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상의 힘 – 『무크지 에로틱』
김낙호 (만화연구가)
굳이 프로이트니 뭐니 머리 아픈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성적 욕망을 돌리고 돌려서 창작열로 승화시키는 행위는 대중예술 전반에 너무나도 흔하다. 그 중에서도 그 ‘본심’을 비교적 꼭꼭 숨겨놓은 장르가 있는 반면, 자신의 에로스적 원류를 솔직하게 인정하는 장르가 있다. 그 중 후자를 바로 ‘에로’물으로 지칭하곤 한다. 성적 자극이 넘친다, 혹은 좀 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성교하고 싶은 욕구를 지핀다는 뜻의 ‘섹시하다’라는 말이 더 이상 천박한 표현이 아니게 된 오늘날의 대중문화에 있어서, 역설적으로 가장 애매한 처지에 있는 것이 이러한 에로 장르이기도 하다. 직접적인 물리적 자극을 통해서 지극히 실용적인 기능성을 추구하는 ‘포르노’와 스스로를 차별화해야 하는 당위와 함께, 장르에 대해서 요구되는 자극의 수위를 충족시킨다는 두 가지 임무를 달성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묘한 표현과 기발한 발상으로 성적 욕망의 정수를 압축해내어 향유자로 하여금 외부로부터의 성적 자극보다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부터 스며 나오는 성적 망상을 자극하는 ‘참여적 망상’이 에로물의 품격을 가늠하는 중요한 기준이 된다. 그런 와중에 그림과 그림 사이 글과 그림 사이를 채우는 참여적 상상력이 표현양식의 기본 원리 그 자체인, 만화라는 매체가 지니는 강점은 명확하다.
만화 무크지 『에로틱』(거북이북스)는 원로급과 신인급, 장편연재 작가와 단편 작가 등 현재 한국만화계가 지니고 있는 다양한 스펙트럼에서 고르게 선정된 작가진 15명이 각각 표현한 에로만화의 모음집이다. ‘에로틱’이라는 키워드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제한조건이 주어지지 않았기에, 어떤 이는 동성애물을, 어떤 이는 에로의 집착성에 착안하여 기묘한 공포 단편을, 또 다른 이는 의인화된 음식물을 통해서 멋진 에로 코미디를 만들어냈다. 고전적인 느낌도, 도발적인 새로움도 고르게 안배되어 있다. 에로틱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하는 가지는 구심력과 에로라는 소재를 폭넓게 접근하는 다양성의 측면에서, 이 모음집은 전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뚜렷한 정체성을 호소하고 있다. 『에로틱』은 작년의 『밥』에 이어서 두 번째로 나온 거북이북스 무크지 시리즈인데, 밥이라는 키워드가 식욕이라는 확실한 구심점보다는 다소 애매한 선문답 화두처럼 표류했던 전작에 비하자면 전혀 다른 수준의 결합을 보여준다.
많은 독자들이 제목에서 쉽게 기대했을 법한 바와는 달리, 전체적으로 성적 묘사의 수위 자체는 높지 않다. 작가들이 모두 모음집의 제목이 ‘포르노’가 아니라 ‘에로틱’이라는 부분에 상당한 의식을 집중한 듯한데, 보여주는 성이 아니라 상상을 하게 하는 성을 강조한 것이다. 성적 욕망의 자유로운 분출보다는, 적당히 억압당하고 적당히 스스로 억누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쩔 수 없이 자연스럽게 스며 나오고 마치 기회만 생기면 어떻게든 터져 나올 듯한 그런 성을 담고 있는 작품들인 셈이다. 그렇듯 일상과 욕망, 숨겨진 무언가에 대한 정서를 가장 압축적으로 나타내고 있는 작품은 석정현의 ‘안 꼴리냐’인데, 누드크로키의 누드모델이 그림을 위한 정물에서 사소한 계기로 사람으로 보이게 되는 찰나의 순간에 대해서 유머러스한 일화로 소개하고 있다. 쓸데없이 자세한 설명, 과장된 성적 묘사가 없더라도 그런 순간의 상상이 바로 에로티시즘의 본질에 한층 더 가까운 셈이다.
