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과 만화 [싱크 3호]

!@#… 격월간 인문 만화 잡지 ‘싱크’에 연재중인 테마 만화 칼럼. 지난 호가 나온 시점이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이 주목받던 때라서, 이쪽 소재로 갔다. 잡지 성격상, 특정 토픽을 통해서 만화를 소개하며 어떤 인문사회적 발상들로 연결해주는 것이 컨셉.

 

재앙과 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자고로 재앙에 대한 두려움은 많은 상상력, 특히 서사적 상상력의 원천이 되어주곤 했다. 자신들이 막아내기에는 도저히 역부족인 커다란 피해가 예상되거나 당장 닥치게 되었을 때, 그것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 재앙은 실제로 우리 곁에서 각종 형태로 여전히 일어날 수 있기에 충분히 현실성이 있으며, 그 양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그 양태와 원인에 대한 상상력이 개입할 여지가 크다. 그리고 얄궂게도 현대사회의 문명이 발달할수록 많은 현상들의 과학적 근간을 알게 되어 재앙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과학문명을 더욱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만큼 뭔가 잘못되어 커다란 피해가 발생할 수 있다는 두려움이 오히려 더 커지곤 한다. 지진이 일어나서 마을이 부서지는 것을 두려워하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지진파를 측정하고 내진설계를 하며 각종 구조시스템을 통해서 대비와 복구를 한다. 하지만 지진에 이은 츠나미 파도가 원자력발전소의 냉각장치를 돌리는 전력을 끊어서 방사능 누출 재앙을 일으켜 더욱 광범위한 피해를 입힐 수도 있는 세상인 것이다. 나아가 각종 예측 및 측정 능력의 발전과 함께 아직 과학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부분들이 절묘하게 섞이며, 두려움은 더욱 극대화되고 사람들 머리 속에는 더욱 파멸적 상상력이 꽃을 피운다.

재앙에 대한 상상력으로, 옛날(아니 요즈음도) 여러 사회에서는 그런 초월적 피해를 막아낼 수 있는 초월적 보호자를 상상했고, 그를 숭배하는 종교적 의식으로 자신들의 두려움을 달랬다. 그리고 한발짝 더 나아간 경우에는 재앙 자체가 바로 그런 초월적 절대자의 뜻에 거슬렀기 때문에 내려진 ‘벌’이라고 멋대로 인과관계를 상정하면서까지, 불가해하고 불가피한 대규모 피해에 대한 자신들의 두려움을 다스리고자 했다. 재앙을 극복하고자 커다란 초월적 적대자들에게 도전하는 이들에 관한 이야기는 영웅 신화가 되고, 죠셉 캠벨 같은 신화학자들이 이야기했듯 인간 성장에 관한 우화로 보편적 호소력을 만들어내곤 한다.

재앙의 상상력을 효과적으로 다루어낼 수 있는 매체라면, 만화를 빼놓을 수 없다. 파괴의 현장들을 시각적으로 생생하게 그려낼 수도 있고, 재앙의 형이상학적 함의들을 언어로 풀어내는 것도 동시에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서사만화가 상상력을 풀어내는 여러 방식 가운데에서도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재앙 이후 인간들의 대처다. 블록버스터 재앙영화들이 종종 걷는 길과 달리, 단순히 파괴의 시각적 충격에 머물기에는 서사만화로 구현하기 편한 특유의 이야기성이 아깝기 때문이다. 어떤 작품이 재앙을 중심소재로 다룬다는 것은, 급격하고 커다란 피해로 인하여 상당수의 인간들이 일상적 환경에서 일거에 쫒겨나는 모습을 담아내기에 적합하다. 단순히 재앙의 스펙타클에 함몰되기 보다는, 그 상황에 대처하며 바닥을 드러내는 사람들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를 펼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재앙이 일어나는 과정을 직접 오락화하는 경우가 딱히 드문 것은 아니다.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일본침몰]의 경우, 지진과 화산활동으로 인해 한 국가가 붕괴되어가는 과정 속에 사람들을 구출해내고자 하는 여러 모습들이 박진감 넘치게 그려진다. 하지만 파괴의 긴장감이라는 즉각적 오락성을 제외하고 나면, 관료주의에 대한 풍자라든지 적당한 인간애 같은 꽤나 표피적인 상상력에 머물기 쉽다. 그보다는, 재앙을 소재로 하는 깊이 있는 상상력의 매력이 발휘되는 것은 그 이후의 상황을 그려낼 때다.

