 마을에 문제가 되는 존재라고 느끼지 않도록, 가족도 동네 사람들도 모두 최선을 다해 힘쓴다. 쥐의 천적인 고양이임을 깨닫지 못하도록 고양이와 관련된 기록들을 열심히 은폐한다. 그 중 가장 강력한 노력은 오빠 지미의 몫인데, 무려 자기 자신만 낸시가 고양이임을 깨달았고 다른 어른들도 아무도 모르고 있다고 착각한다. 홀로 온 마을로부터 비밀을 지켜주려는 가족애가 열성적이기에 웃기고 감동적이다.
낸시는 고양이고 따라서 쥐의 천적이라는 인식은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실관계가 바뀌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손쉽게 결론을 내려버리기보다는, 함께 사는 가족이고 이웃이라는 인식, 모두를 돕기 좋아하는 착한 개인이라는 인식 등 다른 범주 인식도 함께 놓고 판단하는 묘를 발휘할 수는 있다. 그 전체를 놓고 봤을 때, 낸시는 태생이 고양이인 쥐 마을의 좋은 주민, 더거씨 댁의 사랑스런 막내딸, 쥐 유치원의 좋은 친구다.
나아가, 공동체의 평등한 일원으로 키워내서 받아들이기 위한 전제는 먼저 평등한 대우부터 해주는 것이다. 함께 먹고 함께 놀고 같은 경험과 배움을 얻도록 만든다. 물론 이것은 획일적인 것과는 달라서, 낸시의 다른 모습과 큰 몸을 비정상적인 것이 아닌 그저 다름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덩치만큼 식사를 많이 먹어서 불편한 부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덩치만큼 힘도 세서, 공놀이할 때 한 팀으로 부르면 재밌다. 꼬리털이 많아서 보기에 노골적으로 이질적이다. 하지만 푹신한 담요 같아서, 감싸고 있으면 기분이 좋다.
[고양이 낸시]는 이렇듯 타인을 받아들이는 것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부분을 끄집어낸다. 평등할 수 있도록 평등하게 대해주고, 다름을 개성으로 인식하고, 이왕이면 해당 개인을 직시하고, 그런 것을 위해 필요한 배려를 하며, 무엇보다 다들 함께 그 과정에 동참하는 것이다. 귀여운 모습, 착한 모습을 보고 감성적 ‘힐링’을 얻는 것은 물론이지만, 좀 더 훈훈한 성찰을 얻기에도 좋은 착한 냥줍 만화다.
고양이 낸시 엘렌 심 지음/북폴리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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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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