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혹은 “다 쓸어버려”. 게재본은 여기로.
지정생존자, 정치 리셋 판타지
김낙호(미디어연구가)
거대한 테러로, 대통령을 필두로 여야 정치판이 한번에 깡그리 없어져버렸다. 위기인 것은 알겠는데, 그것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오히려 더 훌륭한 정치가 이뤄지는 것 같다. 미국드라마 [지정생존자]가 담아내는 호쾌한 즐거움의 정체다.
어째서 많은 미국 시민들이, 정책 경력도 없고 경제 비리 전망이 넘치는 무례한 리얼리티쑈 스타에게 표를 던져 대통령을 뽑는 과오를 저질렀는가. 여러 크고 작은 사회적 조건의 결합이기는 하지만, 확실하게 표면에 드러난 현상 한 가지는 바로 “그들만의 리그인 기성 정치”에 대해 축적된 커다란 불만이다. 세상은 그간 크고 복잡하게 발달해왔고, 그러다보니 전문적인 정치인과 관료 및 그들에게 입김을 행사하는 경제인들의 영향력은 커졌다. 반면 개별 시민들은 정치의 전개 맥락도 놓치고 효능감도 바닥을 친다. 사회가 나에게 따스하고 내 지갑이 통통해지는 꽃피는 시절이라면 별 상관없을 수 있지만, 사회변화를 따라잡기 버거워 불안하고 불평등이 심화되는 세상에서라면 갑갑한 정치에 불만이 생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그럴 때 나오는 것은 어느 사회든 비슷하게도, 그냥 다 뒤엎고 새로 시작되었으면 하는 열망이다. 그리고 대중오락이 그런 대중적 열망을 방치할 리가 없다.
[지정 생존자]가 여느 백악관 드라마와 다음 점은 거의 완전한 리셋이다. 그저 좀 더 “서민적인” 사람이 비인간적인 정가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다는 흔한 수준이 아니다. 대통령의 국회 교두연설, 즉 행정부와 입법부, 사법부 수반들이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있는 현장이 폭발한다. 유사시를 대비하여 각료 가운데 한 명을 다른 장소에 격리해두는 매뉴얼에 의하여, 권력승계서열에서 한참 아래이며 조만간 퇴임할 예정이었던 주택도시개발부장관인 커크먼이 얼결에 신임 대통령이 된다. 사실상 아무 것도 남겨진 것이 없는 상태에서 국제 외교, 연방과 주정부 사이의 권력 균형 등을 완전히 새로 그려내야 한다. 특히 국가 위기 냄새만 나면 이때다 하고 피어오르는 우경화 물결을 억눌러내는 것이 골칫거리다.
원래 이 드라마는 두 가지 큰 줄기, 즉 전대미문 테러의 배후를 캐내는 스릴러와 커크먼이 여러 난관을 넘으며 국가 지도자로 성장하는 정치 드라마 두 가지로 이뤄져있다. 하지만 정작 시청자들에게 호응을 얻어낸 부분은 압도적으로 후자에만 쏠려있다. 커크먼 대통령은 사적 이익을 위한 권력욕이나 거창한 공적 대의에 탐닉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적 윤리의식으로 무장했다는 것이 장점이다. 자신을 가장 처음에 비웃었던 연설 작성자는, 약점을 솔직히 인정하여 감복시켜서 가장 든든한 오른팔로 만든다.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서 협상과 강경책을 실용적으로 오가지만, 불리한 진실은 은폐하기보다는 정면으로 돌파하고, 철저한 사실관계를 축적한 후 선택을 내리며, 비상상황이라도 전체주의적 통제보다 자유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렇게 이란과의 전쟁 발발을 막고, 미시건 주지사의 무슬림 탄압정책을 막고, 의회 선거를 무사히 진행시켜낸다. 윤리적 합리성으로 움직이는데 강한 정치에 대한 열망 그 자체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커크먼으로 하여금 아무 것도 못하도록 갑갑하게 만드는 자잘하고 복합적인 정가의 상호이익관계가 없기 때문이다. 민주제의 권력 분리와 견제의 기본틀은 계속 존재하여 독재자 판타지로 빠지는 세계관을 방지했지만, 정가 몰살이라는 편리한 설정을 통해서 대통령이 과제 해결에 집중하면 정말로 해결할 수 있는 세계를 만들었다. 게다가 해결해야할 과제도 세밀한 이해관계 조정에 관한 것이 아니라, 국가기능 복원, 국내외적 평화 유지라는 지극히 명료한 것들이다. 세계 최고 의료비와 보험 사각지대를 자랑하는 후진 의료보험 제도를 땜질 개선한 것조차 국민의 절반이 반대하는 복잡다난한 이해관계의 현실 미국에서는 얻을 수 없는, 문제해결의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정치 리셋을 하고 세상이 잘 풀리는 애틋하고 순박하며 기본적으로 도피적인 상상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선 이후로 이 드라마의 미국 시청률은 하락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뚜껑이 열리고 보니 정말로 일종의 정치 리셋이 일어나 버렸는데, 현실 트럼프는 환상 커크먼과 정반대의 존재였던 것이다. 드라마 속 무슬림 탄압은 대통령의 카리스마적 대처로 제압되어 카타르시스를 안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대통령이 무슬림 차별적 입국제한조치를 강행하고, 시민들의 열띤 시위와 조직적 소송, 독립적 사법부의 유예판결로 맞서야 한다. 격렬한 참여의 현실 정치 앞에서, 즐거운 판타지는 조금 민망해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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