한 쪽 부류의 작품들은 재앙 직후의 혼란에서 길을 찾아 나서는 모습을 그려낸다. [드래곤헤드]라는 작품은 열차로 수학여행을 하던 어느 고등학생 주인공들의 시점에서 갑자기 닥챠온 뭔지 모를 재앙으로 시작한다. 최종적으로 밝혀지는 그 재앙의 원인 같은 것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졌고, 모든 것이 부서졌으며, 어디든 사람들이 불안과 공포로 인해 미쳐가고 있다는 점이다. 공포에 굴복하여 미친 모습은 종종 주술적 환희와도 비슷하다. 내성적이었던 학급 동료는 어둠의 신을 상상하며 주인공들의 생명을 바치고자 달려들고, 사람들은 곳곳에서 새로운 군락을 형성하며 그 안에서 권력을 탐한다. 붕괴 이후, 어둠에 빠져드는 인간들의 개별적 모습을 묘사하는 모습이 일품인 작품이다.

이야기로서 재앙 직후 세계를 그려내는 좋은 방법은 주인공들이 어디론가 가는 ‘로드무비’ 방식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것일 수도, 무언가 이 상황을 타개할 아이템이 있는 곳으로 향할 수도, 다른 좀 더 제대로 된 생존자들이 모여산다는 (그나마) 이상향을 찾는 것일 수도 있다. 주인공들에게 목표가 있고, 길을 가는 과정에서 여러 인간군상들을 볼 수 있는 좋은 서사장치인 까닭이다. 미완의 작품인 [그의 나라]는 낯선 곳에서 겪은 원인불명의 대재앙, 집으로 돌아가고자 길을 나선 고교생 주인공 등 비슷한 요소들이 있지만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재앙 직후 세상을 통찰한다. 기독교 구약성서의 창세기, 출애굽기 등을 줄거리 속에서 절묘하게 인용하고 재해석하여, 사람들의 사회가 만들어지고 구도를 하는 과정에 대한 우화로 재탄생시킨다. 여전히 등장하는 것은 부족한 생필품을 둘러싼 탐욕과 쟁탈, 작은 집단의 욕심과 권력, 불신과 신뢰의 교차다.

로드무비가 아니라 정반대로, 한 자리에 최대한 눌러 앉아있음으로 오히려 사람 사이 관계를 탐구하는 것도 가능하다. [당신의 모든 순간]은 좀비 전염병으로 수많은 평범한 이웃 시민들이 파멸을 맞은 가상의 한국 어느 낡은 아파트촌이 주요 무대다. 대부분이 좀비가 된 세상에서, 아직 사람인 사람들이 그 속에서 나름대로 일상을 만들어가고 서로 교류하는 이야기다. 이 이야기에서는 심지어 좀비들도 그냥 괴물이 아니라, 단 하나의 생각만 남아있는 원귀에 가까운 존재들이다. 그 속에서, 이야기는 사람들이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한 가장 정서적인 해석으로 향해간다.

재앙 직후를 다루는 이런 작품들에서는 재앙의 원인은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 그저 충분히 일상의 사회적 삶이 붕괴하기만 하면 된다. 다만 사회의 어떤 특정한 건력구도를 꼬집어 풍자하고자 할 때는 다르다. 국내 미출간 상태인 만화 [최후의 남자 Y]는 어느 날 갑자기 전 세계 고등생물들의 수컷들이 한꺼번에 죽어버리는 재앙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어째서인지 유일하게 그 병에 면역이 있어서 살아남은 남자 요릭을 둘러싼 쟁탈전과 그를 지켜내는 여성주인공들의 스릴러가 펼쳐진다. 모든 남자들이 피를 토하며 죽어버리자, 세계 정치권력 구도부터 병뚜껑을 여는 일상생활까지 엄청난 공백이 발생한다. 남성 중심적 사회체제에 대한 직접적 풍자와 동시에, 결국 남성 없이도 사회질서가 빠르게 나름대로 재건되는 모습이 서늘한 통찰을 담아낸다.

