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신화적 상상력 – 암흑신화 [기획회의 307호]

!@#… 사실 제목만큼 암흑스럽지는 않다(모로호시 다이지로 기준에서).

 

파멸의 신화적 상상력 – [암흑신화]

김낙호(만화연구가)

신이 실재하든 어떻든 간에, 최소한 인간이 바라보는 신의 모습은 주로 각종 자연현상을 매개로 형성된 경우가 많다. 그런데 그 자연은 결코 단순하지 않아서, 때로는 햇살과 풍요라는 무한한 사랑을 가져다주는 듯하다가도 어떤 경우는 파괴와 멸망을 가져온다. 초월적 이능이라는 것에는 초월적 사랑을 담을 수도 있겠지만, 도대체 인간의 이해와 힘으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재해와 죽음 같은 것이 더 어울리기도 한다. 자연에 나타나는 엄청난 풍요에 경탄하기 위해서는 많은 믿음과 노력이 필요하지만, 나를 넘어선 범위의 파괴는 금방 이해할 수 있다. 잔학한 신, 불운을 가지고 오는 존재로서의 신을 납득하는 것은 공포에 대한 목격이면 꽤 충분하다. 적어도 기본 교리로서는 박애가 핵심에 놓여있는 기독교조차, 구약성서에 묘사되는 신은 자기 신도 이외에 대해서는 재앙 그 자체로 그려진다. 신화적 상상력에서라면, 잔인한 초월자가 훨씬 직관적이다.

[암흑신화](모로호시 다이지로 / 미우)는 일본 고대설화를 중심으로 힌두교 등 여러 종교들의 신화들을 하나의 어둡고 잔학한 원류로 묶어낸 작품이다. 작품은 애초에 하나의 초월적 진실이 있고, 그것을 각 민족들이 자신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전한 것이 여러 종교 신화로 발전한 것이라는 가정 위에 펼쳐진다. 운명의 표식을 지닌 타케시라는 소년이 주인공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을 규명하기 위해 추적자들을 따돌리고 탐험가와 함께 고대 유적들을 찾아나서며 신화의 조각들 속에서 조금씩 커다랗고 잔인한 운명의 굴레를 깨닫는 줄거리인데, 서사적 재미 자체보다는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세계관이 핵심이다. 추적이 중심이 되는 스릴러로 즐기기에는 당기고 빼는 긴장감이 부족하고, 단서의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쾌감이 중심이 되는 퍼즐로 즐기기에는 단서 자체가 지나치게 폭이 넓고 낯설다. 게다가 극의 전개로만 보자면 잔뜩 각종 설정들이 드러나자마자 작품이 캐릭터들 사이의 갈등 고조와 해소를 향해 진행되기 보다는 숙명론적 결말로 한걸음만에 도달해버린다. 이렇듯 서사물로서는 부족해 보이는 지점이 많지만, 작가가 세계관을 풀어내는 기이한 재담으로 시선을 돌리면 왜 70년대에 나온 이 작품이 향후 수많은 작품들에 큰 영향을 주며 고전으로 꼽히고 있는지 공감하기 시작하게 된다.

여러 종교, 신화의 원류가 비슷한 공통된 정서나 사건에서 비롯되고 그것의 표현 형태가 여러 방식으로 분화되었다는 인식은 비교종교학이나 문화인류학, 나아가 융 같은 정신분석 계열에서도 오랜 테마다. 하지만 그런 인식을 효과적으로 대중문화의 소재로 만들어내는 것은 이 작품 이전에는 그리 흔하지 않았다. 인간 문화의 근본이나 패턴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합친 더 큰 신화로 만들어내서 음모론의 세계를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약간의 내용 미리나름을 하자면, [암흑신화]에서 모든 신화들의 바탕에 놓인 것은 힌두교에서 아트만이라고 부르는 존재다. 생명의 인격적 원리를 나타내는데, 그의 절대적 권능의 일부가 흔히 ‘말머리 성운’이라고 불리우는 암흑성운이다. 그렇기에 여러 나라의 각종 신화에는 말의 머리를 한 초월적 존재들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우주의 원리는 필연적 파멸로 이어지기에 주로 불길한 형태로 나타난다. 즉 생명이라는 빛에는 파멸이라는 그림자가 늘 함께하고, 아트만의 권능에는 늘 파괴와 재앙의 숙명이 함께한다. 말 머리라는 시각적 장치를 매개로 해서 여러 신화들은 하나의 시나리오로 묶이고, 알에서 사람이 태어나는 것이라든지 이세계로 통하는 문이라든지 하는 장치들은 낭만적이거나 웅장한 신화적 상상보다는 숙명적 파멸을 담아내는 현실로서 묘사된다. 그 스케일은 일개 지역, 일개 나라의 숙명이 아니라 전우주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세계관의 비밀이 하나씩 밝혀지며 점점 스케일이 커지는 압도감으로 독자들을 매료시키는 전개방식을 취한다. 신화를 음모론으로 엮으며 예정된 파멸로 전개한 이런 방식은 이후 [공작왕], [3×3아이즈], [신세기 에반게리온] 등 일본 만화/애니 장르의 세밀한 세계관에 기반한 여러 대형 히트작에서 더욱 주류화된 바 있다.

