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기획회의 300호 특집 커버스토리 ‘한국의 저자 300인‘ 가운데 한 꼭지로, 만화분야에서 저자의 흐름에 대한 글. 여기 언급된 모든 이들이 300인에 포함된 것은 아니며, 이 글이나 300인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해서 딱히 덜 훌륭한 저자라는 것도 물론 아니다 – 다만 어떤 특성을 가장 편하게 대표할 수 있다는 정도로 이해하면 되겠다(실제로 잡지에 실린 글만 해도 중간조율과정에서 여기 공개하는 첫 기고본보다 두어명이 줄어들었다). 여튼 격주간인데도 결간 한 번 없고 꾸준히 우수한 품질로 300호까지 달려온 출판전문지의 300호 위업을 진심으로 축하하며, c모 스스로도 그 중 적지 않은 기간동안 종종 마감오버에도 불구하고 그나마 펑크는 내지 않아서 그런지 용하게도 잘리지 않고 꼬박꼬박 서평 연재를 이어온 점을 자축.
만화 저자의 어제, 오늘, 어쩌면 내일
김낙호(만화연구가)
만화의 저자는 어떤 이들인가. 주요 작가들의 계보론을 읊을 수도 있겠지만, 학술적 관심이나 격심한 “팬심”을 충족하려는 것이 아니라면 그다지 읽을 의미가 없다. 저자에 대해 이야기한다면서 한국만화 흐름 전반을 이야기하는 것도 다소 과도한 일이다. 그보다는 역시, 만화에서 저자의 역할이 어떤 식으로 변해왔으며, 현재 주목받고 있는 주요 저자들을 통해서 만화 저작의 주목할 만한 경향들을 살펴보는 것이 가장 적합할 듯하다.
어제
현대 한국어 출판문화의 초창기부터, 만화 분야에서 저자의 위상은 여러 방향으로 전개되어왔다. 해방 후 폭발한 한국어출판물 붐 속에서 한쪽으로는 언론인의 위상을 지닌 시사만화가들이 잡지를 만들었고, 다른 쪽으로는 조악한 품질의 좌판용 팜플렛식 책자로 된 ‘떼기 만화’로 서브컬쳐의 길을 걸었다. 그리고 가게에 들어가서 만화를 빌려 읽는 형식인 만화방이 50년대 말부터 시작되어 폭발적으로 호응을 얻자, 또다시 만화 저자의 위상은 변했다. 처음에는 양만 채워준다면 어떤 장르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다양성을 얻었다가, 이내 출판/유통사의 의뢰에 따라서 기계적으로 작품 수를 채워 넣는 하도급 납품업자가 되었던 것이다. 만화의 주류는 역시 대중예술의 일부인 만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저자와 공산품을 만드는 저자라는 갈림길은 이렇듯 일찍부터 형성되었다.
고우영의 일간스포츠 연재작 [일지매]를 계기로 신문 연재 장편만화가 꽃을 피우기 시작하며 성인 취향의 해학적 대중서사를 만들어내는 역할이 만화의 저자에게 부여되었다. 소년소녀잡지들은 만화방 초기부터 등장했던 명랑만화 장르를 더욱 완숙시켰고, “어린이의 벗”으로서의 만화 저자라는 위상을 정립했다. 만화를 게재하는 잡지의 증가와 함께, [공포의 외인구단]을 계기로 만개한 80년대의 만화방용 성인극화 붐은 본격적인 저자 브랜드화를 가져왔다. 이현세, 허영만, 박봉성, 이재학 등의 이름을 저자로 명시하되, 실은 영화 제작과 유사할 정도로 분업화된 프로덕션 시스템에서 저술 작업이 이루어지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유명 만화가를 우두머리로 하는 대형 스튜디오(‘화실’)는 스토리 담당, 콘티, 데생(밑그림), 잉크 입히기, 배경그림 등 분업화된 공정으로 이루어지며, 심지어 해당 유명 만화가가 직접 참여하는 A팀과 한 번 훑어보는듯 마는듯 지나가기만 하는 B팀으로 나누었을 정도다. 하지만 하나의 프로덕션은 대량으로 작품을 쏟아내기는 하더라도 비슷한 분위기와 내용의 작품들이었기에, “박봉성만화”, “이재학만화”라는 식으로 독자들에게 브랜드 인지도를 얻을 수 있었다. 브랜드 시스템은 만화방이라는 대여중심 유통망을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했고, 출판 시장 일반과의 교차점은 상대적으로 적었다.
