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물과 사상> 12월호에 실린 원고. 제목, 소제목 등은 실제 게재된 버젼에 준함… 중앙, 조선을 다루었으니 아마 다음번에는 동아…도 다루어야 균형이 맞을 듯(사실 이미 ‘나대로 선생’으로 쓰려고 벼르고 있는 중이다). 그 뒤에는 그 반대쪽 선수들도 공략하고. 여기에 쓰는 글들은 언론과 만화의 접점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싶은데, 지면의 성향이 ‘인물’ 중심 접근을 강조하고 있다 보니 아무래도 신문시사만화 이야기로 흐르고 있다;;;
!@#… 계속 그래왔듯이, 이 내용은 <미디어 오늘> 온라인판에도 공유. 그런데 글 중간에 숏트랙 만평 건에서, 첫번째와 두번째 만평이 바뀐 순서가 논란의 여지가(capcold가 본문에서 근거로 삼았던 오마이뉴스 고태진 시민기자의 증언으로는 지방판에서 먼저 온 것이 ‘부시 방한’ 내용으로 왔다고 하는데, 미디어오늘에서 서울에서 초판을 받았던 것에는 ‘신규칙’ 내용이었다고 한다; 게다가 순서를 실제 조선일보측에 문의해보니, 노코멘트로 일관) 있다고 하여 그 문단을 일부 수정. 별로 중심적이지도 않은 부분에서 논란을 남겨서 글 전체의 요지가 흐려지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아서…;; 뭐, 신문에서 판본 바뀌면서 내용 업데이트 되는 것 같은 이치라고 생각해주시면 고맙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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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고 편안하게 길들이기: 신경무와 조선일보 만화들의 마력
김낙호(만화연구가)
조선의 왕이 되십시오
“조선의 왕이 되십시오”라는 광고가 최근 서울 시내 곳곳을 누비고 다닌다. 실제로 사람들을 한순간이나마 ‘왕노릇’을 하게 해주는 무슨 온라인 게임 광고인줄 알었더니, 자세히 보니 조선일보 광고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독자를 왕처럼 모신다는, 독자가 주인행세를 할 수 있는 신문이 되겠다는 나름대로의 이미지 선포인 것이다.
실제로 그럴지에 대한 강한 회의는 논외로 하자면, 사실 조선일보가 자신의 독자들을 참으로 흐뭇하게 해주는 신문이라는 것은 상당부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일보는 확실히, 독자들에게 대한 서비스가 뛰어나다. 비단, 자전거를 끼워주기 뿐만은 아니다. 지면이 두툼해서 국받침으로 깔기에 안성맞춤이라서도 아니다. “하지만 이건 사실이 아닌데” 라든지, “이렇게 하면 결국 다른 곳의 누군가가 피해를 볼텐데” 라는 불편한 질문만 안하면서 읽자면, 이토록 완성도 높고 흡족스러운 재미와 구성의 신문이 국내에 또 있을까.
따라서, 독자와 가장 친근하게 만날 수 있는 표현방식인 ‘만화’에 있어서도 조선일보는 적극적이다. 최초의 일간 신문 연재만화 <멍텅구리>의 산실로 첫 테이프를 끊은 그들은, 전통적인 1칸만평과 4칸 시사만화와 더불어 90년대 후반에 ‘에세이툰’의 붐을 촉발시킨 <광수생각>까지 다양한 영역의 신문만화를 한껏 활용해왔다. 그리고 인터넷을 통한 신문읽기가 보편화된 지금은 ‘디지털 조선’의 만화 섹션을 통해서 가장 활발하게 자체 연재물들을 운영하고 있다.
그렇다면 슬슬 중요한 질문을 해봐야 할 지점이다. 조선일보의 만화는 어떻게 독자들을 매료시키는가? 나아가, 다양한 만화들은 조선일보라는 전체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비단 조선일보라는 특정 언론의 음험한 전략을 비판하겠다느니 하는 단선적 차원의 딴지가 아니라, 만화라는 표현방식을 십분 활용한 효과적인 커뮤니케이션의 사례를 살펴보고, 그 이면에서 생길 수 있는 문제들을 예방하면서 비판적 읽기를 시도할 수 있는 약간의 기반을 마련해보고자 하는 문제제기다.
