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집의 말미에 실리는 평을 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꽤나 난감한 일이다. 주례사 비평의 위험성은 기본이며, 더욱이 단편집은 그 속에 포함된 개별 작품들이 천차만별인 경우가 보통이라서 하나의 책으로서 평가를 내리기가 힘들다. 그렇다고 해서 장황하게 작가론을 늘어놓아서 독자들의 즐거움을 반감시키기도 어색하니, 이를 어쩌면 좋단 말인가. 하지만 한 작가의 창작력이 가지고 있는 여러 가능성들과 그것의 진행방향을 엿보고자 하는 것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보통의 단편집은 음반으로 치자면 B-SIDE 모음 같이, 작가가 보다 큰 프로젝트를 진행시키는 와중의 틈새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즉각적인 시도들을 자유롭게 담고 있다. 즉 보다 직접적으로 날것 그대로의 사색과 그 발전과정의 흔적에 접속할 수 있는 접속점인 셈이다.
많은 비평적 찬사를 얻어냈던 <프린세스 안나> 이후의 변병준은 주로 도시를 그려내는 작가다. 단순히 도시를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를 펼쳐낸다는 것도, 도시하면 떠오르는 세련되고 쿨한 이미지를 만들어낸다는 것도 아니다. 도시라는 공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경험하는 상황들과 정서가 대부분의 작품을 지배하고 있다는 말이다. 만화의 본질을 ‘이야기하는 그림들’이라고 생각해볼 때, 변병준이 묘사하는 도시공간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듯 하다. 친숙한 모습의 도시는 그 현실적인 모습을 온전히 보존하면서도, 동시에 정서를 듬뿍 담은 정서적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때로는 지극히 쓸쓸하고 차가운 정서가, 때로는 그 속에서 피어나는 새로운 희망적인 무언가가 그 공간 속에서 암시되고 있다. 이미 공간이 이야기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속에서, 상처를 안고 살아가거나 그것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거나, 아니면 아무것도 없이 그냥 덤덤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물론 작가가 단편 위주의 작업을 주로 해왔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변병준의 만화의 주인공들은 현재진행형이 아닌, 과거의 반영이다. 공간배경과 하나가 된 그들의 생활 모습이 먼저 주어진 후, 이들의 과거 사연이 지나가듯 암시된다. 그 속에서는 극적인 사건이라 할지라도 새로운 결과를 낳기 보다는, 지금까지 지속되어온 무언가를 매듭짓는 방식으로 기능한다.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가득찬 밀도의 표현적 그림들로 인하여 독자들은 캐릭터로의 이입이라는 손쉬운 방법이 아니라, 작품 속 공간으로 던져지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입보다는 관찰을 유도해내는 그러한 화법 속에서 때로는 지나가는 농담처럼, 때로는 누군가의 사연을 두 다리 건너서 전해듣는 것처럼 드라마가 펼쳐진다.
본 단편집 <미정>에 묶인 것은, 작가가 화풍의 다변화를 시도한 2000년대 초반의 일련의 단편들이다. 첫 단편집 <첫사랑>이 성인취향 개그물과 도시의 차가움, 농촌의 따스함라는 여러 관심사들의 모음이었다면, 이번 단편집은 도시공간이라는 하나의 큰 컨셉 아래에서 다양한 화법을 시도해보고자 한 것이다. 이야기들의 큰 줄기는 무언가를 찾지못하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남자의 이야기, 상처입은 소년소녀의 이야기 등 두 가지인데, 그 중 전자는 작가의 정서적, 또는 생활의 자화상을 녹여낸 흔적이 짙게 베어있어서 더욱 매력적이다.
