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호 원고는 스콧필그림. 첫권으로 휘어잡고, 뒷권으로 갈수록 더욱 깊어지는 작품.
컴퓨터게임과 인디락과 청년생활담 – [스콧 필그림]
김낙호(만화연구가)
90년대 초, [어쩐지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은 저녁]이라는 소년만화가 화제를 모은 적이 있다. 인기의 기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당대 한국 소년만화의 틀을 넘어섰다는 점에 기인하는데, 당대의 일반적 데뷔 경로인 중견작가 문하생 과정을 거치지 않은 아직 고등학생이었던 작가가 그려내는 쿨한 스타일의 미형 캐릭터, 거침없는 상황개그, 당시 일반적이었던 교훈성 다분한 기승전결을 무시하는 내용, 오토바이 레이싱과 학내 싸움꾼들의 경쟁 등 청소년들의 아드레날린을 촉진하는 소재선택 등 헤아리기 힘들 정도다. 덕분에 얼굴 클로즈업만 남발한다든지(속칭 ‘목치기’) 스토리가 날림이라든지 세대적 고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든지 하는 여러 완성도 자체 측면에서의 단점은 가볍게 덮어둔 채 당대 최고 인기를 구가했다. 그런데 그런 감성이 나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좀 더 오락코드가 충실하게 발달했던 일본소년만화의 영향을 본격적으로 받은 젊은 층이 모이고, 진입장벽이 있는 기존 데뷔방식과 다른 식으로 그 세대의 성원이 작가로 등단하여 가장 동세대적 오락 감성을 풀어놓게 되었다는 점이 있다. 놀이문화, 특히 서브컬쳐의 관심사나 표현방식 등에 있어서 독자들과 격차 없이 다가설 수 있는 것이다.
[스콧 필그림](브라이언 리 오말리 / 세미콜론 / 전6권 가운데 2권 발행중)은 북미 만화계의 [어쩐지…저녁] 같은 작품이다. 2004년부터 발간되어 2010년 완간되었는데, 바로 일본소년만화가 그 지역에서 매니아들의 관심사가 아니라 대중적 히트로 발돋움한 시기에 만들어졌다. 일본만화의 영향을 받은 그림체와 연출방식 속에, 청년들의 생활과 모험을 적당한 현실과 판타지를 섞어가며 그 세대의 관심을 반영한 컴퓨터 게임, 인디락 밴드, 연애와 결투를 담아낸다. 덕분에 동세대 독자들에게 인기를 끌었고 최근에는 영화판으로도 제작된 바 있다. 하지만 [어쩐지…저녁]과 달리, 이 작품은 취직문제라든지 끝나지 않은 사춘기 같은 20대 초반의 고민을 빼놓지 않았으며, 작품이 펼쳐지는 캐나다 도시 토론토의 일상적 현실감을 구현하며, 무엇보다 캐릭터들이 입체적으로 성장해 나가는 일관된 스토리구조가 있다.
주인공 스콧 필그림은 토론토에 사는 23세 청년이며, 무명 인디락밴드 섹스바밤의 베이시스트이며, 무직 상태에서 게이 친구 월레스의 집에 눌러 살고 있다. 그러다가 꿈에서 본 운명의 여성 라모나 플라워스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와 무사히 사귀기 위해서는 7명의 사악한 전 애인들을 물리쳐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것도 다양한 장르의 컴퓨터 게임식 격투로 이겨내야 하고, 이기면 상대방은 사라지고 동전이 남으며 경우에 따라서 아이템을 취득할 수 있다. 이런 RPG(롤플레잉게임) 모험 같은 기본 줄거리 속에 스콧과 밴드멤버들, 친구들 각자의 과거와 서로간의 관계, 동세대의 현실적 고민들도 슬그머니 섞여 들어간다. 물론 가볍고 발랄한 코미디 분위기 속에서 말이다.
