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에게 재미를 허하라 – 『크로니클스』[기획회의 070515]

!@#… 논의 초기에 기획 참여했다가 유학차 도망쳤던 물건으로, 결국 2년만에 세상의 빛을 본 케이스. 여러 우여곡절 속에서도 꽤 충실한 품질로 나와줘서 반갑고, 당초 기획한 컨셉들의 상당 부분이 잘 녹아들어가서 또한 재미있다. 2권, 3권까지는 후딱 출간되어줘서 상승세를 만들어주기를 바랄 뿐.

아이들에게 재미를 허하라 – 『크로니클스』

김낙호(만화연구가)

최근 수년간은 확연히 나아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만화는 ‘비교육적’인 것의 대표격으로 종종 어른들의 걱정 속에 동원되고는 한다. 사실 그 어른들이 원하는 아동들의 교육을 저해하는 것은 비단 만화 뿐만 아니라 비디오 게임, 인터넷 상의 넘치고 넘치는 잡스러운 정보와 커뮤니티들 등 넘치고 넘친다. 즉 거꾸로 생각하자면 만화가 그만큼 어른들이 교육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 – 바로 ‘책’의 형식과 가까우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락성을 추구하고 있기에 그만큼 경각심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리라(물론 과장법이 다소 끼어 있다). 그래서 그런지, 특히 아동들을 대상으로 하는 만화는 언젠가부터 부모들의 지갑을 열기 위해 ‘학습’이라는 컨셉을 차용하곤 했다. 아동들에게 오락적 재미를 주어 승부하고 싶지만 그들을 가로막는 굳건한 벽, 부모의 교육 만능주의 – 솔직히 진정한 의미의 교육이라기보다는 그저 경쟁적 입시준비에 대한 변명이지만 – 를 돌파하기 위한 밑밥인 셈이다. 하지만 밑밥은 종종 멍에로 돌아온다. 학습성을 어떻게든 집어넣겠다고 신경 쓰느라 재미가 없어지거나, 아무리 봐도 전혀 재미없는 이야기를 학습성으로 덮어보려고 하는 얄팍한 술수 말이다. 이럴 때 그리워지는 것은 결국 아동층을 독자층으로 하는, 재미 그 자체로 승부하는 작품이다. 영화로 따지자면 『나니아 전기』, 소설로 따지자면 『해리포터』 연작 같은 것 말이다.

『크로니클스』(스튜디오 구구/ 거북이북스/1권 발간중)는 바로 그런 지향점을 뚜렷하게 표방하고 첫발을 내딛은 작품이다. 이 작품은 서유기를 원작으로 하여 현대적인 취향의 디자인과 상상력을 입힌 것인데, 높은 시각적 완성도와 군더더기 없는 연출과 진행 등 포부에 걸맞는 높은 품질로 선보였다. 쓸데없이 자극적인 소재 없이 캐릭터의 매력과 이야기 자체로 승부를 거는, 아동 대상의 이야기 오락만화로 완성된 것이다. 비록 여러 가지 현대적 복장이나 SF적 소재들이 등장하기는 하지만, 1권에서 선보인 기본 줄거리는 의외로 원작에 충실하다. 80년대 말 선보인 허영만의 『미스터 손』1부 이래로, 서유기라는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그대로 수용하는 작품은 실로 오래간만이다. 천계에서 소동을 일으키고 유배된 제천대성 손손(손오공)이 삼짱(삼장법사)의 수행을 위해 부하로 동원되며, 포악한 저팔계가 또다른 부하가 되고, 용왕의 아들이 용마가 되어 이들의 탈것이자 팀의 일원으로 들어온다. 관음보살과 석가여래는 이들의 여정을 먼 발치에서 지켜본다.

『크로니클스』의 미덕은, 원작인 서유기가 가지는 동양고전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릴 생각이 없다는 것이다. 적당히 캐릭터들만 들고 와서 폼 잡는 것이 아니라, ‘억겁의 세월’이라든지 ‘경전’ 같은 동양 환타지 특유의 소재들을 그대로 수용한다. 비주얼 역시 현대적인 색채를 씌워놓기는 했지만 배경묘사나 캐릭터 생김새에 있어서 동양적 모티브의 곡선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색채배합 역시 기존 아동학습만화 계열에서 아동취향이라는 명분 아래 남발했던 부담스러운 원색이나 심심한 파스텔톤의 중간에 위치한, 한층 동양화풍 화사함을 자랑한다. 즉 크로니클스는 무척 서구적으로 탈색된 제목과는 달리, 서유기로부터 플롯이나 캐릭터보다 동양 환타지 모험물이라는 큰 컨셉을 가져오기로 한 셈이다. 그리고 그 수용 능력은 잘 조율된 프로듀싱에 의하여 일관된 높은 품질을 이루었다.

