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찌 생각해보면 과학과 스릴 대신 명랑개그가 들어간 우리동네 골목길 맥가이버.
뚝딱거림의 매혹 – 『요철발명왕』
김낙호(만화연구가)
웃음이라는 것만큼 당대의 유행에 민감한 것은 드물다. 하지만 반대로 사실은 시대 상황이 조금 바뀌었다한들 그 코드를 기억하고 있는 이들에게는 계속 통할만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주춤했다고 곧바로 강제 퇴출을 당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 공연에서는 만담 공연이 그렇고, TV에서는 ‘유머1번지’등으로 대표되던 에피소드 단위 연속극형 촌극이 그렇다. 그리고 만화의 경우, 전후부터 80년대까지 어린이만화를 호령하던 ‘명랑만화’가 그것에 해당된다. 만화에서 개그코드의 흐름이 엽기와 부조리로 변한 것이야 어쩔 수 없다고는 하지만, 명랑만화를 즐기며 자라난 세대가 사회의 주류가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장르 자체가 거의 사라진 것은 불가사의할 정도다(김진태의 ‘시민쾌걸’ 같은 작품이 소중한 예외다). 명랑만화는 일상 속에 어른들의 세계와 충돌하는 어린이의 상상력을 유머러스한 상황으로 버무리며, 자연스럽게 신기한 모험으로 이어지기도 십상이다. 그 속에 가끔 인과응보의 교훈도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활달한 장난을 예찬하는 정서가 모든 것을 압도한다. 정치사회적으로 억압적이었던 독재시절에 오히려 어린이들이 즐기는 만화는 오히려 그런 식이었다는 것은, 정반대가 되어버린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매우 역설적이다.
그런데 만약 당시 상황에서 재미있었던 고전 명랑만화를 지금 다른 연령대와 세상 환경에서 다시 읽으면, 그래도 재미있을까. 뻔한 대답일 수 있지만, 재미있게 즐길 준비가 되어있다면, 그 중 원래 우수했던 작품 정도라면 얼마든지 다시 그대로 즐길 수 있다. 그저 개인적인 추억상품으로 즐길 수도 있겠지만, 고전으로 간주하며 당대의 맥락을 떠올리면서 어떤 원형적인 재미를 다시 얻어내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이다. 훨씬 우리 현재와는 거리가 먼 셰익스피어 연극도 그렇게 즐길 수 있는데, 고작 수 십년전 한국사회의 정서를 담아낸 명랑만화의 고전명작을 그렇게 읽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는가. 믿기지 않는다면, 이번에 복간된 『요철발명왕』(윤승운 / 씨엔씨레볼루션 / 전4권)을 구해보라.
『요철발명왕』은 1975년 어린이잡지 ‘어깨동무’의 별책부록으로 연재된 작품이다. 주인공은 요철이라는 꾸러기 소년인데, 집의 지하에 자신만의 비밀연구실을 만들어 엉터리 발명품을 만들어내곤 한다. 요철이는 “발명왕” 에디슨처럼 세계적 발명품을 만들어 유명해지고 효도도 하겠다는 큰 꿈을 가지고 있지만, 기본적으로는 골목길에서 다른 애들이랑 어울려 노는 것을 좋아하고 항상 사고를 치고 다닌다. 물론 발명품은 거의 항상 말썽거리로 연결되고, 공부하라는 아버지의 타박 속에 늘 술래잡기가 벌어진다. 요철이의 연구실을 찾아내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아버지, 점점 더 스케일과 기발함이 더해가는 발명품들, 끊이지 않는 동네 시끄럽게 만드는 사고들이 슬랩스틱으로 펼쳐진다.
