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 보도와 과학의 언어, 일상의 언어 [사이언스온 110420]

!@#…한겨레 사이언스온 연재글에 대한 지연기간 후 자체 백업, 편집부 교열본(보통은 여기에는 기고본으로 공개하는데, 워낙 내용 그대로 살리며 깔끔하게 잘 교열해주셔서 그냥 그걸로 씀). 어차피 다뤄야할 주제인데 운 좋게도(?) 방사능 불안 타이밍과 얼추 겹치더라는.

 

위험 보도와 과학의 언어, 일상의 언어
– 과학뉴스 ‘사용설명서’ (1)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어떤 과학 뉴스가 언론과 대중 담론을 통해 주류에서 크게 화제를 모으는 경우는 언제일까? 학계를 뒤흔들 만큼 엄청나게 혁신적인 연구 결과가 발표된 경우라면, 그 분야 전문가들(보통은 딱 한 줌의 사람들)의 관심을 끈다. 엄청난 경제 효과가 예상된다고 포장된 연구라면, 관심은 끌지만 그 관심은 정작 과학적 내용보다는 금액에만 쏠린다.

그보다 확실하게 과학 뉴스로서 화제를 모으고, 또 사람들로 하여금 나름대로 전문용어들을 주워 배우도록 만드는 것이라면, 역시 “과학 기반의 위기 뉴스”다. 사람들에게 닥친 위기에 관한 내용으로서, 그 위기의 성질에 대해 과학적 설명을 필요로 하는 종류의 뉴스 말이다. 최근 많은 이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발 방사능 오염의 한반도 상륙에 관한 뉴스들을 떠올리면 된다. 사람들이 자신에게 닥친 위험으로 판단하는 만큼, 이런 소식들은 빠르고 넓게 전파되기 쉬우며, 그 위험을 막아줄 것이라고 주장되는 특정 행동들을 불러일으킨다. 다시마를 산다든지 말이다.

과학 기반의 위기 뉴스는 과학 보도를 통해 위기 상황에 대해서 적절하게 대처할 정보를 주는 것이 목표인데, 그 대처란 시민들이 불필요하게 패닉하지 않고, 필요한 조심성을 갖추며, 위험을 줄이기 위한 과학적 대처에 여론으로 힘을 실어주는 것이다. 최악의 과학저널리즘은 패닉을 퍼트리고, 조심해야 할 부분을 잘못 알리며, 정작 이후 예방과 통제를 위한 합리적 절차 개선이나 과학 연구에 대해서도 도매급으로 배척하게 만드는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과학 기반의 위기 뉴스는 과학저널리즘에서 과학의 언어와 일상의 언어 사이에 어떤 식으로 균형을 조율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가장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영역이다. 뉴스를 만드는 입장에서도, 뉴스를 읽는 입장에서도, 두 언어의 차이를 생각하고 조율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저 단순히 대중이 과학 전문용어를 알아듣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과학적 사실과 일상적 전달력을 함께 갖추어 (나에게 위험이 온다고 믿기에) 당장 사정이 급한 독자들에게 적절한 대처를 유도하는 것이다. 독자 역시 과학에서 현상을 파악하는 방식과 일상 방식의 차이를 인식해야만, 과학을 일상의 언어로 가공한 과학 뉴스로부터 실제 과학적 사실들을 다시 역산해낼 수 있게 된다.

그저 패닉에 동참한 자신의 모습에서 ‘일체적 고양감’이라도 즐기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자신과 가족들을 위해 위험을 회피하고 싶은 독자라면 반드시 필요한 자세다. 이 글의 연재 과정에서 좀 더 체계적으로 다루게 되겠지만, 우선 특히나 위기 뉴스를 읽는 것과 관련해서 특히 중요한 두 가지인 ‘미지’, ‘조건’을 살펴보도록 하자.

미지를 보는 자세

미지(未知), 즉 아직 알지 못하는 부분은 일상적 차원에서 기본적으로 두려움의 대상이다. 그 두려움을 일괄적으로 막아두기 위한 초월성으로 가득한 해답인 ‘종교’를 발명하는 경우도 있지만, 여하튼 미지는 무서우며 미지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은 가장 보수적인(즉 자기보호적인) 반응이다. 마이클 셔머 같은 회의주의자들이 설파하듯, “저 수풀이 움직이는 것은 호랑이가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가정하고 도망쳤는데, 사실은 바람이었더라” 라고 판단하는 쪽이 그 반대의 경우(바람이라고 가정했는데 사실은 호랑이)보다 생존확률이 높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런 자기 보호와 관련된 일상적 사고방식의 미지에서는, 자신이 기준이다. 내가 모르면 미지인 것이다. 자신이 아는 바 또는 찾아보는 바 이외의 모든 것은 미지의 영역이며, 따라서 앎과 미지의 경계선 역시 뚜렷하다.

