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적당히 묻어두기 아까운, 더욱 조명 받아 마땅한 인문변태개그물(핫핫).
집요한 유머 -『에이스 하이』
김낙호(만화연구가)
세상에는 수많은 개그코드들이 있지만, 그 중 성공적인 것 상당수가 공유하는 특성을 한 가지 꼽자면 바로 집요함이다. 황당한 반전으로 인한 웃음은 그 전에 집요하게 평범한 상황을 반복해주기 때문에 성립할 수 있고, 캐릭터 사이의 상호작용에 의존하는 시트콤식 유머는 캐릭터들이 자신들의 고정된 속성을 집요하게 고수함으로써 상황을 예상할 수 있게 만들어 웃음을 유발한다.
혹은 아예 본격적으로, 생뚱맞은 요소나 괴상한 소재를 집요하게 고수하고 공식에 가깝게 느껴질 정도로 반복하여 결국 웃고 말 때까지 밀어붙이는 방법도 있다. 이런 방식은 창작자 자신이 적잖게 특수한 취향이 아니라면 성공적으로 구사하기가 힘들 뿐만 아니라, 성공해도 대중적 히트보다는 그 괴상함을 끝까지 감내해준 팬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컬트취향이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그다지 널리 추천할 만한 방법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제대로 작품을 만들면 탁월한 개성은 물론 이야기 전체에 고른 내적 일관성을 지닌 개그물의 명작이 될 수 있다. 일찍이 수염에 집착하는 『멋지다 마사루』와 치지도 않는 탁구에 집착하는(?) 『이나중 탁구부』가 그렇게 한 세대의 개그만화팬들에게 전설로 자리 잡은 바 있다.
『에이스하이』(이창현 글, 유희 그림 / 한국만화영상진흥원)는 집요한 개그로 일가를 이룬 그런 만화작품들의 명예의 전당에 당당히 명함을 내밀 자격이 충분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본 얼개는 한국에 90년대에 ‘지옥의 외인부대’라는 제목으로 널리 소개된 바 있는 『에이리어88』의 패러디로, 중동의 가상 국가를 무대로 용병들로 구성된 공군부대의 활약을 다루고 있다. 주인공은 한국의 기자 권의진으로, 그 용병부대에 있다는 한국인 용병 최장집(J.J.)을 취재하러 온다. 하지만 그곳에서 본 부대의 실상은, 하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상대 국가에 공군이 없어서 매일 그냥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낼 뿐인 이곳에서, 그래도 취재를 해야 하는 기자의 고충과 각종 변태 취미로 물든 부대원들의 의미 없는 생활이 펼쳐진다.
물론 보통 이런 계열의 만화들이 그렇듯, 줄거리만으로는 재미를 느끼는 것이 힘들다. 하지만 개성 강한 비행기 파일럿 부대원들이 오로지 인문학적 농담과 팬티스타킹에 대한 페티쉬로 집요하게 하루하루를 낭비하는 모습이 반복되고, 전선과 용병부대의 비장함과는 담쌓은 소소한 사건들만 줄기차게 이어질 때 결국 웃음은 통하고야 만다. 특히 이런 계열의 작품이면 황당한 상황들을 이어가기 위해 시끌법석한 호들갑과 과장되게 흥분한 표정 등을 활용하기 쉬움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정반대로 심각하고 무표정한 상태에서 유머를 구사한다(‘deadpan’). 너무나 담담한 캐릭터들이 당연하다는 듯이 팬티스타킹에 대한 일장연설을 늘어놓고, 인문학적 지혜가 담긴 고전 경구들이 지극히 무의미하게 펼쳐지는 모습에 적응하기 시작하면, 포복절도의 순간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 낭비되다시피 하는 인문학적 현학성은 다른 어떤 개그물에서도 쉽게 찾아보기 힘든 수준의 완성도를 자랑한다. 아직 사람들이 어떤 작품을 만나게될지 모르는 1화의 시작 부분부터 『채털리부인의 연인』에 실린 “우리 시대는 본질적으로 비극적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 시대를 비극적으로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다”라는 인용이 등장한다. 물론 주인공 기자의 입장에서 용병부대 취재를 왔는데 부대원들이 하나같이 정신 나간 이들이고 뉴스거리가 아무것도 없다는 점은 충분히 비극이기는 하겠지만, 그런 어렴풋한 연결을 떠올리는 것 외에는 사실 별로 큰 상관이 없다. 의미를 억지로 찾아야할 것 같은데 사실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뻔히 알게 하는 것이 묘미다. 즉 그럴듯한 현학적 헛소리라는 것을 조금도 숨길 의지가 없기에, 효과적인 개그코드가 되어버린다. 물론 작품 속에서도 사막에 추락한 용병의 가방에 야전교범 같은 것이 아니라 칸트의 ‘도구적 이성비판’이 들어있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인문학적 현학을 충분히 집요하게 개그로 활용한다. 어린왕자를 만나서 양 그림을 그릴 때도, 팬티스타킹에 대한 온갖 변태적 집착을 드러낼 때도 인문학적 교양을 마음껏 낭비한다. 너무나 천연덕스럽고 의미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현학 취향에 대한 비꼬기로 오해할 겨를조차 없다. 그저 순수한 의외성의 개그소재로 받아들여지며, 그것을 집요하게 끝까지 구사하는 것이다.