본 단편집의 첫문을 여는 것은 단편집의 제목이기도 한 <미정>이다. 도시의 차가움과 그 속에서 무언가를 찾아나서려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를 담담하게 다룬 영화 <베를린 천사의 시>의 모티브를, 만화에서 비슷한 방향을 추구하는 변병준 식으로 활용한 작품이다. 자화상적 서정과 상처입은 도시남녀라는 두 축 모두의 출발점인 셈이다. 2003년 봄 <계간만화>에 실린 작품으로서, 당해 1월에 프랑스 앙굴렘 만화축제의 전시작가로 현지를 방문하고 있었을때마저도 원고를 작성한 일화 역시 재미있다. 두 번째 작품은 <연두 17세>로, <프린세스 안나>에서 시작한 상처입은 소녀 모티브를 다루는 방식이 이제 완전히 하나의 경지에 도달했음을 주장하고 있는, 일본에서의 출판을 위하여 2003년 여름에 작성된 작품이다. 보다 간결하고 능숙하게 도시군상의 비극적 감상을 정리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마무리된다. 그 뒤를 이어서 등장하는 것은 한국 소년만화계의 스토리 작가로서 스타급 위치를 누리고 있는 윤인완과 협업한 <유틸리티>다. 기대만큼의 흥미로운 스토리가 탄생하지는 못했지만, 위악적인 어린이들의 표정과 이들이 살아가는 살풍경한 도시공간의 이미지에서 생겨나는 블랙코미디는 또다른 발전 가능성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2002년 4월, 일본의 <빅코믹스피리츠> 증간호에 개제되었다. 흐릿한 모노톤의 컬러작업을 시도한 <너의 노래>는 2003년 가을,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작품이다. 한층 친절해진 캐릭터들과 더욱 진일보한 공간묘사가 장점이다. <신일맨션201호>는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 개그물인데, 그 쪽 분야의 실력 역시 녹슬지 않았음을 다시 증명해주고 있다. 2000년 봄, 작가의 일본 유학시절에 그려진 작품으로, 생활의 자화상이 작가적 망상과 겹치면서 발생하는 유쾌한 코미디다. <빅코믹스피리츠> 2001년 12월호에 개제되었으며, 소학관 코믹스피리츠상에 입선했다. 이 정서는 2001년 가을에 그린 차기작인 <할아버지 힘내세요>의 고양이 개그로 고스란히 이어졌는데, 여기서는 망상 대신에 미소녀 여선생이 등장해서 작품을 끌고나가는 멜로드라마적 요소를 활용했다.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은 <내 남자친구의 이야기>로, 양승천이 글을 맡았다. 담담한 표정으로 썰렁한 농담을 전달하는 짧은 이야기로, 의인화된 캐릭터들의 상황묘사를 통해서 독자를 농담 속으로 집어넣는 손쉬운 방법이 아닌, 전화통화로서의 전달을 같이 듣도록 하는 식으로 전개되고 있다. 이것은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것을 주고받는 남녀의 관계, 그 감수성에 주목하도록 하고 있는데, 덕분에 여전히 이야기의 주인공은 골방의 만화가, 즉 작가의 페르소나인 것이다. 이로써 처음의 상상화된 자화상과 마지막의 현실적인 자화상이 수미쌍관을 이루며 본 단편집의 여러 이야기들을 감싸안는다.
본 단편집은 변병준이라는 작가의 성장 과정을 고스란히 보는 것인 만큼, 아직도 극복 과정 중에 있는 단점들 역시 드러나고 있다. 이야기의 극적 재미 부족이나, <프린세스 안나> 이래로 이어지고 있는 유사한 이미지의 칸간 연출 반복 등은 아직 풀어야할 숙제인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변병준식 개성으로 끌어내고, 더욱 깊은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모습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2000년대 초반, 변병준이라는 작가가 선보일 수 있는 다양한 이야기의 성찬인 것이다. 그리고 도시적인 섬세한 감성과 상처입은 소년소녀, 그리고 따뜻한 유머와 당혹스러운 상황의 블랙코미디 등 이 모든 트레이드마크격인 요소들이 하나의 작품으로 녹아들어간 변병준식 걸작의 탄생이, 앞으로 그리 멀지 않았음을 직감한다.
몇 년전, 한 지인이 변병준을 ‘박흥용의 적자’라고 일컫은 적 있다. <첫사랑>과 <프린세스 안나>에서 그가 보여준 도시풍경과 그 속에 녹아들어간 인간군상들이, 80년대 박흥용이 발표했던 작가주의 성향 단편들의 모습과 오버랩되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우연히도, 당시 박흥용 단편집의 제목은 <백지>였고, 이번 변병준 단편집의 제목은 <미정>이다. 새로운 출발을 하고자 하는 작가의 다짐으로서 공란을 만들어놓은 것일 수도 있으며, 동시에 동경의 대상이 되는 어떤 여성의 이름일 수도 있도록 고안된 제목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 작품은 이 가운데 어떤 가능성을 발전시킬 것인지, 즉 다음 책의 제목은 무엇이 될 것인지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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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낙호
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200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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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출판된 책 속에 들어간 작품평입니다. 당연히 찬란한 주례사… 그러려니 감안하고 읽으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