원래 모음집이라는 형식이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듯, 이야기적 완성도라든지 취향에 따른 작품간 편차는 있다. 만화 특유의 시각적 은유와 유머를 느끼고 싶다면 의자에 대해서 성적 망상을 풀어나가는 최규석의 ‘섹시한 남자’ 또는 음식들의 관계 속에서 성적 연상을 끌어내는 박무직의 ‘숟가락님이 보고계셔’를 추천한다. 그냥 스트레이트한 망상 자극을 원한다면, 젊은 성인 대상의 대중문화에서 가장 애용하는 성적 코드들을 하나의 짧은 이야기에 가득 압축시킨 이유정의 ‘선생님’이 돋보인다. 극단적으로 완전한 받아들여짐을 꿈꾼다는 점에서 소설 『향수』를 연상시키는 테마의 한혜연 단편 ‘완전변태’ 역시 에로티시즘의 근원에 대해서 화두를 던진다. 그리고 의외의 반가움으로 다가오는 것은 7-80년대의 해학적 성인만화를 상기시켜주는 농익은 스타일로 중견 카툰 작가 조관제가 풀어내는 ‘흔적’이다.
반면에 홍윤표의 ‘L.O.Tique’ 의 경우처럼 지나친 자기 고백에만 집중하여 아쉽게도 독자와의 호흡에 실패, 에로틱한 공감대의 형성에 성공하지 못하는 작품들도 있다. 다양한 만화 작품을 읽다가 중간에 한번씩 호흡을 돌려줄 수 있도록 2-3편 정도 섞여있는 칼럼의 경우 다소 애매한 위치인데, 무엇보다 독자층에 대한 설정이 그렇다. 박수동의『고인돌』을 위시한 70년대 에로만화들을 재발굴하는 ’에로틱 걸작 리뷰‘ 칼럼은 당시 작품들을 일부 에피소드라도 전재하며 직접 보여주지 않고서는 2000년대의 젊은 독자들과 호흡하기 힘들고, 김낙호의 ’에로틱 칼럼‘은 미디어론 자체에 집중한 나머지, 정작 대상 독자들이 창작자인지 매니아인지 일반 독자인지 뚜렷하지 않은 모호한 성격의 글이다. 무엇보다, 에로틱한 감상을 추구하는 만화작품들에 비해서, 글들은 에로에 대해서 단지 탐구할 뿐 시전하지는 못하는 한계 때문에 독서 경험의 응집력을 오히려 떨어트리는 부작용을 보인다. 물론 한국에서 만화 무크지를 보는 독자층이라는 것 자체가 아직 애매한 구석이 있지만, 보다 뚜렷한 방향설정과 내부조율이 필요한 지점이기도 하다.
아마도 상당한 강심장이 아니고서는 ‘만화책 보듯이’ 지하철에서 펼치고 보기는 힘들겠지만, 무크지 『에로틱』은 무크지나 단편집 특유의 실험적 경직성보다는 유쾌한 욕망이 가득한 책이다. 아직은 그것이 이 무크지 시리즈의 기획력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에로틱이라는 주제 자체에서 나오는 것인지 확답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이왕이면 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에로틱이라는 소재를 성적 표현이라는 외적 조건에 함몰되지 않고 추구할 수 있도록 출판을 기획하고 작가와 작품들을 안배하는 솜씨가 뚜렷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1호 『밥』에서 2호 『에로틱』으로 넘어오면서 보여준 질적 향상이 향후에도 지속된다면, 아마도 멀지 않아 상당한 성과를 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를 품게 한다. 하지만 시리즈로서가 아니라, 하나의 구심력과 완결성을 갖춘 모음집으로서 『에로틱』은 확실하게 독자들을 유혹한다. 아주 ‘섹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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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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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틱 나예리 외 지음/거북이북스 |
아니 본인이 본인 얘기를 저렇게… -_-;;;
!@#… ulll님/ 자화자찬이라면 몰라도, 자아비판이라면 얼마든지 즐길 수 있는 성격이 되어놔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