조선일보의 진짜 사설은 A2면에 있다
신문의 기사가 객관적인 ‘팩트’만을 다루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명백한 거짓말이겠지만(도대체 이 복잡한 세상에서 객관은 뭐고, ‘사실’은 어떻게 규정한단 말인가!), 적어도 그것을 추구해야 한다는 당위론만큼은 아직도 꽤 설득력을 가지고 살아남아 있다. 신문 기사는 공정해야 되고, 사실을 다루어야 하고… 이런 제약에서 그나마 벗어나 있는 것이 바로 ‘사설’이지만 그것에도 역시 나름대로의 품위와 공정성이 요구되고 있다. 그렇기에 자기 생각대로 그냥 있는 그대로 쏟아 뱉어내고 싶은 신문쟁이들의 욕구불만의 배출구 역할을 맡아온 것이 바로 시사만평이다. 논리적으로 앞뒤 잴 필요도 없이, 고상하게 포장할 필요 없이 그 신문이 결국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던져주는, 신문이라는 지면에서 가장 날 것 그대로인 곳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 문화일보에서 일어났던 ‘만평 퇴짜 사건’은 기분은 나쁠 수는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그리 엄청난 일이 아닌 것이, 원래 만평은 자체적으로 하나의 작품인 것이 아니라 해당 신문의 일부로서 기능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평이 만약 신문과 논조가 맞지 않으면, 다른 기사들과 합쳐져서 하나의 지면으로 통합되어 편집될 이유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문과 만평의 논조가 절대 서로 어긋나는 일이 없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신경무의 <조선만평>이다.
조선만평의 신경무는 중앙일보의 김상택이나 그만 둔 후에도 여전히 그 이미지가 약해지지 않은 한겨레의 박재동 등의 동업자들에 비하면 작가로서의 인지도가 크게 떨어진다. 신경무 만화가 아닌, 그냥 조선일보 만평인 것이다. 항상 개별적인 작품의 임팩트보다는 조선일보라는 후광이 더 컸기 때문인데, 이러한 ‘과소평가’가 일거에 깨졌던 시기가 있었다. 바로 속칭 ‘김동성 태극기 파문’인데, 2002년 동계올림픽 숏트랙 경기에서 김동성 선수가 결정적인 반칙을 당하고도 심판의 석연찮은 오심에 의하여 미국선수 오노에게 메달을 빼앗겼던 사건이었다. 이 경기를 지켜보던 수많은 한국인들이 얼이 빠졌음은 물론이고, 1위로 먼저 들어와서 승리를 확신하고 태극기를 흔들며 라운드를 돌던 김동성 선수는 엉뚱한 선수로 우승자 발표가 나오자 허무한 표정을 지으며 손에 쥔 태극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그리고 그날 인터넷에 사전 공개된 조선만평은 신경무라는 작가 개인을 뜨거운 관심의 대상으로 부각시켜주기 충분했다.
만평의 내용은 ‘반칙왕’이라는 별명으로 비난받고 있던 오노와, ‘미국이라는 강대국 앞에서 억울하게 승리를 도난당한 우리 민족의 상징이자 피해자’ 취급을 받고 있던 김동성을 동일 선상에 놓고, 오히려 후자에 더 큰 비난을 하는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다. 당연히 곧바로 온라인상에서 엄청난 비난여론이 뒤따랐고, 결국 가정 배달판에서는 슬그머니 다른 내용의 만평으로 교체되기 이른다.
(조선만평, 2002년 2월 22일자 좌: 인터넷판, 우: 배달판)
심지어 그 두 가지 말고도, 만평이 하나 더 있었다. 방한중인 부시 미국 대통령이 숏트랙 반칙승 건으로 고조된 반미감정에 두려움을 느끼고 출국을 서두른다는 내용이었다.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고태진 씨의 증언에 따르면 ‘태극기 집어던지기’ 만평보다도 이전에 실렸던 것이라고 하는데, 어떤 것이 먼저 등장했든지 간에 신문의 논지와 여론의 압박에 따라서 급박하게 상황이 돌아갔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애초에 그런 물의를 빚을 여지가 넘쳐나는 만평을 실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해답은 그날의 정규 사설란에 그대로 나와 있다:
“우리 역시 네티즌들의 분노를 십분 이해하지만 심한 욕설이나 ‘반미(反美)’는 자제해야 할 것이다. 금메달을 눈앞에서 놓친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내던진 것은 흥분상태라 해도 신중치 못한 행동이었다. 단장이나 코치는 선수들의 기량 못지않게 반듯한 매너를 가르쳐야 할 것이다.”
