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여러 지면에서 현실과의 고리를 잃어버리고 있는 젊은 만화가들의 경향성을 꽤 강도 높게 비판해온 바 있다. 삶과 현실을 바탕으로 하는 고민들보다는, 장르적 규칙만을 소재로 조합형으로 만들어진 매끈한 엔터테인먼트 코드의 덩어리 – 한마디로 쭉정이만 남는다는 것이다.
최규석은 이런 시대적 흐름을 정면으로 거스르고 있는 몇 안되는 젊은 작가다. 시각적으로도, 미소년미소녀 같은 장르 코드나 화사한 기교에 의존하기 보다는, 거칠면서도 정확한 선과 뚜렷한 데생, 주제와 이야기 중심의 군더더기 없는 연출에 대부분의 재능을 할애하고 있다. 아직 ‘장편’작품을 남기지 못한 신인에게는 과분한 평가일수도 있지만, 그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이야기의 힘은 마치 막일로 단련된 근육질 마냥 투박하고도 탄탄하다. 드라마틱하고 형이상학적 고민으로 과욕을 부리지 않고, 주변에서 약간만 자세히 보면 어디서든 볼 수 있을 법한 소외와 모순 속에서 이야기를 꺼내온다. 하지만 최규석의 잠재력은 단순히 “어둡고 현실적인 이야기를 잘 한다”는 정도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때로는 현실의 범주에서, 때로는 절묘한 상상력의 비유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때로는 심지어 대단히 유머러스하게.
산다는 것의 업보: <사랑은 단백질>
<사랑은 단백질>은 본 단편집의 문을 여는,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살아가는 건 누군가를 밟고, 죄를 지어가며 쌓이는 업의 연속이다. 뭐 그렇지만 결국은 인간은 고기를 먹고 사는, 단백질을 섭취하는 동물들 아니겠는가. 죄의식을 가지든, 무감각하든, 그 사실 자체만은 여전히 변함없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닭집을 하는 닭사장, 족발집의 돼지사장의 처절한 희극성이 독자의 후두부를 강타한다. 전체 주제를 압축해서 다시 재현해내는 돼지저금통의 캐릭터도 압권이다. 풍자와 유머의 칼날을 잔뜩 갈아서 한껏 펼쳐보이기로 작정한 작가의 굳은 의지가 돋보인다. 그리고 그것은 충분히 성공적이다.
약자 위의 삶: <콜라맨>
원래 최규석은 <솔잎>이라는 작품으로 1998년 서울문화사 신인만화 공모전 성인지 부문에서 금상을 수상한 바 있다. 하지만 군입대로 인하여, 작가의 정기 지면 데뷔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이다. 따라서 제대후, 작가는 다시 ‘데뷔’를 했다. 2002년 동아/엘지 국제만화전의 극화부문 당선작으로, 만화판의 여러 사람들로 하여금 최규석이라는 이름을 주목하게 만들었던 첫 사건인 <콜라맨>의 등장이다. “…페스티벌용 작품의 경우 모호한 이야기에 복잡한 연출이나 화려한 작화실력을 자랑하는 경우가 많은데 설익어 보이는 것들이 대부분이다…반면, <콜라맨>은…”는 당시의 심사평이 주목의 이유를 잘 요약해주고 있다. 공동작업을 한 서경순이 주로 작업했다는 골목길 배경의 표정들과, 투박한 삶을 사는 캐릭터들이 벌이는 이야기의 조화가 돋보인다. 하지만 사회적 약자를 밟고 그 기반 위에서 안정적 삶을 영위하는 전형적인 우리 삶을 묘사하는 접근법이 더욱 매력적이다. 이러한 주제와 시각은, 이후 작품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중심축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다만 ‘공모전을 노린 해피(?)엔딩’이 아직은 약간 어색한 수작.
