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스모스> 속에서 부유하기
신인 만화작가가 데뷔하는 방식에는 다양한 경로가 있겠지만, 가장 놀라움을 안겨주는 경우는 어느 순간 짦막한 단편으로 세상에 선보인 후 오랫동안 숨겨져있다가 온전한 작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실력있는 신인을 새로 발굴한 듯한 만족과, 면식있는 작가의 성장한 모습을 바라보는 즐거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들을 ‘중고신인’이라는 말로 폄하하기도 하지만, 작가적 고민으로 인하여 스스로 만족할만한 역량을 쌓을 때까지 자진해서 다시 축적의 길로 돌아가는 것은 결코 쉬운 결심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김성준의 <코스모스>는 이러한 과정의 결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특이한 사례가 될 것이다.
본 작가의 공식적인 데뷔는 97년 봄, <빅점프>에 단편이 입선했던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필자가 김성준이라는 이름을 처음 접한 것은 1997년, 제1회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에서 수상작에 올라와있던 <잠자리는 없다>라는 작품을 통해서였다. 보통 공모전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신인들이 기발하지만 정리되지 않은 아이디어로 특징지어진다면, <잠자리는 없다>의 경우는 오히려 흔한 SF적 발상이지만 잘 정리된 안정적인 연출으로 필자의 시선을 끌었다. 오토모 가츠히로의 영향이 강하게 느껴지는 화풍이었지만, 색채의 연출 활용 등에서 스타일리스트로의 성장가능성이 점쳐지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미 충분히 상업지에서 정식데뷔를 할 수 있는 실력이나 감수성을 갖추었음에 분명했지만, 아무리 기다려봐도 연재 소식이 들리지 않았고 자연스럽게 잊혀져갔다. 그런데 2001년, 다시 동아엘지 공모전에서 낮익은 이름, 하지만 그림의 질감은 사뭇 다른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본선진출작에 걸려있던 <난...>이라는 단편이었다. 그리고 다시 한번 잊을 만할 때인 2003년, <배바라기>라는 작품으로 다시한번 같은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같은 해, 서울애니메이션 센터의 출판제작지원 대상작 명단에서 김성준이라는 이름을 발견했고, 결국 이렇게 정식 출판 데뷔를 하게 된 것이다. 앞의 두 단편을 포함한 본서 <코스모스>의 탄생배경이다.
<코스모스>는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작가가 그린 7편의 단편들이 하나의 스토리라인을 가지고 연결되어 있는 구성을 지니고 있다. 각각의 작품은 화풍이나 이야기형식, 그리고 분절성에 있어서 독립된 단편같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발생한 여러 에피소드들이 자유롭게 배치되어 있다. 덕분에 독자는 시작하는 첫 에피소드에서 난데없이 4명의 주인공들이 한자리에 처음 맞닥뜨리는 상황 속으로 던져지며, 그 주인공들만큼이나 어리둥절하고 난감해할 수 밖에 없다. 그리고 이어지는 에피소드 속에서 이들의 과거 관계를 조금씩 엿보며, 결국 마지막에 가서야 수렴된다. 이것은 분명히 매우 불친절한 방식이며, 창작자도 수용자도 편하게 뒤로 기대어 쉴 수 있는 여지를 두지 않는다. 별로 대단할 것도 없는, 하지만 동시에 쉽게 버릴 수도 없는 인연으로 서로 연결되는 두 쌍의 남녀, 그리고 그 남루한 현대남녀들의 사랑, 꿈, 환상의 담담한 이야기들이 이어진다.