인문학적 현학과 함께 두 기둥을 이루는 개그요소는 팬티스타킹에 대한 집착이다. 심지어 여자 자체에 대한 관심보다 오로지 팬티스타킹 자체에만 집착하기 때문에, 짓궂은 에로틱한 느낌으로 깊게 들어갈 겨를조차 없다. 스토리작가가 모든 부대원들의 입을 통해서 풀어놓는 각종 예찬론과 그림 작가가 묘사하는 클로즈업과 디테일이 훌륭한 조화를 이뤄낸다. 주인공에게 인생의 전기가 되어주는 “발목에 팬티스타킹이 살짝 주름진 모습”이 나오는 대목에 도달하면, 별반 팬티스타킹에 관심 없는 평범한 독자들도 한 순간 침을 꿀꺽 삼키며, 다음 순간에는 그 하염없이 순수한 변태성에 박장대소를 보낼 것이다.
『에이스 하이』는 기본기 충실한 연출, 군더기 없이 깔끔한 전개, 심각할 때도 농담할 때도 황당해할 때도 부담스럽지 않은 무표정을 구사하는 그림체 등이 잘 맞물려있기에 비교적 낯선 개그코드로도 이 정도의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원래 포털사이트 미디어다음에 12화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으로 연재되었는데, 연재 및 단행본화 모두 한국만화영상진흥원에서 지원한 작품이기에 다소간의 실험성을 발휘할 수 있었던 듯 하다. 반면 보다 폭넓은 인기를 끌 수 있을 만한 다른 대중적 요소들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었기에, 결국 소수의 지지이라는 경로로 가게 되었던 바 있다. 하지만 집요하게 현학으로 정신 나간 개그를 하면서 패러디의 외피를 쓰고 있으며 변태기질마저 양념으로 친 만화책을 만나볼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다는 것을 명심하고, 서가에 있을 때 어서 집어드는 용기가 모든 개그 애호가들에게 필요한 때다.
* 웹 연재분 보기: (클릭)
Aces High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한국만화영상진흥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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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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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웃기에도, 뭔가 생각하며 웃기에도 좋은 #만화_ 였죠. RT @capcold: [캡콜닷넷업뎃] 집요한 유머 -『에이스 하이』(기획회의 269호) http://capcold.net/blog/5947 | 묻어두기 아까운 개그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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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학의 변태(變態, 便態)화! 끝내주는 만화를 알게 됐습니다. 감사합니다^^ RT @capcold: [캡콜닷넷업뎃] 집요한 유머 -『에이스 하이』(기획회의 269호) http://capcold.net/blog/5947 | 묻어두기 아까운 개그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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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팬티스타킹 아니고 밴드스타킹인듯요; RT @pinball73 현학의 변태(變態, 便態)화! 끝내주는 만화를 알게 됐습니다. RT @capcold: 집요한 유머 『에이스 하이』(기획회의 269호) http://capcold.net/blog/5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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