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앙과 만화 [싱크 3호]

!@#… 격월간 인문 만화 잡지 ‘싱크’에 연재중인 테마 만화 칼럼. 지난 호가 나온 시점이 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등이 주목받던 때라서, 이쪽 소재로 갔다. 잡지 성격상, 특정 토픽을 통해서 만화를 소개하며 어떤 인문사회적 발상들로 연결해주는 것이 컨셉.

 

재앙과 만화

김낙호(만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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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재앙>을 보고 오다

(애니품평이지만… 그냥 카테고리는 만화품평으로 넣었다. 서찬휘님 블로그에서 트랙백.)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오다. 이후는 당연히 스포일러 주의. 아니 사실 스포일러라도 많이 보고 가는게 사실 관람에 도움이 될지도. 여하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런 폭탄맞은 시나리오라도, 미야자키 브랜드가 붙으면 히트치는구나!” -_-; 뭐랄까, 미야자키 할아버지가 늙으막에 린타로나 제리 브룩하이머 같은 화끈하고 골빈 선남선녀 대파괴 폭죽쑈에 손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capcold식 표현으로, “재앙영화”. 영화 자체가 재앙이라는 말이다.

!@#… 노장에게 새로운 것을 바라기보다 그 원숙미를 즐기라면서 호평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원숙은 커녕 자기가 쌓아올렸던 좋은 실력을 몽창 날려먹은 희대의 괴작으로 보였다. 무슨 과시욕에 사로잡힌 얼치기 신인 초짜 감독 마냥, 세계관도 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스펙타클 이벤트에 끌려다니기 바쁘다. 이건 유치한게 아니라, 그냥 골빈 거다. 작품 속에서, 마법의 힘을 제거당하고 치매 할멈의 모습으로 폭삭 찌그러져버린 황야의 마녀 – 그것이야말로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재미있게 보았다는 분들을 비난할 생각은 아니다. 뭐 나름대로 다들 이유가 있겠지. 그 중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을테고, 그냥 미야자키니까 하면서 부화뇌동하는 자기사고 제로의 바보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왜 이걸 재앙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를 좀 해놓고 싶다. 시나리오의 뭐가 그리 노골적으로 불만이라는 것인가? 딱 3가지만 정리해보자.

1) 주인공의 갈등과 성장은 밥말아 먹었는가: <마녀의 택급편>에서 보여준 소녀의 섬세한 성장과정. 그 마법은 이 영화에서는 완전소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게 걸린 ‘늙는 저주’는 결국 마음의 활력을 반영한다. 마음이 소녀적인 활력과 사랑에 눈뜰 때, 그리고 무덤덤한 자기비하를 잊어버리고 잠을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소녀로 돌아오는 소피. 이건 꽤 중요한 모티브이며, 작품을 끌어가는 갈등이자 원동력이 되어주었어야 할 물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과 희생을 치루며 결국 새로운 성장을 이루면서 끝나는 기승전결을 완전히 무시. 그냥 하울만 기다리고 쫒아다니다 보니 어느틈에 저주는 해결. 뜬금없음의 극치인 것이, 거의 원더풀데이즈 급이다. 동기 없이 돌아다니기는 하울 역시 대동소이하지만 말이다. 전쟁 중재? 양쪽의 정치인들을 만나가면서 설전을 벌이거나, 혹은 그걸 두려워서 피하거나. 그냥 흐린 하늘을 날라다니면서 곡예쑈한다고 뭘 해결한다는 건가. 주인공들의 성장은 설정상 주어진 것일 뿐, 시나리오 상에서의 설득 과정이 뭉텅 빠져있다.

