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적 부조리 개그 – 『파레포리』 [기획회의 238호]

!@#… 요점은, 이건 좀 과격하지만 개그만화라는 것. 그러니 안심하고 지르시길… 아니 안심할 만한 건 아니지만.

 

예술적 부조리 개그 – 『파레포리』

김낙호(만화연구가)

여느 표현 양식과 마찬가지로, 만화 역시 가장 대중적인 기법들의 반대편 스펙트럼에는 전위의 영역이 있다. 예술적 파격으로 특징지을 수 있는 그쪽 영역의 경우 일반 대중들이 바라는 적당한 익숙함과 약간의 새로움이라는 황금공식을 구태여 신경 쓰지 않는 덕분에 보통 그들만의 리그에서 호평이든 혹평이든 평가받곤 한다. 하지만 어쩌다가 한번씩, 전위의 첨단에 서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다양한 재미의 층위를 배치해줌으로써 더욱 더 효과적으로 자신이 지닌 파격의 에너지에 감상자들을 흡수하는 작품들이 있다. 예를 들어 끝도 없는 다양한 전위적 실험을 하면서도 내면에는 흡입력 있는 이야기를 펼친다든지, 혹은 그저 순수하게 어떤 ‘정서’에 집중해서 공감을 유도한다든지 말이다. 사실 후자의 경우는 굳이 독자들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작가 자신의 자의식이 그쪽인 경우도 있겠지만.

『파레포리』(후루야 우사마루 / 오주원 역 / 세미콜론)는 만화양식에 대한 전위적 실험을 개그라는 수단 속에 풀어내는 작품이다. 만화에 전위적 양식미를 실험하고 부조리한 개그 감수성을 담아내는 것은 미국의 크리스 웨어 같은 작가들 역시 하고 있는 방식이지만, 이 작품의 경우 미술 회화기법들을 만화 양식에 적극적으로 결합하고 만화 자체의 칸 연출 문법을 가지고 노는 분방함이 특징이다. 일본 대안만화의 정통 산실이었던 잡지 『가로』에 94년 연재되었던 4칸 만화 시리즈의 모음으로, 연재지면 특성상 시각적으로나 내용적으로나 과격한 표현이 많은 편이기도 하다. 특정한 하나의 구심점을 가지고 흘러가는 내용의 단일한 작품이라기보다는, 4칸이라는 형식과 전위적 표현과 개그의 정서라는 느슨한 공통점을 공유한 다양한 작품들의 모음이다. 물론 그 속에도 몇 가지 반복되는 등장인물이나 상황으로 묶여지는 시리즈가 있어서 작품이 너무 흩어져 보이지는 않게 해주고 있다. 여러 연작 가운데 단연 백미는, 만화가 자신이 그 작품의 원고를 그리고 있을 때 한 혼령이 나타나서 방해하고 도망가는 이야기다. 혼령은 원고지 종이를 구긴다든지, 손도장을 찍고 간다든지, 불을 붙인다든지 하며 원고를 방해하는데, 그런 방해한 내역이 그대로 완성된 작품 자체에 반영되어 있다. 장난스러운 개그이면서 동시에 작품 속 세계와 작품을 만드는 과정의 현실세계의 경계선을 살짝 지워내는 묘한 느낌을 만들어주는 실험이다. 또는 『파레포리』라는 작품에서 가장 자주 인용을 당하곤 하는 그림 속 그림 연작도 돋보인다. 예를 들어 멀리서 보면 평범한 도라에몽 만화 같지만 자세히 보면 남녀가 섹스를 나누는 장면이 있는데, 도라에몽 만화로서 읽혔던 대사와 상황을 그 속의 상황에 대입하면 절묘하게 다른 의미가 만들어지는 식이다. 그 외에도 특정 종류 쓰레기 수거일 시리즈라든지, 문구멍으로 본 길거리 상황 시리즈 등 여러 흥미로운 연작이 포함되어 있다.