반면 과학이라는 지식 축적 방법론에는, 미지는 개별 연구자가 아니라 해당 분야 전체를 기준으로 밝혀진 지식인가 아닌가를 따진다. 미지란 아직 충분한 연구가 이뤄지지 않아 예측 확률이 떨어지는 대상을 지칭할 뿐이지 미지에 대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부분의 과학적 발견은 완전한 규명이 아니라 밝혀진 부분과 불확실이 늘 공존하며, 과학의 언어에서는 그것을 조건과 한계라는 형식으로 뚜렷하게 명시하도록 되어 있다. 즉 과학은 미지를 늘 발견의 일부로 오히려 인정하고, 아는 것과 아직 모르는 것을 최대한 자세하게 명시함으로서 오히려 불확실을 포용한다.

여기에서 첫 번째 충돌이 일어난다. 직관적 일상에서는 두려운 불확실성의 미지를 회피하고 싶은데, 과학은 미지도 규명의 일부임을 전제하고 들어간다. 정부 보건 규제 한도 이하의 방사능을 일컫는 ‘저수준 방사능’을 둘러싼 최근의 대중적 논의들을 한번 떠올려보자.

‘잘 통제된’(특정 수준의 낮은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이 30년 뒤에 암에 걸렸다면, 그 방사능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조건들이 있는가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장기적 자료를 확보하기 힘들기에, 아직 충분히 연구된 바가 부족한 영역이다. 이에 대해 과학의 언어는 “피해가 관찰된 방사능 수준 이하의 것인데, 아직 밝혀지지 않은 부분에 대해서 더 연구가 필요하다”고 접근한다. 즉 아는 한도 내에서 전제를 깔고, 나머지 부분에서는 더 알아내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는 지식의 축적 과정이 아니라, 미지에 대한 두려움을 회피할 해답, 예를 들자면 “저수준 방사능도 위험한 것이다”를 원한다. 그 경우에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대상에 대한 두려움으로 바뀐다. 이 과정에서 미지의 ‘이미지’ 또한 큰 역할을 한다. 사실은 굳이 방사능이 아니라 간접흡연 담배연기든 중금속이든 황사든, 과학적으로 덜 밝혀진 부분들이 여전히 적지 않다. 반면 방사능에 대해서는 일상적으로 알려진 신비의 이미지보다 더 많은 것이 밝혀졌기에 각종 원자력 활용 장치들을 수 십년 만에 여기까지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일상에서 어느 정도 알고 있으며 통제하고 있다고 간주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불안이 덜하다.

바로 이런 차이를 과학 저널리즘이 잘못 다루면 곧바로 패닉의 재료가 된다. 과학 언어로 된 자료를 보도 소재로 가져오되, 기본 정서구도는 일상 언어의 방식으로 치환하는 것이다. “저수준 방사능의 위험성에 대해 아직 연구가 필요하다”가 “저수준 방사능도 미지의 위험으로 가득하다”로 바뀌는 식이다. 혹은 별도의 기사라고 할지라도, 편집의 묘미에 의하여 엄밀한 과학기사가 패닉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동원되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렇기에 과학 커뮤니케이션은 단지 일상 언어로 무언가가 미지라는 내러티브를 전달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접근성 있는 참조자료를 제공해주는 것이 중요하다(좋은 사례는 미국 환경보호국(EPA)의 방사능 관련 ‘묻고 답하기(Q&A)’ 페이지다). 과학으로서의 미지를 일방적 안심이나 일방적 불안의 재료로 쓰지 않고, 사람들이 약간 더 안전한 습관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도록 말이다.

조건을 보는 자세

과학과 일상의 언어의 또다른 중요한 차이는 바로 ‘조건’이다. 과학의 언어에는 ‘조건’에 따라서 결과는 얼마든지 비판당하고 뒤집힌다. 조건들 가운데 가장 흔히 꼽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양’이다. 한때 인구의 절반이 시청했다는 텔레비전 인기 드라마 <대장금>에는 스승이 주인공에게 약초와 독초를 고르게 하는 시험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정답은 “약도 독도 없다, 얼마나 어떻게 쓰는가에 따라서 약도 되고 독도 된다”는 것이었다(유감스럽게도, 이렇게 실로 과학적인 메시지는 시청자들에게 잘 전달되지 않았는지, 그 이후에도 각종 유사 과학실험 고발 프로그램들이 먹거리 위기 의식을 부르며 인기를 누렸다).