[스콧필그림]의 전개방식은 서브컬쳐 오락성 코드의 향연이다. 점점 더 난이도가 올라가며 다양한 기술을 지닌 7명의 보스캐릭터를 물리치는 것은 (물론 캠벨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신화의 기본구조에 포함된 도전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전형적인 컴퓨터 게임의 구성방식과도 같은데, 그것을 아예 노골적으로 드러내버린다. 어떤 사악한 전 남친은 ‘스트리트파이터’ 같은 대전 격투 액션 게임의 방식으로 물리쳐야 하며, 다른 남친은 스케이트보드를 타고 계단과 난간 코스를 주파해야 하는 스포츠게임의 룰로 물리쳐야 한다. 젊은이들의 현실적 일상을 그리는 듯 하던 전개는 갑자기 게임 화면처럼 변하며, 그런 대결의 끝에 남는 것은 RPG에서 몬스터를 격퇴할 때처럼 패배한 상대는 사라지고 동전이 주어진다. 그것도 적의 강함에 비례하여 더 많은 동전이 남는 식이다. 중간중간에 캐릭터들을 소개하는 연출 역시 “이름/기술/약점” 등이 도표로 표시되는 RPG 카드게임에서 종종 사용하는 캐릭터 특징 설명 방식을 취한다. 슈퍼히어로물을 연상시키는 초인적 결투는 기본이고, 작중 락밴드 섹스바밤의 노래 일부는 심지어 노래 부르는 장면에 악보와 가사가 같이 흘러가기도 한다. 아예 작품 내 주인공들 역시 비디오게임, 슈퍼히어로 만화, 인디락 음악 등 각종 서브컬쳐에 심취한 이들이 넘친다. 이 정도로 철저하다면, 그쪽 취향을 지니고 있는 청소년/청년층에게 매력을 주지 못하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 그 안에 담긴 것은 현실적인 20대 초반 세대 청년들의 성장이다. 사춘기적 사랑과 우정을 하고, 장래를 걱정하기도 낙천적으로 잊어두기도 하고, 헤어지고 갈등을 넘어서며 성숙해지기도 하는 이야기다. 스콧의 라모나에 대한 순애보, 나이브스의 스콧에 대한 집착, 지나간 사랑, 백수의 별반 내밀 것 없는 생활 현장 같은 것 투성이다. 딱히 음악성이 넘치고 유능한 밴드도 아니고, 주인공 누구 하나 딱히 엘리트인 것도 아닌 이야기다. 다만 공공도서관에서 날아다니며 쿵푸 칼싸움도 하고, 밴드 대결 현장에서 장풍도 쏘고 뭐 그럴 뿐이다. 이렇듯 동세대적 현실감과, 동세대 오락코드에 대한 성실한 종합선물세트를 엮어넣은 것이 바로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이다. 마치 청년 일상을 다루는 인디영화에 슈퍼히어로 만화와 16비트 시절 컴퓨터 게임의 감성을 섞어 넣은 격이다. 일본만화식 코드를 완전히 소화하지 못한 몇몇 어색한 지점을 제외하면, 의외로 상당히 자연스럽게 말이다.
[스콧 필그림]은 북미권 인디만화의 시각적 감성 위에, 일본소년만화의 간략화된 선과 과장된 표현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사실 한국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저 다소 미숙한 일본만화 따라하기로 보일 수 있는 구석도 있겠지만, 본격적으로 ‘미국망가’를 표방하는 작품들과 달리 칸 연출, 화면 구도 등은 이야기 전개의 밀도가 높은 북미권 만화의 스타일을 그대로 이어가는 것이 대부분이다(물론 일본주류만화 또한 요즈음이 아니라 데즈카 오사무 시절에는 또 달랐지만 말이다). 나아가 캐릭터의 발랄한 귀여움이나 패셔너블한 복장과 소품 디자인은, 캐릭터를 돋보이게 하려면 화려하거나 요염하게 만들고 멋보다는 상징을 강조한 복장을 고수하는 북미권 주류만화, 아니 인디만화도 포함한 기존 작품들의 감성을 넘어선다.
이런저런 요소 덕분에 북미권에서는 큰 대중적 인기는 물론 매니아들과 평론가들의 호평을 받았지만, 한국 맥락에서 원래의 동세대적 공감대, 아니 그 이전에 특유의 말투도 온전히 그대로 느끼는 것은 무리다. 하지만 다행히도 그런 차와 포를 떼더라도 충분히 재미있는 작품이며, 주인공들의 성장에 함께 즐거워할 수 있다.
PS. 작가가 공식사이트(http://www.scottpilgrim.com)에서 지정한 음악 플레이리스트나 만능가수 벡이 참여한 영화판의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읽으면 더욱 재미있다.
스콧 필그림 1 브라이언 리 오말리 지음, 이원열 옮김/세미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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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이번 발간호 게재중인 글): 암울하고 폭력적인 슬럼 활극의 반가움 – 도로헤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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