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양한 시도를 하는 것 자체는 물론 응원하지만, ‘다큐’의 의미는 다시금 챙겨둬야 하기에 써두는 글. 게재본은 여기로.
[SBS 스페셜], 갈등을 다루는 스페셜하지 못한 방법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어떤 사회적 사안을 설명하고자 할 때 정확한 규명과 대중적 호응이라는 두 가지 목표는 종종 충돌하기에, 두 가지 사이의 균형을 잡는 것이 중요하다. TV 시사 다큐 프로그램은 특히 그런 균형을 신경써야 하는데, 방송의 공공성과 대중매체로서 입지를 다지는 대중성이 함께 작용하기 때문이다.
소재로 삼는 시사적 사안에 비교적 뚜렷한 거악을 설정할 수 있으면, 그 균형은 좀 더 쉽다. 널리 함께 개탄할 수 있기에 대중적 호응을 얻고, 악행의 정확한 규명이 그런 호응을 더욱 키워내는 것이 가능하니까 말이다. 인기 시사다큐 [SBS 스페셜]에서 세월호 침몰 사건에 얽힌 여러 무능을 알리고 ‘코피노’ 방치 범죄자들을 고발했을 때가 그랬다. 명백한 악역들이 있고 피해자 목소리를 대변하는 것이 뚜렷할 때, 프로그램의 취재력과 유연한 구성기법은 확실하게 빛을 발했다. 하지만 갈등의 축이 좀 더 복합적으로 첨예하거나 더 심층적으로 들어가야 문제의 함의가 드러날 때라면 어떨까. [SBS 스페셜]의 최근 몇가지 에피소드를 통해서, TV 시사 다큐 일반에서 흔히 오작동을 일으키는 안타까운 한계들을 되짚어 본다.
사안의 개인 사연화
사람의 공감을 얻는 매력적 콘텐츠의 비결 중 하나는, 사안을 어떤 사람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너무 열심히 인간극장화시키다보면, 정작 해당 개인에게 초점이 갈 뿐이고 그의 사연을 통해 원래 전달해야 했던 사안의 논점들은 슬며시 사라지기 쉽다. 그렇게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사람들이 만들어낸 사안에 대한 토론이 아니라, 어떤 사람에 대한 감정 공유다. [알파고 쇼크]편은 바둑 프로그램 알파고와 이세돌의 대국을 다루었다. 흥미로운 그 행사를 징검다리 삼아서, 인공지능의 급격한 발전이 가져올 사회적 변화를 상상하고 그것을 모두에게 좀 더 나은 세상으로 만들려면 필요한 노력에 대해 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세돌이라는 개인이 대국에 임하며 보인 소소하고 인간적인 모습들로 채우고 끝났다.
신중한 거리두기보다는 화제성
개인들의 사연이 재미있어지는 지름길은 드라마틱한 화제성이다. 다루겠다고 표방한 사안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요소가 아니라도 이미 화제성을 지닌 사건과 사람을, 느슨하게 엮어서라도 여하튼 주인공 삼는 것이 매력적이다. [럭셔리 블로거의 그림자] 편에서 인기 허영 블로거 가운데 하필이면 정치인 출신 방송인 강용석과 엮인 불륜 관련 소송이 진행중인 ‘도도맘’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특히 해당 사안에 대한 그의 자기 입장 변호를 거의 필터링 없이 내보내야할 이유가 있을까. 화제의 드라마틱한 사건을 끄집어내며 물의를 던져서 호응을 끌어내는 상업적 이유 말고, 매체를 통한 다른 자아의 연기라든지, 허세가 호응을 얻고 더욱 강화되는 왜곡된 개인미디어 환경이라든지, 말 그대로 ‘럭셔리 블로거의 그림자’를 공론화하는 것에 필요한 것인가.
재미없는 전문가보다는 방송친화 출연진
사람을 통한 화제성을 만들기 위한 또 다른 접근은, 재미없는 전문가보다는 방송 친화적 출연진을 짜는 것으로 나타난다. 오늘날 갈등 현상은 단일한 전선에서 만들어지는 선명한 선악보다는, 무의식적으로 파고든 잘못된 관행, 그런 관행들이 굳어버린 제도, 이성적 납득만큼이나 중요한 정서적 자존감, 여러 갈등 전선의 결합으로 나타나는 복잡다난한 결과가 많다. 그렇기에 해당 사안에 대처하기 위한 운동과 사상은 어떤 맥락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깊게 공부하여 지식과 운동을 조직화하는 전문가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졌다. 하지만 십중팔구, 그들의 정교함은 재미가 없다. 그보다는 [발칙한 그녀들]편에서 그랬듯이, 오늘날 페미니즘의 모습을 ‘발칙함’으로 대표하고, 반대항으로 중년 남성 배우 박철민을 패널에 넣는 것이 더 방송친화적인 그림이 된다.
근본적 불평등의 터부시
무슨 고전적 맑시스트가 아니라도 누구나 인정할만한 사실은, 우리 사회에는 여러 뿌리 깊은 불평등한 권력구조가 있고, 그로 인해 다양한 갈등이 현상으로 나타나곤 한다는 것이다. 이상적인 경우라면 근본적 권력구조를 직면시키고 그것을 해체할 방법을 시청자 시민들과 함께 숙고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편하고 재미없는 작업보다는, 당장의 갈등을 보여주고 동정을 얻는게 대중적 호응이 빠르다. [엄마의 전쟁]편이 좋은 사례로, 워킹맘의 고충을 현상으로서 보여주는 것에는 대단히 효과적이다. 하지만 정작 육아휴직 제도를 활용하기 어렵고 업무시간 과잉을 유도하는 노동환경, 육아 의무를 엄마에게만 부여하는 통념에 대해 되묻지 않고 그저 고전적 의미의 ‘정상 가족’을 그리워하는 개인들을 묘사한다.
단순무난한 봉합
대중적 호응에 심취하여 사안을 개인 사연으로 만들고, 화제성에 치중하느라 거리두기를 경시하고, 방송친화적 그림을 뽑고, 그 과정에서 근본적 불평등은 외면하며 방송을 전개한다. 그런데 소재로 선정한 갈등 현상 자체는 존재한다. 그렇다면 방송을 도대체 어떻게 마무리지어야할 것인가. [아저씨, 어쩌다보니 개저씨] 편에서 지목한 ‘개저씨’라는 용어는, 과거의 ‘꼰대’ 같은 용어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국사회의 오랜 권력서열 오남용 문화 및 그것의 균열 현상을 압축한다. 방송 내내 회사의 젊은 직원과 중장년 간부의 명백하게 권력형 대립구도를 보여주고는, 엉뚱하게도 해법은 세대간 소통이고 대화 매너의 회복에 머무른다.
단순하고 무난하게 갈등의 표면만 봉합하는 것은, 온라인 게시판 구석에서 전전하는 방송캡쳐 짤방만 남을 뿐이고 깊은 갈등을 끄집어내어 이치를 주고받는 공론으로 발전할 기회는 오히려 놓쳐버린다. 시의적절하게 소재를 포착하는 취재력, 좀 더 다양하고 재미있는 기법을 구상하는 제작력이 겨우 그렇게 낭비된다면, 너무나 안타까운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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