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렇게도 그림을 빽빽하게 채워넣는데도 이렇게도 장면장면이 여백으로 가득한 느낌을 주는 작가는 참 드물다.
서로의 일상이 되는 과정, 연애 – [선생님의 가방]
김낙호(만화연구가)
문예적 감성이라고 하면 어렴풋하게 많은 이들이 어떤 것을 떠올리곤 하지만, 그것이 과연 무엇인가 명확하게 규정하는 것은 그다지 쉽지 않다. 검증된 오락성을 코드로서 극대화하는 장르적 재미와는 반대편에 있는 듯 해도, 그렇다고 완전히 전위적인 실험성과도 또 다른 무엇이기 때문이다. 뚜렷한 경계선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차이일까 꽤 오랫동안 궁리해온 결과 개인적으로 내린 결론은, 어떤 작품이 문예적 감성이 강하다는 것은 사색을 유도하는 여백에 있다는 것을 지칭한다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해당 장르의 독자층에게 있어서 철저하게 대중성을 검증받은 일련의 줄거리 전달을 극대화하는 효율성으로 가득한 장르오락의 지향과 다르다. 그리고 감각적 충격을 극대화하는 전위예술 지향과도 다르다. 완전한 몰입보다는 적절한 거리감을 만들며 일정한 관조를 만드는 서사 전개와 표현 방식들을 통해서, 남의 이야기를 훔쳐보고 있음에도 자연스레 자신의 생각과 서정을 돌아보도록 자극하는 접근 말이다.
만화라고 하면 대체로 장르오락 지향의 작품들을 먼저 떠올리기 쉽고 실제로 가장 인기 있는 작품들이 고전이든 현재 만들어지는 것이든 대체로 그 쪽 범주에 들지만, 당연하게도 문예적 감성이 충만한 작품들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 줄거리와 사건들은 작품의 구심점을 위한 설정 정도의 자리로 물러나고, 독서의 핵심은 주인공들의 섬세한 감정 변화 과정에 대한 관조적 관찰, 그리고 그 거리에서 생기는 여백만큼 사색을 채우는 것이 된다. 그런 교과서적인 사례가 바로 [선생님의 가방](다니구치 지로 / 가와카미 히로미 원작 / 오주원 옮김 / 세미콜론)이다.
따지고 보면 이야기 자체는 꽤 자극적으로 포장할 구석이 있다. 30대 중반 여성이 한 때 자신의 학교 선생님이었던 60대 노인을 오랜만에 우연히 다시 마주쳤는데, 술친구로서 계속 어울리다보니 취향도 상당히 서로 잘 맞고 해서 연애하게 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만약 장르오락으로서 접근한다면, 질투와 편견과 부도덕이 가득 찬 끈적한 롤러코스터 로맨스로 재단하기 딱 좋다. 아니면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류의 소설들처럼 일탈적 연애에서 삶의 에너지를 충전 받는 판타지로 꾸미기에도 적합하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보다 훨씬 문예적 감성에 집중하는 쪽을 택한다. 두 사람의 연애 과정은 불타오르는 열정이 아니라 그저 담담하고 일상적으로, 같은 동네에서 비슷한 술집 취향 때문에 동선이 어쩌다가 겹치는 식이다. 서로에 대한 감정이 커지는 과정은 번민과 질투보다는, 불편한 일이 있었다면 한동안 서로 얼굴을 마주치지 않게 되면서 그저 서서히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과정일 따름이다. 서로에게 자신을 결코 강요하지 않고, 좀 더 함께 있는 경험이 축적되어간다.
앞서 언급했듯, 두 주인공이 얼마나 열렬하게 서로를 사모하는지는 크게 중요하게 부각되지 않는다. 필연적으로 한쪽이 먼저 연로하여 세상을 뜰 것이라는 설정조차, 섣부른 신파의 소재로 사용되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들의 드라마가 아니라, 감정이 쌓여가는 느리고 꾸준한 과정이 중심일 따름이다. 급작스럽게 도약하지도, 전지적 해설로 눙치지도 않고, 그저 일상의 단면들을 조금씩 조금씩 더해나간다. 그렇기에 연애는 특별한 일생일대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의 일상이 되어가는 과정이다.