초월적 힘은 초월적 파멸과 붙어있다. 그런 파멸은 예정되어 있고, 파고 들면 파고 들수록 규모가 전우주적이며 절대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자신에게 엄청난 초월적 능력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무슨 슈퍼히어로가 아니라 잔학한 파멸의 열쇠라면 어떨까. 어떻게 생각하자면 결투와 우정과 모험으로 가득한 비장하고도 호쾌한 소년만화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암흑신화]는 실제로 ‘소년점프’라는 일본의 주류 소년만화잡지 연재작임에도 불구하고, 그런 깨달음의 과정이 주는 재담의 상상력으로만 밀어붙인다. 이렇다보니 해피엔딩도 비극적 카타르시스도 아닌 기담형 열린 결말이 오히려 가장 적절하다. 주인공 다케시 소년은 ‘승리’가 아닌 절대적 고독과 희생을 선택한다. 그와 함께 했던 노인 탐험가는 아트만-다케시의 선택과 함께, 알 속으로 들어가 스스로를 봉인한다. 파멸은 숙명이지만, 자신의 절대적 권능의 운명을 받아들인 자의 숭고한 의지의 선택으로 인류는 구원을 얻는다. 결국 멸망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세계관의 거대한 스케일감을 유지하는 것은 집요한 디테일이다. 참조서적을 많이 목록에 올려놨다고 해서 디테일이라는 것이 생겨난다기보다, 어떻게든 단서들을 유사한 패턴으로 합쳐 넣는 집요함이 핵심이다. 옛 중국 민화들이나 일본 벽화들에서 신화나 요괴를 묘사할 때 보이는 기이하게 변형된 형상들을 떠올리게 하는 그림체로, 말 머리나 뱀 같은 테마를 최대한 여러 장면에서 유사한 형식으로 반복해서 등장시킨다. 등장인물들의 죽음도 신화적 모티브의 사망방식으로 그려 넣어 신화와 현실, 과거와 현재 미래의 경계선을 흐린다. 그렇다고 디테일 자체에 집착하여 그 효과를 과장하고 큰 그림을 보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아니라, 큰 그림을 정당화하기 위한 단서로서 디테일을 흘려놓는 식이다. 결과적으로 등장인물들이 말로 서로에게 설명하는 것 이상으로, 독자들이 먼저 그 세계를 납득하게 유도한다.

작가의 전체 작품세계를 놓고 볼 때, [암흑신화]는 분명 정점에 있는 작품은 아니다. 세계를 설명하는 방식은 [사가판 조류도감] 같이 노골적으로 산해경을 연상시킬 작품에서 더욱 완성되었고, 신화의 재해석에 서사적 재미까지 결합시킨 [서유요원전]도 있다. 뜬금없는 상상력을 아예 유머로 완성시킨 [시오리와 시미코] 연작도 재미나 완성도가 더 높다. 하지만 작가 특유의 신화의 파멸적 상상력이라는 굵은 주제를 본격적으로 정립한 고전을 찾아 읽는 것은 독특한 매력이 있다.

암흑신화
모로호시 다이지로 지음/미우(대원씨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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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배트맨: 롱 할로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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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확실히 한국은 요즘 모로호시 열풍. 30여년전 책이지만 아직도 계속 화제가 되며 신화가 된 이유는? RT @capcold: [캡콜닷넷업뎃] 파멸의 신화적 상상력 – '암흑신화' http://t.co/mZAOsket | 지난호 기획회의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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