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딱 밀어붙이려다가는 오히려 더욱 오래 걸리고 좌충우돌하는 것이 바로 어느 정도 민주제가 발달한 사회의 특징이다. 지난한 섬세한 계획과 머리 빠지는 조율과정은 필수요소.
개발, 그리고 인간에 대한 예의 – [우리마을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평단의 호평을 받았던 느와르 영화 [초록물고기]에서, 필자가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한석규의 호연보다도 그가 퇴장한 후 에필로그격인 마지막 시퀀스였다. 그렇게 우리네 평범한 욕심들이 잘못 엮이며 파국을 맞이한 인간사의 비극 속에, 예정대로 그 땅에는 건물들이 들어섰다. 그것은 무슨 엄청난 소돔과 고모라가 아니라, 그냥 일산 아파트촌이다. 무언가가 들어서고 일상화되고 나면, 그 과정에서 누군가 다른 이들이 잃게 된 것들은 손쉽게 망각되곤 한다.
[우리마을 이야기](오제 아키라 / 이기진 역 / 길찾기 / 3권 발간중)은 일본이 나리타 국제공항을 만들던 60년대말, 공항 건설을 반대하던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다. 이 사건은, 일본 현대 시민운동사에서 가장 길고 격렬했던 것이었다. 사건의 시작은 놀랍도록 친숙하다. 더 크고 잘난 국가를 내세우며 커다란 대형 시설 공사를 정치인들이 일방적으로 결정하고, 난데없이 그것을 맞이하게된 지역의 주민들이 반대를 벌인다. 그러자 정치인들은 공사 지역을 저항이 덜 할 것으로 보이는 인근 지역으로 옮긴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일방적으로 이루어진 것이기에 찬성을 하도록 섭외된 이들과 반대하는 이들 사이에 큰 마찰이 벌어지고, 지역공동체는 파괴된다. 그 와중에서 이제는 밀리지 않고 강행하려는 정부와 반대자측에 힘을 실어주는 운동단체들이 각각 최선을 다하며 투쟁은 장기화된다. 공권력은 점점 더 막무가내가 되고, 그렇기에 여러 단체들이 결합한 투쟁의 수위는 사회체제에 대한 근본적 문제제기 사안이 되면서 더 격렬해진다. 더 많은 이들이 떨어져 나가고, 남은 이들은 버티기 위해서라도 더욱 극단화된다. 산리즈카 마을의 투쟁의 경우, 결국 93년에야 처음 정부측의 공식 사과를 받아냈다. 그 과정에서 시위자도 경찰도 많은 이들이 다치고, 죽고, 투옥되었다.
이 만화는 바로 그 과정을 드라마화한 작품이다. 논픽션 취재물로서의 르포보다는 가상의 주인공을 내세운 역사소설의 형식을 취하고 있기는 하지만, 사건 전개 양상에 대한 치밀한 취재와 결코 일방적으로 선하거나 악하지 않은 사람들의 행동방식들을 중심으로 하기에 지극히 사실주의적 접근을 고집한다. 산리즈카 마을의 주민들은 투쟁의 성자들이 아니라, 애초에 공항이 옆 마을에 만들어지기로 하고 그쪽 사람들이 저항하며 싸울 때는 무관심했던 이들이기도 하다. 계획이 변경되고 자신들의 일이 되자 판단을 강요받게 되고, 그 안에서 여러 현실적 여건들로 저울질하며 찬성파와 반대파가 갈라진다. 오랜 시간 황무지를 개간해서 일궈낸 흙이 있는 바로 그 땅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땀과 시간의 가치를 생각하며 쫒겨나지 않을 것을 선택한다. 하지만 같은 이유에서, 다른 이들은 그간 고생을 생각하기에 자식들에게는 다른 삶을 살게 하고자 보상금을 택한다. 도시에서 학생운동을 하는 한 청년은 반대파로서 싸우다가, 가족이 결국 찬성파로 돌아서자 운동을 그만둘 수 밖에 없게 된다. 선하기에 반대하고 악하기에 찬성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자신들이 신경써야할 이들을 위한 나름의 선의와 사정으로 움직인다. 마을 주민들 뿐이겠는가. 정치인들도 악의 화신이라기보다는 그저 자신들의 일을 하겠다고 고집하는 관료들이다.