재미있는 것은, 요철이의 발명품들은 과학적 혹은 마법적 상상력의 신기한 물건들이 아니라, 아이들이 누구나 한번쯤 이런 식으로 만들면 움직이지 않을까 쉽게 생각해봤을 법한 것들이라는 점이다. 당장 첫 화에 나오는 1인 동력 날틀만 봐도, 자전거 페달과 날개를 연결해서 빨리 페달을 돌리면 날개가 퍼덕이며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라는 순진한 공학적 희망에 어릴 적 공감해본 이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즉 “대충 이렇게 뚝딱거려서 만들어보면, 왠지 될 것 같다”의 정서인 셈이다. 로켓은 항공역학 연구가 전제되어야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뚝딱거려서 로켓모양으로 만들고 엔진 비슷한 것을 달아서 불을 붙이면 된다. 적당히 생긴 기계에 시계를 달아놓으면 타임머신 완성이다. 발명 연구실에 가장 필요한 것은 원심분리기와 레이저 커터가 아니라 못 한 박스와 출출할 때 먹을 라면 한 무더기다. 신기한 아이템을 구경하는 재미라기보다, 뚝딱 만드는 것의 매혹이 숨쉬는 정서인 셈이다. 부국강병이든 뭐든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분야로서 과학을 교육적으로 접근하기 보다는, 그저 당장 무언가를 직접 만드는 것의 즐거움을 강조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바로 그것이야말로 당대 어린이문화의 눈높이 그대로인 셈이었다. 학교공부에는 젬병이지만 머리는 좋아서 발명품을 뚝딱 만들어내는 요철이는 의심할 여지없이 수많은 꾸러기들의 감정이입 대상이었다. 남의 모험을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기 동네에서 자기 친구들, 아니 자신이 그러고 있는 듯한 느낌에 빠지기 좋다.
일상생활의 단독주택과 골목길을 기본 활동공간으로 하되, 시간여행이나 도깨비 등장 같이 현실과 환타지의 공간이 위화감 없이 섞여버리는 것도 재미있다. 게다가 어른들은 모르는 자신만의 비밀아지트가 있다는 것은 세계 어린이들 누구나 꾸는 꿈인데, 그것이 당대 일상적이었던 단독주택에서 벽돌 하나만 뽑으면 갈 수 있다는 식으로 표현한 것 역시 매력적이다. 『요철발명왕』은 70년대 한국 어린이 문화에 주어진 호그와트행 기차고 해리포터였던 것이다.
『요철발명왕』은 치밀한 극전개나 논리를 딱히 강조하지 않는 명랑만화라는 장르의 기준에서 보더라도 유독 당장의 상황들과 소재의 흐름에 따라 물 흐르듯 흘러간다. 이야기의 전개는 마치 해학적 민담마냥 엉뚱하고 느슨하다. 한편으로는 주의력 부족한 넌센스의 향연으로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오로지 끊임없는 발명품과 말썽만을 원동력으로 흘러가며 결국 한 회 66페이지 안에 어떻게든 만족할만한 결론을 내고야 마는 모습을 보인다. 이번의 자유롭게 퍼져나가는 말썽담을 도대체 어떻게 수습할지 매번 궁금해지게 만드는데, 마치 아무리 골목길에서 떠들썩하게 놀아도 저녁밥 시간에는 집에 돌아가서 식탁에 앉는 어린이들의 하루와도 닮아 있다. 뼛속까지 어린이문화인 셈이며, ‘학습’만화라는 어른 위주의 패러다임에 갖혀버린 오늘날의 어린이만화에서는 볼 수 없는 눈높이가 갖추어져 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자. 그래서 지금 읽어도 재미있는가, 혹은 어떻게 읽으면 재미를 제대로 느낄 수 있는가, 그리고 그렇게 하면 재미를 느낄 만한 우수한 작품인가. 답은 간단하다. 지금 읽어도 재미있고, 뚝딱 뭔가를 만들고 싶다는 ‘꿈’을 살짝 다시 기억하면 제대로 재미를 느낄 수 있고, 그렇게 하기에는 더 할 나위 없이 적합한 작품이다.
요철 발명왕 박스세트 – 전4권 윤승운 지음/씨엔씨레볼루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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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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