하지만 여전히 만화방 시스템이 확고하고 당국에 의한 검열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80년대를 거쳐오면서 오히려 자의식을 다지고 나선 ‘작가주의’ 성향 작품들이 발표되기 시작했다. 잡지 [만화광장]은 80년대 특유의 욕망이 넘치고 좌절은 은폐된 사회를 리얼리즘 터치로 그려내는 장/단편들을 계속 실어주었다. 민중문화 운동의 일환으로, 다소 계몽적이지만 현실참여 의지가 넘치는 풍자만화들이 등장했다. 언론인, 오락물 납품업자, 어린이의 벗, 프로덕션 공장장에 이어, 도피적 오락물이 아닌 현실과 호흡하는 ‘문예인’으로서의 위상이 더해진 것이다(물론 그런 저자들이 그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경향으로 돋보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그리고 80년대말-90년대초 일본만화 정식 개방은 물론, 독자 판매용 단행본이라는 만화 유통경로가 커지면서, 보다 완성도 높은 오락성을 구비한 새로운 감수성으로 무장한 세대의 저자들이 등장했고, 대중문화의 젊은 성공적 스타로서의 작가들이 한 쪽에서 새롭게 부각되었다.
그런데 90년대 말에서 현재에 이르는 기간 동안에는, 만화라는 매체의 기반에서 한층 급격한 변화들이 일어났다. 먼저, 비슷한 시기에 연달아 터진 ‘일진회’ 사건과 IMF구제금융 사건이 있었다. 학원폭력의 원인을 만화에 돌린 일진회 사건은 청소년보호법의 명목 아래 심의와 유통규제를 옥죄었고,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 [누들누드], [기생이야기], [수국아리랑] 등 작가주의 성향이 강한 저자들이 터전으로 삼았던 성인만화잡지들이 말라버리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IMF구제금융은 퇴직당한 이들에게 소규모 자영업 창업을 권장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그 결과 체인형 만화대여점이 늘어나고, 대형 만화출판사들은 이쪽을 안전한 소매시장으로 삼으며 주로 일본만화 수입 또는 다시 프로덕션 시스템에 의존하는 다품종 전략에 집중하여 그간 가꾸었던 단행본 시장을 왜곡시켰다. 연재지면의 부실화 속에서 주류 장르만화 저자들은 작품을 안정적으로 완성시키고 시장에서 성공시킬 수 있는 조건이 흔들렸다. 여기에 구원타자가 될 듯 했던 온라인 만화방은, 기존 성인 에로물과 무협을 제외하고는 큰 상업적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 돌파구가 생긴 것은 00년대 초중반에 들어선 이후인테, 다시금 새로운 저자의 역할이 생겼다. 한쪽으로는 새로운 출판사들의 시도에 힘입어 ‘고급’ 단행본, 즉 만듦새를 신경 써서 제작하며 지나치게 장편으로 가지 않는 등 소장성이 높아진 책이 다시 부각되었다. 또한 온라인만화방의 실패와 달리, 개인사이트 연재와 포털서비스에서 제공한 연재지면을 활용한 만화들이 ‘웹툰’이라는 이름으로 대중적 인기 가도를 달렸다. 90년대에 보다 다양하게 발전한 만화를 보며 이제 데뷔한 새로운 작가군, 만화학과 설립붐 속에 등장한 졸업생 작가들, 웹이라는 형식을 통해 그림 연수보다 입담꾼으로서 독자들과 호흡하는 것에 강한 작가들, 만화에 대한 줄어든 편견을 업고 보다 진지한 예술적 혹은 학문적 시도를 하려는 이들, 이전 시대부터 활동했으나 새로운 독자문화와 또다시 접속하고자 적응을 꾀한 이들 등 여러 접근이 생겨났다.