인생사의 블랙코미디: <공룡 둘리>
<콜라맨>이 만화판에 관심있는 자들에게 최규석이라는 이름을 알렸다면, 일반 독자층에게까지 그 차원을 확대한 것은 바로 이 작품 <공룡 둘리>다. 김수정의 <아기공룡 둘리> 탄생 20주년으로 ‘주민등록증 발급’이니, ‘둘리의 거리 제정’니 하고 호들갑을 떨때 난데없이 한켠에서 등장해서 큰 화제를 모았던, 본 단편집의 표제작. 공모전이나 졸업작품집이 아니라 본격 상업지면에서 데뷔를 한 첫 작품이다. 국가대표급 명랑만화의 캐릭터들을 처절하고 남루한 현실로 끌고들어옴으로서 만들어지는 극한의 블랙코미디. 다만 워낙 발상의 충격이 크다보니, 독자들로 하여금 웃어야할지 슬퍼해야할지를 헷갈리게 만들었을 따름이다. 최규석식 세계관과 주제의식을 한층 명쾌하게 정리하며, 곤궁한 현실과 역설적 유머의 결합을 본격적으로 펼쳐보인 수작.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때 왠지 둘리와 함께 소주잔을 기울이고 싶어지도록 하는 힘을 지닌 만화로, 단지 오마쥬나 패러디 정도로 의미를 한정시키기에는 너무나 아까운 작품이다. 한창 젊고 실력있는 신인들을 ‘인디존’이라는 코너를 통해서 발굴하던 격주간 만화잡지 ‘영점프’의 2003년 5월 1일자에 개재.
인간이 만든 것: <리바이어던>
2003년 상명대학교 졸업작품집에 실린 단편. 권력, 지배에 대한 짧은 우화이자, 유쾌한 소품. 스스로 왕이 되지 않겠다는 영웅이라는 지극히 합리적 발상에서 시작하는 모험이, 전체주의적 악몽으로 끝나는 이야기다. 데뷔작이었던 <솔잎>에서 다루었던 개인과 사회의 충돌, 그것을 통해서 처음에는 개인이 파멸하지만 결국 사회가 점차 바뀐다는 주제는, 이제는 살짝 비틀어진다. 개인에게 파멸적인 사회를 만들어내는 것 자체가 그 개인들 스스로였다는 자괴감이 밝고 명랑하게 펼쳐지는 것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거친 상징이 약간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리바이어던이 커다란 심해의 뱀으로 등장하는 얄팍한 장르모험물을 바랄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사람들이 인위적으로 계약에 의해서 형성시킨 절대적인 힘”이라는 토마스 홉스의 비유는, 그동안 더욱 치열한 고민들 통해서 주제의식과 여유를 성장시킨 작가의 작은 이야기로 재탄생한 것이다. 과장되었으나 간결한 컬러 그림체가 색다른 매력을 주는 작품.
택일의 기로에서: <선택>
한가지만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선택이란 필요없다. 하지만 세상의 여러 모습들을 보고, 그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정해야 한다면 그때가 바로 선택의 순간이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 선택의 순간이 보통 너무나 갑작스럽게 다가온다. 학교졸업과 함께 ‘사실 세상은 이런 저런 것이 있단다, 하지만 지금 당장 선택하지 않으면 낙오될꺼야’라고 강요받고, 복잡한 갈등과 생각들이 ‘승자와 패자’로 단순화된다. 그 속에서, 과연 ‘패자’를 선택할 무모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어디있을까. <선택>에서 주인공이 몽둥이를 들고 결국 내린 것은 그러한 선택이다. 그리고 2002년 월드컵, 그 환성의 밑에 묻혀있던 삶의 모습들을 이야기로 꾸며내는 것은 작가로서의 선택인 셈이다. <리바이어던>과 함께, 졸업작품집에 실린 작품. 마지막의 응원장면은, 선택을 내린 개인이 다수로 확장되는 이미지라고 한다.
…진정한 치열한 고민은 더욱 진행될 수록, 전체적 시각과 여유를 낳는다. 그리고 여유는 유머를 만들어준다. 최근의 단편작품들에서 보이는 현실적인 처절함과 블랙유머의 조화는 작가의 성장의 척도라고도 할 수 있다. 비록 아직 다소 고지식할 정도로 직선적인 연출 호흡이 성장의 여지를 남기고 있기는 하지만, 이제 갖 첫 단편집을 묶어내는 ‘신인’에게 이 정도의 기대를 가져보기는 오랜만인 듯 하다. ‘리얼리즘’이라는 흔한 용어로는 묶어내지 못하는, 비굴한 현실과 만화의 상상력을 자연스럽게 엮어내는 이야기꾼의 매력이다.
<만화, 내 사랑>이라는 책에서, 박재동은 오세영을 “쇠똥을 그릴 줄 아는 작가”라고 칭찬한 바 있다. 그렇다면 필자는 최규석을 “청테이프를 붙일 줄 아는 작가”로 칭송하고 싶다. 자연스럽게 처절하면서도 유머러스한 느낌, 투박하면서도 정직한 접착력으로 앞으로 수많은 독자들의 관심이 달라붙기 바란다.
김낙호 (만화연구가)
2004.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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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