그렇듯 재앙이 지난 한참 후, 인간들이 살아남는다면 결국 인간들의 사회도 다시 생겨난다. 그리고 얄궂게도 그 새로운 사회의 모습은 지금의 것과 그다지 근본적으로 크게 다를 바가 없는 경우가 많다. 작가들의 상상력의 한계라기보다는, 인간 문명의 반복되는 어리석음에 대한 통찰인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한 대표적 일본 SF만화 [아키라]는 거대한 폭발과 3차대전으로 붕괴한 후 재건된 네오 토쿄가 무대다. 여전히 정치는 관료적이고 우중정치가 보편적이며, 젊은이들의 사회불만은 갈 곳을 못 찾고 파괴적 반정부활동이나 혹은 그저 폭주족 문화로 퍼질 뿐이다. 일종의 SF화된 60년대 전공투 세대의 풍경인 것이다. 그런 혼란스럽고 무기력한 상황을 흔들어놓는 것은, 또 다른 재앙의 발생과 그에 따른 다시 한번의 생존자 사회 재편인데, 그 불안의 틈을 장악하는 것은 초능력과 종교다. 그리고 장대한 이야기의 결말에서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재앙이 일어나고(혹은 막아내고), 보다 진취적으로 나아갈 새로운 사회의 희망을 그리며 끝난다. 좀 더 구체적인 현실 디테일이라면, [에덴]이라는 작품도 주목할만하다. 각질화 전염병이 세계적으로 창궐하며 인류 멸망이 다가오고, 어떤 연구소에 있는 일종의 폐쇄 청결구역에 사는 한 소년과 소녀의 이야기로 시작하며, 그들만의 에덴동산을 보여주는 듯 시작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전염병은 인류의 10%를 죽이고 나자 비록 치료는 없지만 어느 정도 통제범위에 들어서고, 그저 사이보그 기술이 더 발달하고 국제관계가 한층 더 약육강식이 된 것으로 드러난다. 아프리카와 남미의 빈부격차와 저발전 사회상태, 내전은 더욱 살벌한 상태에서, 그저 인간은 좀 더 나은 기술로 기존의 문제들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초월적 의지에 의해, 결국 인간은 다음 단계의 진화로 나아가거나 혹은 서서히 종의 종말을 향해가는 것 사이에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사회는 여전히 계급과 수탈, 서로에 대한 폭력으로 가득하고, 재앙으로 인해 새로운 재편의 기회를 얻어도 새로운 한 걸음을 걷기는 힘겹다.

비단 위의 작품들과 비슷한 방식에 한정하지 않더라도, 좋은 재앙 만화에서는 인간 사회의 사회적 기반이 붕괴되며 사람들이 개체의 생존, 혹은 가장 원시적인 차원에서 소그룹의 생존을 위해 서로 반목한다. 그리고 그런 다툼을 통해서 현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근간, 혹은 인간의 본성에 대한 화두를 넌지시 건넨다. 다시 사회를 만들어 나가고 그것이 과연 지금의 것보다 얼마나 더 나은가 물어봄으로써 발전에 대한 교훈을 꺼낸다. 좀 더 깊게 들어가고자 홉스-루소의 사회계약론을 연상해도 좋고, 생존을 바탕으로 본성이 가다듬어져왔다는 진화심리학의 내용들을 상기해도 좋다. 잘 만들어진 재앙 만화는 그런 방향의 생각들을 자극하기 위한 좋은 디딤돌이 되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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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만화잡지 격월간 [싱크]. 이미지프레임 발간. 테마별 만화들을 소개하며 인문사회적 화두를 넌즈시 이끌어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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