오늘
이런 배경이 바로 오늘날 주목할 만한 몇 가지 만화 저자들의 방향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먼저, 이전 시대에 통했던 성공적 만화의 조건들을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키고자 하는 저자들의 방향성이 있다. 90년대에 소년만화로 히트를 친 후 현재 포털 연재 장편 웹툰으로 다시 호응을 부르고 있는 윤태호, 이충호 등도 좋은 사례지만, 본래의 스타일을 강하게 간직하면서도 통한다는 점에서 [식객], [말에서 내리지 않는 무사]의 허영만 작가가 특히 돋보인다. 선 굵은 장편 극화, 전문 소재를 바탕으로 하는 인간드라마 등에서 지녔던 본래의 강점을, 온라인 연재와 종이단행본 양쪽에서 고루 뿜어내어 성공시키고 있다. 기억해보면 허영만 작가는 데뷔 이래로 늘 당대의 주류 만화 환경에 더해진 새로운 요소에 끊임없이 잘 적응하며 히트작을 내왔기 때문에(90년대 소년/청년만화에서는 [비트], 심지어 00년 무렵 ‘에세이툰’의 범람 속에서는 [사랑해]까지), 상당히 특수한 경우로 볼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생각해온 인기만화가로서의 만화 저자다.
지식 만화라는 가능성을 증명하는 만화 저자는 인문 교양의 김태권 작가가 대표적이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계기로, 현대의 외교 갈등과 수탈구조 등을 중세사를 통해서 예리하게 지적하는 [십자군 이야기]로 주목을 받았고, 그 후 비판적 경제학 [돌아온 어린왕자], 보다 본격적인 역사서 [한나라 이야기]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다. 보다 매니악한 대중문화 패러디를 구사하면서 사회적 사안들의 복잡한 엮임을 들춰내는 굽시니스트 작가 또한 이쪽 방향에서 주목할 만하다. [본격2차대전만화], [본격시사인만화]등을 통해서 대중문화 취향이 강한 인터넷 커뮤니티들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반영하면서도, 굵은 소재들을 가볍지 않게 풀어낸다. 지적 만담꾼으로서의 만화 저자인 셈이다.
또 하나의 흐름은 가벼운 농담, 헐렁한 감성의 그림, 비틀려있되 골치 아프지 않은 유머, 절묘한 공감대 등으로 독자들에게 재담꾼 역할을 하는 저자다. 이런 흐름의 초기부터 주목받은 이들 중 하나는 이우일 작가인데, 낙서체 그림과 신랄하되 공감가는 내용을 담는 [도날드닭] 시리즈, [우일우화] 등으로 인기를 모았다. 동시에 삽화가로서 [노빈손] 연작 등을 히트시키며 한층 정제된 모습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일상의 에피소드들을 촌극으로 꾸민 (유사)자전적 시트콤인 [낢이 사는 방법]의 서나래 작가는 인간관계에 대한 미묘한 디테일에서 최대한의 유쾌한 공감대를 뽑아내는 것이 강점이다. 하지만 농담 계열로 오늘날 가장 큰 대중적 인기를 누리고 있는 작가를 꼽으라면 아마도 [마음의 소리]의 조석 작가를 꼽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초기의 사연 개그, 말장난에서 오가는 오해 개그, 그리고 현재의 시각적 만담 개그까지, 패러디의 경우처럼 특정 문화코드를 요구하지 않으면서도 기발한 웃음의 코드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에 넓은 호소력을 자랑한다. 이런 계열의 작품들은 유머에세이 같은 방식으로 출판물로서도 고정 수요가 일정 정도 존재한다.
