되돌아보기, 만들어가기 [송채성만화상작품집 ‘성장기’]

!@#… 송채성만화상 당선작 모음집 출간. 책 속성상, 이번 글은 출간후 지연 기간을 따로 두지 않고 원고를 바로 여기에도 공개한다. 많은 이들에게 한번쯤 기억이 남게되기를. [BGM 클릭]

 

 

되돌아보기, 만들어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2002년 KT의 문화잡지 『싸이코믹Na』에 썼던 작가론 코너 원고를 다시 펼쳐봤다. 모 성인향 여성만화지 공모전에서 금상도 은상도 아닌 동상을 탄 후 데뷔하여 겨우 첫 장편을 내기 시작한 – 그렇다고 화제의 폭풍 신인 그런 경우도 아니었던 – 어떤 작가에 대해서, 작가론이라는 것의 의미까지 굳이 설명해가면서라도 글을 써내린 그런 기록이었다. 그렇듯 일찌감치 호들갑 떨며 기대를 걸기도 했고, 그 작가의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는 이후 작품들에 대해 좀 더 만족하기도 불만스러워하기도 하다가, 고작 2004년 봄에 더 이상 작품을 낼 수 없게 된 부득이하고도 번복 불가능한 조건의 발생에 아쉬워했다.

송채성의 만화는 따뜻하다. 적당히 착한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좀 등장한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이 담아내는 핵심이 거의 항상 ‘사람의 따뜻함’에 관한 것이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그럭저럭 비루한 상황에 놓여서 타인 혹은 자신의 상황에 대한 오해나 불만을 품었으나, 워낙 만성적이라서 그 자체가 하나의 일상이 되어버린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속마음에 여전히 따뜻한 무언가를 여전히 가지고 있고, 이야기는 어떤 어처구니없는 계기를 통해서든 그것이 잠시나마 서로에게 통하는 순간이 오도록 만들어준다. 남녀 간의 애정을 다룰 때도, 그보다 훨씬 더 많이 나타나는 ‘사람들 간의 관심’을 다룰 때도 그렇다. 찌든 상황의 궁상스러운 억울함, 그런 생활 속에 숨겨진 어떤 따뜻한 마음들, 일련의 엇갈림 속에 벌어지는 모험과 난장판, 그리고 어느 필연적인 우연의 순간에 교차하는 서로의 따뜻함, 그 결과 다시 일상이지만 조금은 더 나아진 일상. 이 구도는 그의 공모전 당선작 『전국노래자랑』의 모녀부터 『취중진담』의 숱한 술에 쩐 젊은이들을 거쳐 『미스터 레인보우』의 궁상스러운 게이 청년 덕구까지 조금씩 다른 형태로 반복된다. 이후 작품으로 갈수록 세상의 차가움과 처해있는 생활의 비루함은 갈수록 더 리얼해지면서도, 반대로 그 속에 숨어있는 인간의 따뜻함에 대한 낙관 역시 더욱 빛을 발했다. 송채성은 90년대 후반 이후 00년대 초 무렵, 뭇 유명 성인 순정만화들이 냉소와 비관을 스타일리쉬함으로 포장하며 허무한 자기한탄에 빠져있던 당시에 따뜻함으로 정면 승부하는 몇 안되는 작가였고, 그 중 단언컨대 가장 따뜻했다. 이런 독보적인 따뜻함이라는 뚜렷한 의의 앞에서는, 본격적인 성인향 순정만화를 그리는 당대 유일한 남자 작가였다느니 하는 형식적인 이름표 붙이기 따위는 의미가 없어진다.

송채성은 한겨레 문화센터 만화창작반, 더듬이, 메가툰 등 일련의 예비 또는 독립작가 커뮤니티들을 통해 만화에 대한 인연을 쌓아오다가, 『전국노래자랑』으로 2000년 제3회 서울문화사 만화대상 ‘나인'(성인여성향잡지) 부문에 동상을 수상하며 데뷔했다. 인디적 감수성의 실험적 시도들이 주류 순정 만화계의 감수성과 적절히 섞여있고, 그림은 덜 정제되었으나 주제 방향성이 확실하게 자리 잡아 무척 높은 잠재력을 보여준 작품이었다. 동시간에 방영하는 전국노래자랑과 출발비디오여행의 채널권 다툼이라는 지극히 일상적이고 뛰어난 디테일을 활용할 줄 아는 작가의 등장이었던 것이다.

일정한 준비기간이 지난 후 잡지 ‘나인’에서 『취중진담』으로 본격적인 연재활동을 시작했다. 취중진담은 남녀, 부모와 자식, 기타 등등의 사람들 사이 관계들이 술을 매개로 이어지는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옴니버스 작품이다. 다만 표현적 측면에서는 주류잡지에 적응하면서 더 심심해진 면이 있었다. 공모전 당선작에서 보여주었던 마츠모토 타이요의 분방한 구도 대신 타다 유미의 탐미적 선을 새로 장착하려는 시도에서 시행착오가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부분적인 기교 과잉을 상쇄하는 것은 여전히 별로 잘난 것도 너무 못난 것도 없는 중간치 인생들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었다. 다만 운이 따르지 않아 연재잡지가 도중에 폐간되어 1권 이후의 단행본은 연재 없이 곧바로 단행본으로만 나와서 인지도면에서 피해를 볼 수 밖에 없었다.