이정도면 당시 신문사의 내부 사정을 직접 목격한 것은 아니라도, “사설에 만평을 맞췄다”고 추론을 내려도 어색하지 않을 듯하다. 단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일치한다, 전체적인 의제설정이 비슷하다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설코너와 내용일치를 시켜버리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키지 못한다’고 비난할 일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그 신문 소속의 시사만화가로서 가장 적합하게 활동하고 있다고 인정을 할 일인 것이다. 다만 그 신문이 하필이면 조선일보이고, 조선일보가 하필이면 ‘그런’ 신문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이겠지만 말이다.
쉽다는 것은 무기다
신경무의 조선만평은 무엇보다도 메시지 자체가 단순명쾌하다. 가부장 질서 만세, 기득권층 좀 때리지마, 배타적 민족주의, 빨갱이 싫어, 미국은 우리의 영원한 큰형님, 노무현 미워 정도의 틀을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메시지의 전달에 실패하지 않는다. 우리가 모르던 소외된 차별에 관해서 새로 문제제기를 던져주는 일은 물론 결코 없으며, 당연하다고 받아들여지는 권력관계를 뒤집어보아서 스스로를 뒤돌아보게 만드는 성찰은 관심 밖이다. 즉 우리가 이미 익숙하게 알고 있고, 상당수 독자들이 (유감스럽게도) 이미 ‘미덕’으로 철썩 같이 믿고 있는 일련의 수구적인 가치들을 끊임 없이 다시 확인시켜주는 것이다. 게다가 단지 익숙해서 뿐만 아니라, ‘왜’라는 질문을 안하기 때문에 더욱 더 쉽다. 이유라는 것을 묻기 시작하면 많은 생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납치살해당한 불운한 사건은 미국과 한국의 관계, 한국 정부의 국민에 대한 자세, 우리 국민의 이라크침공을 바라보는 이중적인 잣대 등 수많은 머리 아픈 이유와 미묘한 변인들이 섞여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날의 조선만평은 매우 이해하기 쉬웠다.
(2004년 6월 21일)
도대체 건드리면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어차피 이미 침략군인 미군의 동맹군 자격으로 세계 3위의 대규모로 군대를 파병하면서 말이다. 명분 없는 전쟁에 비굴하게 개입하고 있고, 그나마 실익도 하나 못챙기고 있다는 뼈아픈 배경은 없다. 그리고 즉각적인 분노만이 강조되는 만평이다. 하지만 그만큼 이해하기 쉽고, 수많은 사람들은 어차피 이 사태에 대해서 딱 이정도만 생각하고 느끼고 있었기에 그들을 독자로 하여 막강한 호소력을 행사했을 것이다.
신경무 조선만평의 ‘쉬움’은 단지 메시지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그의 그림체 역시 지극히 간명하고 깔끔한 세상을 그려내고 있다. 잔선이나 떨림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보다는, 명확한 도형으로 사람들이 그려진다. 비유적 표현 역시 엉뚱한 상황에서 유사점을 찾는 기지를 발휘하거나 시각 연출의 모험을 하기보다는, 평범하게 접할 수 있는 현대적인 일상 장면에 ‘자막’을 넣어주는 선에 그친다. 덕분에 조선만평을 보고 호 불호를 따질 수는 있지만, 결코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간다거나 주장하는 바가 명확하지 않다는 평가를 받는 경우는 드물다. 기발하거나 천재적이지는 않지만 시사만화로서 목표달성에는 충실한 만화인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조선만평의 메시지의 강도가 약하다거나, 특정한 의제설정에 있어서 게으르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최근 몇 달간 조선만평에서 집요하게 추구하고 있는 전략 가운데 하나가 바로 ‘깍두기 조폭 대통령 노무현’이다. 원래 ‘깍두기 대통령’ 이야기는 2004년 5월, 탄핵 위헌 결정 후 노무현 대통령이 복귀하면서 머리를 짧게 깎고 온 것에 대해서 여당측 의원이 장난삼아 질문하면서 나온 용어였는데, 어느 틈에 조선만평의 노무현 이미지 전략으로 자리 잡았다. 6월 16일자의 만평은 심각한(하지만 많은 조선일보 독자들은 그냥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던) 여성비하로 물의를 일으킨 작품인데, 여기서부터 본격적으로 조폭 대통령의 신화(?)가 시작된다. 새 헤어스타일을 선보인지 한 달여가 지난 시점부터 부드러운 네모형에서 점차 뾰족머리로 바뀌더니, 결국은 아예 깍두기라기보다는 날라리 보스에 가까운 역삼각형으로 굳어버렸다. 비유법 역시 조폭 보스, 그리고 여당은 보스에게 충성을 다하는 조직원들의 모습으로 계속 그려지고 있다. 현실속의 열린우리당이 내부 의견통일이 좀처럼 안되고 있어서 언론이 대통령의 리더십 부재를 항상 거론하는 마당이기에 이런 비유는 더욱 아이러니컬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이미지를 집요하게 밀어붙이는 것이고, 마치 최면을 할 때 천천히 쉬운 문장으로 또박또박 암시를 걸어주듯이 이 경우 쉽다는 것은 큰 무기가 된다.