그리고 동시대 사회의 여러 가지 복잡한 상황들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며 선 굵은 이야기를 풀어내는 방향성의 저자들, 즉 문학으로 치자면 ‘문예적’ 작가주의에 가까운 이들도 당연히 주목할 만하다. 우선 리얼리즘적 접근에 가깝게 현실의 갑갑함, 그 속에 중층적으로 쌓인 물고 물리는 갈등과 문제 지점들을 노골적 일상으로 보여주는 최규석 작가를 들 수 있다. [울기에는 좀 애매한]에 등장하는 만화과 입시 준비생들의 세계는 청춘의 달달함이 아니라, 별 볼 일 없는 미래와 당장의 학원비를 고민하는 곳이다. [습지생태보고서], [대한민국 원주민] 역시 물질적 조건의 문제, 현존하는 사회 계급성이 빠지지 않는다. 혹은 사회적 현실을 직시하면서도, 그것을 수많은 사람들 사이에 겹쳐지는 인연의 모습으로 풀어나가는 접근도 있다. 웹툰 계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경우이며 지금까지 모든 작품들이 영상화 판권계약을 할 정도로 지명도 높은, 강풀 작가다. 다루는 소재는 시간을 다루는 초능력자들의 모험, 아파트 귀신, 광주 민주화 항쟁, 노인들의 연애, 좀비 등 다양하지만, 항상 기본 뼈대는 각자의 사연과 생활을 지닌 여러 주인공들이 서로의 동선이 겹쳐나가는 것이다. 그 바탕에는 이주노동자, 동네 “바보”, 노인 복지, 도시 속 소외, 역사적 부채의식 등 현실 사회의 문제들이 듬뿍 발라져 있다. 혹은 현실사회라는 소재를 직시하기 위해 꼭 딱딱해짐을 감수할 필요도 없다. 주호민 작가는 [짬]을 통해서 무용담이나 전우애로 미화되지도, 지옥의 단면을 보여주지도 않지만 충분히 모순 투성이인 군대 이야기를 유머러스하게 해내는 것에 성공했다. 그리고 그저 개인 경험담을 재미있게 풀어내는 정도의 재주가 아니라는 것을, 속칭 ‘88만원세대’라고 낙인찍힌 00년대의 20대들의 구직 활동기를 그려낸 [무한동력]에서 증명했다. 현실사회에 대한 직시, 동시대적 호흡, 그것을 아우르는 만화적(!) 상상력을 더욱 숙성시킨 것은 [신과 함께]인데, 여기서는 민속신앙의 저승차사들과 사후세계를 현대화하여 인간적 사연들, 이승세계의 비인간적 모습들을 적절한 따뜻함과 유머로 그려낸다. 이 방향의 저자들은 서사만화로서의 재미는 물론, 만화가 담아낼 수 있는 사회적 진지함을 겸비하며 만화계 내외에서 작품 발표 때마다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어쩌면) 내일
만화에서 저자의 모습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 아마도 출판 일반과 마찬가지로, 자가 출판과 디지털책의 성장 속에서 보다 많고 다양한 이들이 한층 낮아진 데뷔의 문턱을 넘어 독자들과 만날 것이고, 저자-독자의 경계에 있는 회색지대가 넓어질 것이다. 또한 그런 상황에서 보다 뚜렷하게 주목을 받을 수 있을 인재를 골라내고 작품을 관리하도록 돕는 작가 매니지먼트 또한 더욱 발달할 수 있다. 서사극만화 저자 말고 다른 매체에서도 쉽게 응용할 수 있는 만화언어 자체에 능숙한 이들이 또 한 가지 저자의 위상으로 자리잡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만화 저자’의 방향성은 지금보다 더욱 다양해지면 다양해졌지, 결고 더 좁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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