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리터리(군사) 매니아라는 사람들이 있다. 주로 젊은 남성층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은 탱크, 전투기, 총기, 제복 등 군대 및 전쟁과 관련된 아이템에 지대한 관심과 지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징지어진다. 살상용 병기와 전쟁이라는 극단적인 폭력상황에 대한 애정이라니, 혹시 잔학하고 반사회적인 인간들의 집단이 아닐까? 다행히도, 대부분의 경우는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뚜렷한 대결구도와 그 대결을 유리하게 이끌기 위해서 발달한 각종 기술과 전략들을, 하나의 취향이자 오락으로서 관심 있게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마치 평범한 사람들도 전쟁을 모티브로 만들어진 전략 놀이인 장기나 바둑이 즐거운 것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이들의 관심사를 잘 반영해주는 장르가 바로 ‘밀리터리물’, 즉 군사대결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교양필독서라고 항상 칭송받는 ‘삼국지’ 역시 큰 의미에서는 밀리터리물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보통 밀리터리물이라고 부르는 작품들은 1차 대전 이후의 현대전을 다룬다. 인데, 이 장르를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단지 전쟁 상황 속에서 벌어지는 각종 전략 대결 뿐만이 아니라 다양한 병기 아이템의 먹이사슬 관계를 세밀한 디테일로 풀어나가는 방식에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인기요소인 다양한 현대적인 병기가 일거에 발달해버린 시기는 바로 1차 대전 이후다. 전황을 일거에 뒤집어 놓을 수 있는 비밀의 신형탱크 등장, 그것에 맞서기 위한 또다른 특급 돌격 장갑차, 장갑차 위주의 전략에서 전황이 불리해지자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새로운 개념의 전투기의 도입… 이렇듯, 병기 아이템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래서 종종 밀리터리물은 사람보다 병기가 주인공이 되어버리는 사례도 비일비재하다. 따라서 더욱 더 매니아 위주로 흘러가고, ‘바깥’ 사람들이 보기에는 전혀 이해가 안가는 경지에 도달하기 쉽다.
최근 출간된 <강철의 대지 - 어나더 월드워2>(문효석/길찾기)는 이런 의미에서 밀리터리물의 기본 뼈대를 간직한 채, 아기자기한 대중적 요소들이 결합된 좋은 사례다. 작품의 제목이 시사해주듯 무대는 2차 세계대전인데(원래 밀리터리물의 최고 인기 배경이 바로 2차 대전이다; 인류의 전쟁 역사상 신병기와 그것을 운용하는 전략이 가장 급격하게 발달해 나아갔던 시기 아닌가), 페이지를 펼쳐보면 뭔가 다르다는 것을 곧바로 느낄 수 있다. 우락부락하고 험악한 군인들 대신, 군복을 입은 북실북실한 동물들이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그림체 자체도 파스텔톤의 부드러운 컬러로 되어있어서, 딱딱한 놋쇠의 질감보다는 프라모델로 만든 디오라마를 연상시키는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각종 탱크와 장갑차들이 난데없이 로봇으로 변신한다든지 하는 자유로운 시대착오가 이루어지고 있다. 나아가, 이들이 벌이는 소동 역시 처절한 살육과 파괴 보다는, 신형 탱크로 경주를 하는 등 어쩐지 ‘생각보다 건전한’ 경연장이 되어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철의 대지>가 밀리터리물로서 조금이라도 부실하다는 말은 아니다. 미국군, 독일군 등 기본 진영은 현실 그대로 남아있고, 전략 개념에 대한 접근이라든지 병기에 대한 세심한 설정 등은 결코 녹녹하지 않다. 하지만 반대로, 전쟁에 관한 작품이라면 흔히 쉽게 상상할 수 있는 중후장대한 무언가를 강요하는 것 역시 곤란하다. 의인화된 동물 주인공들의 이야기라고 해서 웰즈의 <동물농장> 같은 사회풍자극을 상상할 필요는 없다. 또는 전쟁 이야기라고 해서 헤밍웨이의 소설들 같은 드라마틱한 인생역정과도 그다지 큰 관련이 없다. 단지 다양한 상상력으로 가득한 병기 경연과 대결구도의 에피소드를 통해서 이 장르의 가장 원초적인 목적 – 전략과 병기에 관한 상상력을 통한 오락 – 을 더욱 근본적으로 추구하고 있는 셈이다. 경우에 따라서는 이런 것을 단점이라고 지적할 수도 없지는 않겠지만, 장점이라면 이것만큼 확실한 장점이 어디 있겠는가.
이렇듯 부담을 잔뜩 덜어내고 보다보면, 이 작품의 재미에 본격적으로 눈뜰 수 있다. 이 작품의 실질적인 주인공은 사람(그러니까, 동물)들이라기보다는, 변신 탱크 등 다양한 병기들이다. 이런 덩치 큰 주인공들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서 책의 판형 역시 큼지막하게 나와 주었으며, 긴 서사 모험담이 아닌 짦막한 에피소드 여러 개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마치 각종 캐릭터 소개를 따로 하듯이, 맨 뒤에는 병기들에 대한 설정자료가 빼곡하게 들어가 있다. 어떻게 이 탱크가 로봇으로 변신하고, 목적은 무엇이며, 언제 개발되어 활용되었는지 등등, 무한한 애정으로 뒤덮여있다. 그것은 어린 시절 수많은 소년들이 태권브이와 마징가의 대결을 꿈꾸었듯이, 그 과정에서 “사실은 팔꿈치 뒤에서 미사일이 나간단 말이야”라고 주장을 하고 그 억지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팔 속에 미사일이 장착되어 발사되는 과정을 그림으로 친구에게 설명해주는 그런 즐거움과 같다.
<강철의 대지>는 밀리터리물이 뭐가 그리 재미있다는 것인지 호기심이 들었지만, 딱딱한 군대의 이미지가 주는 거부감이라든지 지나치게 매니악한 세부설정을 강요받는다는 느낌 때문에 접근이 힘들었던 사람들이 입문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작품이다. 상상력으로 점철된 병기 대결구도가 주는 신기함과 시각적 쾌감은 그 자체로서 이미 훌륭한 오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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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 추신: 여담이지만, “진정한 병기 매니아는 전쟁을 반대한다!”라는 격언이 있다. 왜냐고? 전쟁이 일어나면 그 사랑스러운 병기들이 모두 부서지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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