두 사람을 이어주는 가장 주된 매개체는 바로 동네 선술집의 술과 안주다. 혼자 와서 차분하게 자신들의 취향대로 먹고 가는 두 개인들이, 동선이 겹치면서 함께 무언가를 고르고 서로에게 추천한다. 좀 더 많은 것을 고르고, 더 여러 가게 또는 기타 함께 술을 나누는 공간을 거치면서 그만큼 서로의 간격이 좁아진다. 하지만 그것은 거나한 취기 속에 묻어나오는 끈적한 솔직함이 아니라, 좀 더 마음을 풀고 서로의 존재를 편안해하는 과정이다. 자신과 비슷한 연배의 다른 남자가 던지는 추파를 사양하고 결국 노신사를 선택하는 것은, 결국 상대에게 받는 열정적 애정보다는 그 담담한 편안함에 끌렸기 때문이다. 자신을 대등하게 존중하며, 이끌고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함께 무언가를 쌓아갈 수 있는 그런 종류의 사랑이다. 그것이 바로 칵테일 바에서 자신에게 고백하는 동창 남자와 마시던 번듯한 양주와, 선술집에서 그냥 띄엄띄엄 일상적 대화 속에 마시던 술과 소박한 안주의 차이로 나타난다. 그런 먹고 마시는 것의 쌓여가는 종류와 차이 속에서, 감정선도 자연스럽게 전달된다.
다니자키 준이치로 문학상을 수상한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각색한 작품이지만, 연출과 전개방식, 특히 공간과 사람을 버무리는 방식은 만화가 다니구치 지로의 색깔이 매우 뚜렷하게 각인되어 있다. 작가의 다른 작품 [고독한 미식가]에서도 대단히 효과적으로 보여준 음식을 먹음으로 삶을 표현하는 현대인의 모습은 이 작품에서 한층 더 빛을 발한다. 음식을 주인공으로 만드는 요리만화가 아니기에, 클로즈업되는 것은 음식이 아니라 음식을 먹고 있는 사람의 표정과 손짓이다. 그리고 그 표정과 손짓이란, 음식에 대한 감정이 아니라, 함께 먹는 이에 대한 감정을 담아낸다. 무덤덤해 보이는 표정 속에 복합적 감정을 슬쩍 암시하는 그림체 역시 이런 부분을 한층 잘 살려낸다.
공간 또한 마찬가지다. 사람의 배경에 공간을 채워 넣기 보다는 세밀하고 커다란 공간 묘사 안에 사람을 집어넣는 방식을 즐기는 작가 특유의 접근법은, 공간을 감정 묘사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홀로 걷는 골목길, 함께 들어간 선술집, 마치 서로에 대해 느껴가는 편안함을 그대로 세상에 꺼낸 듯한 버섯 채취 산행길, 온천 여관까지, 두 사람의 연애는 그것이 이뤄지는 공간과 밀접하게 달라붙는다. 나아가 주관적 몰입보다는 공간을 훔쳐보는 듯한 관조의 정서를 한층 키우는 느낌도 강하다. 세밀하게 가득 찬 공간 묘사가 오히려 인물들에 대하여 한층 ‘여백’을 가지고 바라보게 만드는 묘한 역설적 효과다.
탄탄한 원작, 갈고 닦은 연출과 표현으로 전달되는 두 사람의 연애 이야기는 과연 무엇을 남기는가. 사회적 편견에 대한 어떤 교훈을 내세우는 것도 아니고, 그들의 사랑에 감동하며 대리만족을 느끼라는 압력도 딱히 노골적으로 드러날 구석이 없다. 마지막 에필로그의 일화처럼, 감정의 폭발도 사무적인 토론도 아니라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일상의 소중함, 그런 대단할 것 없는 빛나는 순간들에 대한 아련함을 독자들도 각자 돌아보도록 하는 것이 아닐까. 혹은 연애라는 것, 일상이라는 것에 대해 이런 궁리를 자연스레 한 번 더 해보도록 하는 것 자체가 남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의 가방 1 다니구치 지로 글.그림, 오주원 옮김, 가와카미 히로미 원작/세미콜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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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과학이 된 무모한 도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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