과학의 언어는 양과 정도를 정교화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는 흑백을 원한다. 해당 과학 분야의 전문가가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당장 위험한지 아닌지 확인받고 회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두 언어를 넘나드는 과정에서, 양에 따라서 결과가 유의미/무의미해질 수 있음을 뚜렷하게 드러내지 않고 그저 일상 언어에서 요구되곤 하는 단순화한 결론으로 뛰어들 때, 과학 저널리즘은 그저 조회수 높은 선정적 글질이 된다.

그런데 보도의 내용에서 양이 얼만큼인가를 밝히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오히려 여기까지만 하면 과학의 아우라를 입힌 더 큰 불안만 야기할 수도 있다. 그렇기에 그 양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가를 제대로 밝혀야 하는데, 그마저도 의미 전달의 레이어를 동등하게 하지 않으면 역효과다. 어느 신문의 최근 기사 제목은 아주 뚜렷하게 “일 정부 ‘방사능, 이틀 만에 한국 직접 간다’”인데, 기사 내용 후반으로 한참 들어가서야 그 양이 1/1000조 bq/1m^2의 극미량임을 보여준다. 기사에는 그 양이 어떤 의미인지 제대로 설명하지 않은 것은 물론이다.

양의 개념을 날려먹는 일상 언어의 함정에 빠져서 과학커뮤니케이션이 실패하는 경우는 과학자들에게도 쉽게 발생한다. 원전 사태 초기, 기상청 관계자들이 이야기한 “편서풍 때문에 한반도에는 방사능 오염 물질이 조금도 오지 않는다” 운운이 그렇다. 편서풍 덕에 “대부분”의 물질이 서쪽으로 날아가는 것이지, 전부는 아니다. 대기 흐름의 복잡성에는 부분적 예외가 발생하여 미량의 물질은 다른 방향으로 퍼질 수 있고, 그것을 누구보다 가장 잘 아는 것은 그들일텐데 말이다. 그런데 일상언어의 세계에서는 그것을 “기상청 거짓말쟁이, 한반도에 방사능 물질이 덮친다”로 다시 한번 단순화하여 빠르고 명확한 결론(즉 “방사능 공포는 현실이다”)을 내리고 싶어 한다. 당장 걱정하지는 않아도 될 극미량, 하지만 예의주시할 가치는 있는 정도의 ‘사고 이전에는 없던 요소’라는 인식의 균형점을 심어 넣는 것에 실패한 것이다.

위기 관리 과학 사안의 커뮤니케이션에서 가장 먼저 제공되어야 할 것은 “얼마만큼, 그리고 그 정도라면 무슨 일이 있는가”라는 정보다. 그리고 각각의 정도에 따라서, 사람들이 무엇을 해야 하는가다. 방사능 비다 아니다를 놓고서 대중과 정부가 언론과 홍보자료들을 매개로 담론적 실랑이를 벌이는 것보다, “○○농도 이상의 ○○위험단계에서는 ○○을 해야합니다”라는 매뉴얼과 “지금은 ○○자료에 의거해 볼 때 ○○단계입니다”라는 양에 대한 투명한 데이터 공개가 요긴하다. 양에 따라 구분해야 하는 과학의 언어와 결론을 던지고 싶은 일상 언어 사이에는 충분히 노력하면 얼마든지 건설적 균형점을 만들어낼 수 있다.

비단 양 뿐만이 아니라도 조건들이 전체 내용의 방향을 틀어버릴 수 있다는 것은 과학의 언어에서는 당연한 전제이기에, 모든 결론은 조건과 함께 명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일상의 언어에서 조건은 결론을 위한 수식어이며, 결론을 강화하기 위해 또는 그냥 지면이 부족할 때 과감히 생략된다. 언론이 일부러 생략하기도 하지만, 과학 측에서 일상 언어로 치환하며 허풍의 소재로 삼기도 한다.

어느 단체들이 낸 어떤 방사능비 관련 성명서는 방사능의 누적되는 위험을 강조하기 위해 1년 동안 그런 비를 맞으면 큰일난다고 표현했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방사능 오염물질 농도가 1년 동안 계속 유지되고, 그 비를 쉬지 않고 계속 맞고 서 있어야 한다는 상당히 비현실적인 조건이 은폐된 채로 담겨 있다. 점진적 유전자 이상보다는 폐렴에 걸려서 건강을 크게 해칠 가능성이 더 크다.