하지만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은 작품에서 이야기하는 “민주주의는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지점을 무시하기 때문이다. 정부와 개발사들은, 이미 산리즈카 마을을 밀어버리고 공항을 세운다는 결론을 정해놓은 후 주민과의 대화 같은 것은 요식 행위로 여긴다. 전후 급격한 성장세에 들어선 조국의 번창을 위해 새 공항은 세워야하겠고, 그것을 위해 산리즈카 주민들이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애초에 전제로 깔고 시작한 것이다. 그렇기에 공청회는 의견을 모아 사업의 방향을 결정짓는 자리가 아니라, 적당히 고위직인 사람이 와서 15분쯤 고개를 굽실거려주는 감정 무마 자리일 뿐이다. 정말로 완전히 새로운 공항을 지어야 하는가, 꼭 그곳이어야하는가 같은 근본적 계획에 대한 설명은 공개적으로 다시 토의될 대상이 아니라 그냥 당연한 것으로 치부한다. 보상은 정해진 금액에서 이루어질 뿐, 지역에 대한 문화적 자존심, 지난 수십년 정착과정에 대한 사회적 인정 같은 것은 처음부터 논외다. 그저 관료적으로, 이미 법으로 보장된 바대로 땅을 강제 집행하고 보상금을 던져주고 공항을 짓는 것만이 있다. 그리고 그것을 방해하는 현지 주민들은 다양한 기술을 통해 밀어내야할 존재에 불과하다.
[우리마을 이야기]는 그 과정을 여러 연령대의 주인공들의 시각과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며 보여준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꼬마에게는 자세한 정치적 내역보다는 마을이 양쪽으로 갈라져 부서지는 모습이 가장 먼저 보이고, 그것이 반대투쟁 참여의 동기가 된다. 아버지의 집착과도 같은 농업후계를 버리고 도시로 올라가고자 했다가 반대투쟁 속에 농업의 의미를 되찾는 큰 아들도 있다. 자신의 집을 지키는 어른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땅과 흙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신들이 개척한 땅을 버리지 못하는 노인의 이야기가 있다. 그들은 늘 합리적이고 똑똑한 것이 아니다. 도무지 고집으로 밖에 안 보이는 대목들도 있고, 중재를 위해 힘쓰는 이들을 밀어내는 경우들도 있다. 하지만 크게 잘못한 것 없이 그저 그곳에 살며 삶의 터전을 만들어낸 이들이기에, 사회적 결정에 자신의 목소리를 반영할 수 있도록 인간으로서 존중받아야 할 이들이다. 그 소박한 한마디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겹겹이 부딪히는 좌절 속에 싸움이 점점 커지는 모습이 펼쳐진다.
이 만화는 별다른 겉멋을 부리지 않는다. 사람들의 에피소드를 세심하고 촘촘하게 관찰하게 만들며, 과장된 동작과 감정적 연출 없이 사안의 격렬함에 집중시킨다. 문제와 해결책의 퀘스트형 전개방식이 아닌, 문제에 처한 이들의 심경과 행동 변화를 묘사하는 것에 힘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원적 마을 풍경을 그릴 때의 섬세함은 이 작품이 산리즈카 사람들의 손을 들어주고 있음을 한껏 보여준다.
한국에서 해외로 비행기 여행을 할 때, 나리타 공항을 경유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부끄럽지만, 한 번도 산리즈카 투쟁을 떠올린 적이 없다. 공항은 그냥 깔끔한 설비로 만들어진 일상의 공간으로 느껴졌을 뿐이다. 하기야 다큐 [상계동 올림픽]에서도 그려냈듯, 서울시의 수많은 곳들이 일방적 재개발로 쫒겨난 이들의 눈물 위에 서있지 않던가. 얼마 지나지도 않은 비극의 용산 재개발구역 역시 그 위에 복합쇼핑몰과 아파트들이 들어서면 그냥 일상 공간이 될 수있다. 어디 쓸지도 대충 넘어가고 우선 갯벌부터 밀어버리고 본 새만금이든, 주민들을 쪼개놓은 부안 핵폐기장이든, 지금 화제를 모으는 강정마을 해군기지든, 일방적 개발 철거는 너무나 자주 닮은 꼴이다. 개발 자체를 반대하기는 곤란하지만, 어떻게 하는 개발인가, 그 과정에서 사람들을 어떤 식으로 대하는 개발인가 더 치열하게 고민하고 섬세하게 설계하기 위한 노력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현재 진행형인 싸움들이 너무 민감하고 괴로워 보여서 입장과 생각을 성찰할 재료로 삼기 버겁다면, 이런 작품의 힘을 빌어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 마을 이야기 1 오제 아키라 지음, 이기진 옮김/이미지프레임(길찾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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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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