(04.6.3), (04.6.16), (04.6.30)
위험한 전제를 기정사실화하기
그런데, 앞서 이야기한 대부분의 덕목들이 결국 조선일보라는 신문이 가지고 있는 이미지와 일치한다. 쉽다, 명쾌하다, 문제의식을 던져주지 않고 수구적 가치로 구멍을 메운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독자들을 충분히 만족시킨다… 등이다.
그러나, 과거청산 문제나 수구적 이념도 있기는 하지만, 조선일보가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고 여겨지는 진짜 이유는 언론권력의 남용에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선별과 의도적인 정보착오에 의한 사실 왜곡 말이다. 그리고 만평이 그 신문의 ‘진심’이라고 시작부분에서 이야기한 바 대로, 신경무의 만화는 그 논리를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앞서 예로 들어본 ‘숏트랙 오심’ 만평을 보자.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집어 던진 것이 잘 한 짓이 아니다, 라는 쪽으로 논리를 끌고 가면서, 그것이 민족주의적인 미덕을 거스름에 있어서는 의도적 오심으로 미국 선수에게 금메달을 준 심판이나 다를 바 없다고 비하한다. 이 경우 즉각적으로 생각할 때 문제는 김동성의 행동과 심판의 행동이 같은 선상에서 비교될 수 있는가 없는가로 신경이 쏠리기 마련이고, 그것에 대해서 찬반이 엇갈린다.
하지만 문제는, 애초에 김동성 선수가 태극기를 집어던진 것이 사실인가, 하는 것이다. 즉 위의 논란은 태극기를 집어던졌다는 가정을 하나의 사실로서 전제할 때 비로소 성립되는 것인데, 이 만평 – 그리고 당일 조선일보의 사설에서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다. 실제로 비디오 화면을 보면 놓친 것에 가깝고 곧바로 다시 줍기까지 했는데, 논점을 보다 ‘위쪽’으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사실관계는 교묘하게 은폐되어 버렸다.
(2004. 11.5)
2004년 11월 5일자를 보면 이러한 경향은 더욱 극명해진다. 주제는 아라파트의 건강악화를 보고 ‘나도 약해진다면 운명이 어찌될지 뜨끔한 김정일’ 정도라고 할 수 있지만, 그 표현을 전달하기 위해서 몇 가지 위험한 전제를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바로, 아라파트가 김정일과 비견될만한 악덕 독재자라는 것이다(게다가 문병 올만큼 친하기까지!). 아라파트의 공과에 대해서는 이리저리 논란이 있지만, 적어도 한평생 진심으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에 몸바친 지도자치고는 동쪽의 소국에서 너무 홀대 받아버린 셈이다.
(2004.10.17)
10월 17일자 역시 좋은 사례다. 김희선 의원 부친 친일파 논쟁 문제인데, 애초에 김희선 의원 부친의 친일 부역 증거로서 중국 공안국 측에서 내놓았다는 문서는 조선일보의 자매지인 월간조선에서 입수한 것이고, 아직 신빙성이 결여되어 있어서 모든 언론에서 담담히 추이를 지켜보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 만평에서는 이미 그 문서의 신빙성은 기정사실이고, 단지 김희선 의원이 어떤 식으로든지 중국 측을 협박해서 막아낼지도 모른다는 것, 그것도 억지를 쓸 것이라는 비유적인 가상 상황을 표현한다. 게다가 ‘이번에도 또 억지를 쓸까’라는 발언은, 이미 지난 번에 월간조선에서 제기했으나 증거효력이 없어서 유야무야되었던 그 사건을 기정사실로서 끼워맞추자는 전략이다.