2) 세계관도 설명 못하면서 뭘 그리 벌려놓는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전쟁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욕망, 그리고 박애 넘치는 해결과정을 방대한 세계관과 함께 자연스럽게 전달해낸다. <하울...>은 도저히 같은 감독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울에서 전쟁을 한다는 그 양쪽 나라의 논리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일반인/정치가/마법사/정령/악마 등 여러 종족과 계층들의 관계 역시 얼렁뚱땅 설명 없이 넘어간다. 설명 없어도 이해할 만한 거라면 좋겠지만, 스토리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건너뛰는 것이다. 그래서 칼시퍼가 하울에게 들어가게 된 과거 회상에서 애초에 왜 칼시퍼가 지상으로 소환당했는지, 어째서 그 합체의 과정 속에서 하울은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하다못해 그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뭔지(그냥 힘쓰다보면 괴물로 변한다는 거 말고, 제대로 된 ‘규칙’말이다) 모두 생략. 그렇기 때문에 후반에 들어가서는 모든 스토리 전개의 논리가 급격하게 붕괴된다. 전반에 세계관 구축을 하고 후반에 그 속에서 사건들이 벌어지고 수습되는 구조여야 할 것이, 세계관 구축도 안된 상태에서 사건만 뜬금없이 계속 연속되다보니 망가지는 것이다. 덕분에 소피는 ‘쓸데없이’ 성을 무너트렸다가 다시 세우고,  하울은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고생하고 다닌다. <하울...>에서는 스토리 전개 자체에 매우 중요한 세계관 설명이 뭉텅이로 빠졌다. 불친절한 시나리오와 멍청한 시나리오는 한끝 차이다; 유감스럽게도 <하울...>은 후자다. 원작 소설을 찾아읽어보라고? 제대로 된 시나리오 각색에 실패했다는 시인이겠지. 여튼, <하울...>의 시나리오는 작품 속 세계의 구동 원리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에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고, 그 덕분에 결국 남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표 ‘코드’들 뿐이다. 날라다니다가 추락할 때 손을 잡아준다든지, 자연 평원과 기계 무기의 대립된 이미지라든지, 고풍스러운 환타지 비행선들의 공중전이라든지 말이다. 각각 그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일 지라도, 통합된 추동력 없이는 키치처럼 보일 뿐이다. <온 유어 마크>에서 무려 6분 만에 모든 세계관을 다 표현하고도 여유가 남아서 복합 선택형 스토리구조까지 도입한 천재감독은 도대체 어디로 간건가?

3)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은 디자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보여준 환타지 캐릭터들의 활기찬 생명력도 모두 소멸. 그냥 처진 눈에 분주하게 제자리를 돌기만 할 뿐인 개는 아무 매력이 없다. 그냥 쫒아다니면서 가끔 도움을 주기만 하는 허수아비도 마찬가지다. 갈등도 뭣도 없는 꼬마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뭐랄까, 마치 <포카혼타스> 이후로 점점 망가져 가던 디즈니 클래식의 동물조연들을 보고 있는 느낌. 그 난잡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조차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임무와 역할과 상징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거신병 같은 초절정 사연만땅 조연 캐릭터는 다시 만나기 힘든 것인가. 개연성 없는 주연 캐릭터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패스.

!@#… 지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이래도 나를 추종할래?” 라는 도발이다. 출중한 이야기꾼으로 자기 입지를 확보해온 지브리, 그중에서도 미야자키 감독이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너따위가 뭔데 대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씹는거냐?”라고 항의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런 대 감독이, 나 따위한테도 씹힐만한 시나리오를 들고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 만약 쓸데없는 전쟁 이야기가 빠지고 마법사들끼리의 세력/파벌 다툼이 중요한 축으로 다루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럼 황야의 마녀도 선생님도 그렇게 낭비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소피가 자신의 저주를 푸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소피의 자기희생과 진정한 성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 정도는 구경할 수 있었을테지. 하울과 캘시퍼의 운명공동체적 애증관계가 좀더 잘 묘사되었더라면?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니 어쩔 수 없이 정들어버렸으면서도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묘한 긴장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만약, 만약, 만약… 좀 더 낳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프로젝트에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이런 물건이 탄생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 뭐,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래서는 “이번 것이 진짜 은퇴작이었습니다”라는 선언은 못할 것이다. 어서 설욕작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 막판에 치매성 졸작으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한 감독으로 대대로 기억당할테니까. 이것이 바로 나름대로 <하울...>의 의의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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