책에 포함된 작품들은 몇 점 포함된 한 칸 카툰을 제외하고는 모두 4칸 만화이기는 하지만, 일반적인 가로 혹은 세로 스트립 방식이 아니라 각각 두 칸이 담긴 두 단으로 페이지를 가득 채우는 방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덕분에 칸의 형태와 페이지의 모습을 유기적으로 연결지을 수 있으며, 내용면에서도 시작과 끝이 서로 엮여있는 듯 순환적 느낌도 부여받는다. 그 안에서 칸 간 경계를 캐릭터들이 파괴하고 뛰어넘는다든지, 칸 속에 다시 페이지를 넣어서 똑같은 구도를 만든다든지 하기도 한다. 그림체 역시 점묘법, 입체파 추상화, 르네상스 회화 같은 회화기법 응용부터 다양한 일본 고전만화가들의 필체에 대한 패러디까지 다양하게 변한다. 그리고 각각의 기법에 대한 작가의 장악력은 대단한 것이어서, 마치 재능있는 가수의 22인 성대모사 장기자랑 무대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언제 어떤 기법을 쓰는 것이 가장 임팩트가 클지에 대한 계산 역시 면밀해서, 독자의 뒤통수를 내려치는 순수한 시각적 충격이 즐겁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그 속에 정작 담아내는 것은 설익은 심오한 철학적 고민 같은 것이 아니라, 개그다. 그것도 말이 되지 않는 이질적 상황의 당혹스러움에서 오는 가장 부조리한 방식의 개그 말이다. 그런 부조리 개그를 위해서 작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데, 도덕의 경계선 같은 것 역시 저 멀리로 보낸지 오래다. 연쇄살인이나 소아 강간 같은 각종 기괴하고 엽기적인 범죄 설정도 거리낌 없이 유희의 소재로 삼아버린다. 그런 것을 다룰 때 상상하기 쉬운 사회비판, 풍자적 유머라기보다 문자 그대로 부조리함을 극대화하기 위한 소재로 삼을 뿐이다. 일상적 기대를 황당한 방식으로 깨버리는 일탈이 만들어내는 부조리에서 작가는 모든 것을 개그로 귀결시킨다. 그것도 유머로 모든 것을 정당화하려는 것이라기보다, 종종 폭력적이고 말이 안되는 모든 상황 속에서 그래도 웃음이 나오는 궁극의 부조리를 만들기 위한 장치로 보일 정도다. 이 정도로 어두운 유머감각은 이전과 이후 만화계는 물론 심지어 같은 작가의 후속작에서도 한번도 다시 선보인 적 없을 정도로 독특한 느낌을 준다. 그리고 그런 전무후무한 개그정서는 일반 독자들도 어떻게든 그 마력으로 끌어들이는 입질이 되어준다. 이 정도의 완성도 높은 전위성, 일탈적 정서, 그리고 개그를 통한 나름의 접근성이라면 왜 일본 만화계에서 작가의 이 데뷔작을 보며 천재로 칭송했는지, 왜 현재 마이너하기 그지없는 일본 대안만화에서도 십 수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대표작으로 꼽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파레포리』를 일부에서 칭하듯 전설의 걸작이라고 하기에는 과장이 끼어있다. 기본적으로 내용적 고민을 사실상 배제하고 형식적 전위의 실험에 집중하고 있는 만큼 일정 정도 이상의 지속적 울림을 주기에는 무리가 있고, 그 분야에 확실한 영향을 줄 만큼 어떤 ‘규칙’을 만들어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천재성이 엿보이는 데뷔작이라는 범주에 넣을 때 오는 명암, 즉 수많은 가능성이 엿보이지만 반대로 그만큼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비약과 과잉이 많다는 것이 이 작품에 그대로 해당된다. 하지만 작품 자체의 파격적 에너지는 여전히 대단하며, 어떤 과격한 표현을 일삼더라도 결국 유머로 귀결시키는 철저한 집착은 그 자체로 흡입력이 있다(유머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과격함만 추구할 때 어디까지 ‘막나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가든』같은 국내 미발매 작품집이 있기는 하다). 게다가 이번에 출간된 한국어판은 충실한 번역은 물론 낙서체 손글씨를 그대로 재현한다든지 각 패러디에 대한 세부 주석을 달아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작품의 매력을 최대한 살려주고 있다.