또 다른 이들은 정부가 발표하는 안전 기준 자체에 의문을 제기한다. 하지만 이 역시도 그 기준이 상정하고 있는 조건을 보면 공포를 줄일 수 있다. 세계적으로 방사능 한계량의 위험 평가들은 이미 여러 평가 방식 가운데 가장 안전을 중시한 ’선형 비역치(LNT) 모델’, 즉 세포의 회복력이나 적응력 같은 것을 논외로 하고 모든 방사능 에너지의 영향은 체내에 계속 단선적으로 축적된다는 가정으로 만들어졌기에 ‘연간 노출량’ 같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저수준 방사능에 대한 더 많은 연구를 해서 그 결과에 따라서 수치를 수정하는 것은 당연히 바람직한 발전 방향이지만, 무턱대고 불신해야 할 만큼 지금의 기준이 만만한 것 또한 아니다. 물론 성인이 아니라 아동·노약자라는 다른 조건에 대해서 다른 기준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은 큰 문제지만 말이다.

위기에 대한 정보

패닉을 조장하여 독자를 모으려는 언론 기사, 패닉의 공감대를 추구하는 개개인들이 뿌려내는 정보를 걸러내고 실제로 자신의 상황 파악과 위기 관리에 도움을 주는 것만을 받아들이기 위한 가장 간단한 평가 잣대가 있다. 바로 “그러니까 어쩌라고” 테스트다. 한반도 방사능 상륙에 대한 가장 막연한 불안들만 종합하면, 이미 개개인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방사능은 영원불멸에 무적이고, 극미량도 살짝 접하면 암에 걸리고, 이미 한반도를 전부 덮쳤다. 경로는 대기와 물과 음식이기에 피할 길도 없다. 1960년대 미국인들마냥, 패닉에 휩싸여 집집마다 지하벙커를 파는 수 밖에 없다.

아, 사태의 원흉인 일본도 욕하고, 이런 위험에 기여한 한국 정부도 싸잡아서 욕하자. 그런 담론에는 그저 걱정하라, 혹은 걱정할 필요 없다의 정서적 이분법만이 날라다닐 뿐이다.

하지만 현명한 보도 내용이나 정보라면, 대답이 들어있다. 제도적 차원에서라면 일본 해당 지역 수입식품의 검역을 향후 수 년 동안 강화하자, 혹시 모르니 측정기를 더 좋은 것으로, 한반도 전역에 추가 설치하자, 우리 원전도 전면 재점검하자, 방사능 영향 연구와 신재생에너지에 돈을 더 투자하자 같은 것들이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황사철에 비 맞아서 좋을 것 없는데 이번 기회에 우산 정도는 쓰고 다니자, 다시마 사재기할 필요 없다, 외출 후에는 몸을 씻는 습관을 들이자 등이 있다.

과학 기반의 위기 뉴스가 지향해야 할 바는 사람들의 자연스러운 불안을 패닉으로 증폭해서 자신들의 담론 장사에 이용해먹는 것이 아니라, 불안은 인지상정으로 간주하되 제도적 장치와 개별적 안전 습관만을 키워나가도록 종용하는 것이다.

합리적인 견지에서 과학과 일상의 언어를 접목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실리카겔 접근법”이라고 본다. 밀봉 식품에 첨부하곤 하는 제습제인 실리카겔에 대한 과학적 견지라면, (과도하지 않은 양이라면) 먹어도 인체에 흡수되어 독이 되지 않으며 배탈 정도는 날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장기적으로 복용하면 어떤 문제가 있을지는 사실 잘 모른다. 그렇다고 해도, 일상의 언어에서는 이왕이면 먹지 않도록 조심하자고 하는 것이 낫다. 그리하여 봉지 겉면에 “인체에 무해하지만 먹지 마시오”라는 알쏭딸쏭한 문구가 크게 새겨져있다. 그 역설적 어감이 가끔 비웃음을 사지만, 충분히 효과적으로 전달해내서 결국 불안해 하는 이들을 우습게 만들지 않고 패닉 없이 조심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어쨌든 결과적으로 실리카겔을 뜯어먹는 사람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고, 실리카겔을 진지하게 ‘두려워하는’ 사람 또한 찾아보기 어렵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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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과학웹진 사이언스온 연재코너 ‘과학뉴스 사용설명서‘. 과학을 소재로 하는 뉴스 정보의 생산, 유통, 사용을 우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방안들을 살펴보고자 하는 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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