여기서 조선일보라는 신문에서 만평이 지니고 있는 독특한 권력을 엿볼 수 있다. 만약 이 정도 강도와 논지를 가진 사설이나 정규기사가 나갔더라면 아마 심각한 물의를 빚었을 것이다. 하지만 ‘풍자적 표현의 자유’라는 지극히 애매한 명제에 의거해서 어물쩍 넘어가버리고는 했다. 당연한 말이지만 만평에서 비유적인 표현을 쓰는 것, 사실을 과장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고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조선만평은 그것을 자신만의 방법으로 교묘하게 이용하고 있다. 지극히 알아듣기 쉬운 비유적 표현으로 인하여 사람들을 표현의 적합성에 대한 논의의 차원에 갇히게 만든 후, 그 와중에서 오히려 진짜 논란의 대상이 되어야할 사건 자체는 일종의 진실로서 심어 넣어버리는 것이다. 물론 조선일보 기사 전반에서 상당부분 감지되어온 경향이기도 하지만, 만평이기에 그 효과는 더욱 더 노골적으로 드러난다.
문화면, 정치성을 무균질로 포장하다
조선일보는 만화 중용은 시사만평에 그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97년 문화면에 <광수생각>이라는 컬러 에세이 만화를 도입함으로 대형 히트를 기록할 수 있었고, <빨간 자전거>로 유명세를 이어갈 수 있었다. 조선만평이 ‘진짜’ 사설로서 정치면을 지배하듯이, 이 작품들은 문화면을 지배했다. 심지어 조선일보를 싫어하는 이들이라 할지라도 “정치/경제면은 문제가 많지만, 문화면은 확실히 볼 만 하다”고 말할 때, 과감하게 새로운 방식으로 만화를 적극적으로 지면에 수용해낸 편집부의 선택에 대한 나름의 지지가 담긴 것이다. 하지만 문화면이라고 해서 만화에 대한 조선일보의 기본 전략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광수생각>이나 <빨간 자전거>가 조선만평 마냥 강력한 정치적 색채가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의 경우이기 때문이다.
환멸 나는 정치와 생각 없이 즐기는 문화의 이분법을 철저하게 지키는 것은 바로 조선일보의 방침이다. 그런데 생각 없이 즐기기 위해서는, 그것이 흔들리지 않는 전제가 될 필요가 있다. 만약 전제가 흔들린다면 – 예를 들어서 ‘문화도 정치적인 것이다’ 라든지, ‘문화를 통해서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 라든지 – 독자들은 불편해할 것이다. 독자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자꾸 생각을 하게 만드는 신문이라면 당연한 조치겠지만, 조선일보는 그 반대 지점에 있다.
물론 그 만화들은 종종 가부장적인 가족주의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그 때가 좋았지” 식의 향수 정서로 가득하며, 시끄럽게 권리를 찾아 나서기보다는 묵묵히 견디며 살면 복이 온다는 교훈을 주장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그것은 어차피 조선일보의 독자들, 즉 한국 현대사 60여년 가운데 3/2 이상을 차지하고 있던 극심한 세뇌과정의 직접적인 영향력이나 그 유산의 아래에 있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전혀 불편하지 않기 때문에 상관 없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면은 일종의 ‘무균질 공간’처럼 유지되고 있고, 그러한 상태를 적극적으로 북돋아주는 것이 독자들과 가장 먼저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수단, 바로 만화의 역할이다.
조선일보의 만화들
개별 만화의 입장에서 보자면 손익이 명확하다. 조선일보의 힘을 빌어 인지도가 마구 올라가는 것이 득이고, 철저하게 조선일보의 취향에 맞는 작품으로 제한해야 한다는 한계가 실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이미 알고 연재를 하고 있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수 밖에 없다. 혹은 애초에 작가와 작품의 성향이 조선일보와 원래 일치할 가능성도 물론 상당히 크다.
하지만 여하튼, 조선일보는 잘 만든 신문이다. 도덕적이라거나, 사회적으로 도움이 된다거나 하는 차원은 물론 결코 아니다. 신문으로서 일관성 있게 잘 구성이 되었고, 자신의 독자들을 제대로 돌볼 줄 안다는 것이다. 앞서 이야기했듯이, 만화의 활용에 있어서 그런 지점들이 특히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사설과 완전 일치하는 만평, 문화면의 무균질을 위한 감성만화, 그리고 무엇보다도 신문의 독서 경험에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주도적인 역할을 하도록 지위를 부여한 것 자체까지 말이다.
솔직히, 부러운 것은 부러운 것이다. 만약 좀 더 사회발전에 바람직한 방향의 논조와 언론윤리를 따르는 다른 언론에서도 이 정도의 기량을 발휘해주었더라면 정말 소원이 없을 성 싶다. “적에게서 배워라”라는 말을 이럴 때 적용하지 않으면 언제 적용해보겠는가.
—- 2004. Copyleft by capcold. 이동자유/동의없는개작불허/영리불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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