본작의 연출방식 역시, 친숙한 무언가를 제시하면서도 실제로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일견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필두로 90년대 후반 유행한, 독백조의 관념적 나레이션이라는 전통을 이어가는 듯 하지만,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러한 류의 핵심적인 특징인 ‘쿨’한 성격이라기보다는 단지 상호관계에 미숙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이 앞선다. 상황과 분위기, 인물들은 하나로 섞여들어가기보다는 마치 각각 다른 레이어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한 거리감을 만들어낸다. 리얼한 묘사를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것은, 단지 환상 속의 장면을 묘사하는 부분만이 아닌 작품 전반에 걸쳐서 느껴지는 정서다. 나아가, 만화에서 무언가를 전달하는 방식으로 이야기 자체의 드라마성과 화풍을 통한 정서전달이라는 측면을 볼 때, 작가가 추구한 것은 오히려 이야기 자체의 정서전달과 화풍의 드라마성으로 생각될 정도다. 다시 말하자면, 대사와 드라마 전개는 인과에 의하기 보다는 정서적 흐름에 따라서 여러 주인공들 사이를 누비고 있고, 오히려 시각적 요소들이 다양한 화풍과 상황들을 넘나들며 어떤 특정한 전개양상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각 에피소드별 주인공의 전환이나 소제목을 통해서 드러나는 전체 정서의 방향잡기, 만화화풍이나 이야기서술 방식의 변화에서 나타나는 흐름 역시 시간과 인과를 의도적으로 파괴해 나가며 진행된다. 속칭 실험 만화들이 시각적 파격에 대한 집착으로 흐르기 쉬운 것에 비해서, <코스모스>는 이야기 서술 자체를 파기하지 않고도 다양한 층위에서 파격을 실험하는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는 공간인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성공적이고, 때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하다; 때로는 신선하고, 때로는 작위적이다. 하지만 그 도전정신 자체는 집요하리만큼 일관적이다.
첫 이야기인 <올리브그린>에서 주인공인 시우, 연희, 은정, 지철은 서로 만난다. 네 명 모두의 시각에서 각각 그 만남은 묘사되며, 지난날의 이야기들이 이어질 것을 예고한다. 여기에 이어지는 <난...>에서 시우와 연희의 첫만남이 공상속의 지구파멸과 정체성의 이야기로 유머러스게(?) 묘사된다. 그리고 시간은 더욱 거슬러 올라가서, 연희가 상징물처럼 착용하고 있는 돌고래 목걸이를 처음 줍는 것으로 시작하는 <바다가 오다>의 연희와 은정의 취중환상으로 이어진다. <꿈속의 여인>에서 지철의 성적 환타지가 앞의 이야기와 연결되며, <나의 거리>에서 은정을 향한 지철의 마음이 아예 만화의 형식을 벗어던지고 직접 묘사된다. 이 낯선 변화가 끝난 후 다시 만화로 돌아온 이야기인 <배바라기>는, 4명의 주인공을 벗어나서 한 할아버지와 손녀의 비극적인 이야기로 건너뛰며, 연희의 돌고래가 가지는 ‘바다를 향한 탈출’이라는 자유로운 해방의 이미지와 현실에서의 비극적 결말을 내포한 상징을 완성한다. 그리고 이야기는 <난교 그리고 바다>의 소설체를 통해서 결국 예정된 결말을 향해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지나간 후의 에필로그 <핑크하우스>로 이후를 열어놓으며 이렇게 작품은 완전히 끝을 맺는다.
작가의 아직 정리되지 않은 실험정신이나 실체를 알기 쉽지 않은 –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전형적인 관념적 흐름은 앞으로 차차 풀어나아가야할 과제다. 화풍에서나 이야기에서나, 자신이 영향받아온 특정 만화나 소설, 영화 작품들의 흔적이 완전히 소화되지 않고 일부분에서 날것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도 좀 더 시간을 가지고 극복해 나아가야할 부분이다. 나아가, 표현이라는 측면과 독자와의 소통이라는 측면 사이에서 가장 합리적인 균형을 만들어나가는 것은 현실과의 타협이라기보다는 작가로서의 성장의 척도에 가깝다. 하지만 이제 막 스타트를 끊은 재능있는 신인으로서, 이번 작품이 부끄럽지 않은 데뷔작으로 남을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사실 권말의 서평에서 추구해야 할 목적은 본작을 조금이나마 더 재미있게 즐길 수 있도록 정보와 가이드를 제공하는 것이고, 앞에서 그 것을 충족시켜보고자 한두마디 늘어놓은 셈이 되었다. 하지만 필자의 진심은, <코스모스>의 경우 이런저런 설명들을 살펴보면서 논리적인 해답을 찾아내기 보다는 오히려 처음 볼 때의 그 거리감과 불편함을 더욱 즐겨볼 것을 바라고 있다는 쪽에 가깝다. 그것이 이야기성과 실험성 사이에서 새로운 균형을 추구해보려고 하는, 오랜 제작기간을 들여서 만든 신인작가의 연작 작품의 매력을 가장 효과적으로 즐기는 방식이다. 작품의 마지막 공간이 그림속에 있고, 그 공간의 그림이 다시 그림속에 있는 무한반복의 라스트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작품과 현실의 세계 사이에서 잠시 부유해보며 여운을 느껴볼 것을 권유한다. 그리고 그 여운이, 작가의 다음 작품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본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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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