이후 윙크에서 『쉘 위 댄스』를 연재하며 인간사의 비루함보다는 시트콤 내지 트렌디드라마 풍의 코드를 시도해보기도 했다. 물론 그 와중에서도 댄스학원 아들이 학교에서 댄스부를 만드는 등의 소재가 등장하지만, 그의 장점이었던 속 깊은 따뜻함을 집어넣기에는 너무 작위적인 흐름의 이야기였기에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의 장점을 잔뜩 살릴 수 있었던 분야에서 다른 작품을 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바로 새로 창간된 성인향 순정만화잡지 ‘오후’에 연재한『미스터 레인보우』다. 낮에는 유치원 교사, 밤에는 몰래 게이클럽의 스타 여가수를 하고 있는 주인공 덕구의 파란만장한 좌충우돌을 다루는 경쾌하고도 짠해지는 작품이다. 성정체성으로 부여된 소수자 지위, 그것을 숨기면서도 본성으로서 추구하는 모습에서 오는 갈등, 왁자지껄함 뒤에 오는 외로움, 외로움을 극복하는 사람들 사이의 서로에 대한 이해가 자연스럽게 엮여나갔다. 취중진담의 에피소드들 사이에 보였던 기복의 불안함, 쉘위댄스가 보여준 아쉽기 짝이 없는 무난함을 일거에 뒤집는 작품이었던 것이다. 연출은 과잉의 기름이 빠졌고, 주류적 재미 코드와 본래의 삐딱함의 조화는 훨씬 자연스러웠다. 가끔 희화화되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코믹한 상황의 연속임에도 불구하고, 결코 자신의 주인공들을 업신여기지 않는 작품으로, 코믹하고 궁상맞으면서도 따뜻하게 감싸 안고 싶은 사람들 투성이다. 만약 그 페이스로 연재가 계속되어 작품 속 이야기들이 그 전개에 어울리는 깔끔한 결말을 맞이했더라면 한국순정만화를 대표할만한 보물이 완성되었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확신을 확인할 기회는 오지 않았다.

사람으로서의 애도를 차치하고 생각해볼 때, 평론가로서 그가 더 많은 것을 계속 만들어내기를 재촉해야할 입장에서 그가 남긴 것은 무엇일까 평가해야할 입장으로 바뀌는 것은 슬픈 일이다. 송채성은 남자가 그려내는 순정만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는가? 확실히 열었다. 하지만 그 다음에 그 길은 딱히 더 이어지지 않았다. 하필이면 만화잡지계의 확연한 축소와 웹을 기반으로 하는 에세이툰 중심의 대중 취향 전환의 시기였던 것이 운이 나빴다. 뛰어난 작품으로 한 시대에 감동을 주었는가? 00년대 초중반 기준의 성인향 한국 순정만화 독자층에게는 확실히 그랬다. 하지만 더 많은 이들이 그와 만날 수 있는 접점이 생기기 전에, 그가 그려내는 세상의 본질보다는 요절한 젊은 작가의 이미지가 더 강해져버렸다. 그렇다면 작가 자신의 존재와 작품의 지속되는 매력으로서 계속 세간의 기억에 남아, 그의 본질적 매력인 따뜻한 시선으로 인간사를 바라보는 만화에 대한 영감을 다음 세대의 작가들에게 계속 주고 있는가? 중요한 질문인데, 이것은 이미 떠나간 작가 본인만의 몫이 아니다. 바로 그와 그의 작품을 기억하고 아끼는 모든 남은 이들이 같이 해나가는 몫이다.

송채성만화상은 그렇게 시작했다. 가족분들과 지인들이 모이던 온라인 공간에서 논의되어 추진되었고, 운좋게도 필자 역시 준비과정에서 몇 마디 조언을 거들 수 있었다. 대중음악계의 유재하가요제처럼, 추모를 위한 애매한 공로상이 아니라 그가 닦은 길을 더 발전시키는 쪽으로 장래성을 보아 명확한 컨셉으로 신인을 뽑는 행사로 만들자. 단발성 단독 이벤트에 그치지 않고, 당선작을 잡지지면에 공개하고 추모작품집을 발간하는 등 진짜로 ‘만화계’에 울림을 줄 수 있는 행사로 만들자. 그리고 많은 이들의 노력과 관심 속에 4회까지 실시되었다. 그리고 이번에 그간의 당선작들을 모아 이번에 작품집을 출간하게 되었다. 덕분에 그의 의미를 논하는 것은 과거완료형 평가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다.

송채성 작가의 마지막 출간 원고는 『미스터레인보우』 중 한 회였다. 주인공 덕구가 자신을 고등학교 때 좋아했던 여자동창에게 커밍아웃하고, 일련의 소동 끝에 서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로 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 위로 흐르는 것은 게이클럽 공연에서 덕구가 부르곤 하는 올드팝, “You’ve Got a Friend”다. 당신이 내쳐지고 우울할 때, 도움의 손길이 필요할 때, 그 어떤 것도 제대로 되지 않을 때… 겨울, 봄, 여름, 가을, 단지 부르기만 한다면, 갈께요… 당신에겐 친구가 있어요. 마치 송채성의 길지 않았으나 더없이 뚜렸했던 작품 세계와 인간관을 그대로 함축한 듯한 그 멜로디를 타고, 그가 남긴 의미는 그와 그의 작품에 영향 받은 이들에 의해 계속 만들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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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보도자료: 클릭
* 한겨레 기사: 클릭
* 2001년 만화규장각웹진 인터뷰: 클릭

성장기
송채성추모사업회 엮음/거북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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