연말에 훈훈하게 연인과 가족들이 서로 선물해줄 보편적 따스한 취향의 작품과는 거리가 멀지만, 만약 자신이 극단적 개그를 즐길 수 있을 정도의 취향 숙련도가 갖춰져 있다면 개그를 매개로 부조리함과 전위적 시각실험의 향연으로 빠져들어 볼 이런 좋은 기회를 그냥 보내는 것이 아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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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파레포리
후루야 우사마루 지음, 오주원 옮김/세미콜론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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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자축모드: ‘기획회의’ 만화도서 리뷰 100번째 원고. 2004년 9월부터 붙박이로 여기까지 왔음. 대중문화서적 거품이 좀 상당하던 90년대 중반이라면 대충 묶어서라도 단행본이라도 냈겠지만, 뭐 인생이란 타이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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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oughts on “예술적 부조리 개그 – 『파레포리』 [기획회의 238호]

Trackbacks/Pings

  1. Pingback by 세미콜론 공식 블로그

    ‘파레포리’ 역자후기…

    아래는 대산초어님이 블로그에 포스팅하신 파레포리의 역자 후기 전문입니다. 원 포스트 URL : http://bjkun.egloos.com/4454358 ‘파레포리’의 초판 발행일이 2008년 12월이니 거의 만 2년이 다 되어가는 판국에 역자후기는 심하게 늦은 감이 있지만 삼류 만화역자로서 나름 첫 번역작이기도 해서 이렇게 후기를 적어보기로 했다. 시간…

Comments


  1. 인터넷에 올라온 예수VS사슴벌레나 신은 곁에 계신다 정도만 인터넷에서 흘끗 보고 보통 작품이 아니라는건 눈치챘지만.. 이 리뷰를 보니 정말 지름욕구 스위치 ON.
    문제는 전 아직 민증조차…[…]

  2. 캡콜드님….품앗이 블로그 프로젝트는 포기해야 겠습니다..

    우선 제가 본문 행간을 띄엄띄엄 읽고 댓글 다는 습관이 없어서 본문을 다 읽고 소감을 적어보려 했는데..

    머리가 하얘지네요….OTL

    뭐 아는건 둘째치고 작품을 읽어봐야 대화가 되겠구나 싶습니다…ㅜㅜ

    아…그래도 나름 전문주제 포스트를 다루는 블로그에는 취향이 있건 없건 감상을 전해보려했는데……처음부터 좌절입니다..

    캡콜드님 포스트가 첫 시작이라 더더욱 좌절감을 느끼는지도….ㅡ.ㅡ;;;;

  3. !@#… 언럭키즈님/ 아아… 뭐, 어떻게든 성인 하나 낑궈서 구하실 수 있는 방법이 있겠죠.

    LieBe님/ 음, 그럴 때는 살포시 아래 달린 알라딘 링크를 눌러주세요 :-) 아직 이쪽 분야는 음악만큼 맛보기 문화가 활발하게 발달하지는 않지만, ‘미리보기’를 하시면 한 2-30페이지 분량을 맛보기하실 수 있죠. 그리고 좌절감이 느껴지실때는 역지사지의 마음으로, 제가 LieBe님 블로그에서 트랜스 음악 포스팅을 읽을 때 느낄 좌절50% + 뽐뿌50%의 감정을 생각해보시길. (핫핫)

  4. 처음에는 좀 당혹(?)스러운데 보면 볼수록 왠지 프흐흐 하게 되지요~
    컴퓨터 주위에 책을 두면 인터넷이 대땅 느려지거나 포토샵 작업중에 컴이 더 월드를 당했을 때 짬짬히 보게 됨으로 인한 호감도 상승효과의 산 증거.
    경찰서 미술관, 퇴짜요괴, 곰돌이, 그 밖에 전염병X 시리즈가 개인적으로 나이스.
    참,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연하장 슥 http://sibauchi.namoweb.net/tx.gif

  5. 저..저..작가는!
    ‘최강 여고생 마이’를 그렸던…-ㅁ-ㅋㅋ

    아, 추억이 새록새록.
    고딩때 그거 보다 얻어터졌던…기억이..ㅡㅡ;

  6. !@#… 여울바람님/ 에에… 그걸 보다가 얻어터지는 환경이라면, 이건 보다가 교무회의 소집할 레벨이죠. (핫핫)

    시바우치님/ 사실은 그 책 때.문.에. 컴퓨터가 느려진…;;;

    dcdc님/ ㅜㅜ 감사합니다!

  7. !@#… 대산초어님/ 게다가 책으로 내면 인세가 들어오는데 말이죠 (핫핫) 여튼 100회를 파레포리로 장식한 것도 뭔가 묘한 우연이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