학습성에 대한 부담을 떨치고 이야기의 재미 자체에 집중한 것은 확실한 미덕이다. 그 결과 삼등신부터 8-9등신의 캐릭터까지 자연스럽게 소화해내는 홍성군 그림작가의 필치는 자유롭게 화면을 넘나들며, 김기정 글작가의 스토리 역시 거침없는 페이스로 전개된다. 이 모든 것이 챕터 단위로 중단되어 학습 포인트를 상기시켜가며 이야기를 중단함이 없이,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손오공이 오랜 봉인상태에서 처음 풀려나서 거대한 모습을 처음 드러낼 때의 압도적인 화면 연출의 박력, 그리고 경전의 힘에 의하여 작고 귀여운 모습으로 다시 축소될 때의 유머감각은 영화로 치자면 헐리웃 메이저 스튜디오급 블록버스터의 노련함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사실 그 블록버스터들이 그렇듯, 결국 교훈이나 학습성은 이야기 자체에서 우러나오는 것이지 따로 인위적으로 집어넣는다고 해서 잘 되는 것이 아니다. 다행히도 동양 고전들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시대적 맥락 속에서 발전해오면서 자연스럽게 교훈성을 캐릭터 속에 수용하곤 했다. 나관중의 『삼국지』를 읽으면서 인간관계와 처세에 대한 ‘학습’을 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삼국지가 학습물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저 재미있는 대중 역사소설이며, 그 안에 자연스럽게 삶의 진리가 농축되어 있는 것이다. 서유기 역시 마찬가지로, 각종 모험의 과정 속에 우정, 신뢰, 고귀한 희생, 인과응보의 순환론적 우주 등 여러 교훈들이 부족함 없이 들어있다. 힘자랑 구도에 매몰되지 않고 인물들 간의 인연과 상호작용에 집중하면 얼마든지 읽어낼 수 있는 부분이다. 그리고 『크로니클스』는 게임카드를 연상시키는 수치화된 힘 비교와 레벨업 개념을 배제하고, 캐릭터와 그들의 아이템을 그냥 개성으로 부여했다. 이로써 어떤 새로운 무기를 ‘득템’(아이템 확보를 나타내는 게임 용어)하고 어떤 점수차로 이길 것인가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캐릭터들의 상호관계에 집중시키고 결국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를 연상시킬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기존 아동만화 시장의 주류를 이루는 이러한 장르법칙을 과감하게 버린 것은 이야기의 재미를 유지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을 때에만 감행할 수 있는 대단한 모험인데, 다행히 첫 권은 그 조건을 충족시켜주고 있다. 단점은 아직 세계관의 체계가 충분히 공개되지 않았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해리포터』같은 작품에서도 마법의 체계라든지 일반세계와 마법계의 관계를 알려주어 세계관을 탐험하는 재미로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삼장법사의 팀원이 전부 완성될 것으로 보이는 2권에서는 이러한 세계 구성과 힘 시전 방식의 원리가 충분히 드러나서 독자들을 더욱 몰입시킬 수 있게 되기를 희망한다.

프로덕션 측면에서 『크로니클스』는 블록버스터적 접근에 걸맞게, 박스세트로 출시된 1권 한정판은 주인공 피겨와 티셔츠, 포스터 등이 동봉되어 화려한 패키지를 자랑한다. 학습을 매개로 하는 강요된 보관 필요성 또는 대전 액션을 위한 아이템화가 아닌, 독자의 소장욕구를 직접적으로 자극하겠다는 행보다. 이것은 마치 대단히 새로운 발상처럼 보이지만, 사실 가장 기본에 충실한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욱 성공여부는 역시 어떻게 독자층의 생활 전반 속에서 이 작품을 ‘대세’로 만들어내느냐에 달려있다. 이왕 재미있게 시작한 작품인 만큼, 열심히 노출시켜서 학습성에 오락성을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락성 속에 어쩌면 교훈을 얻어낼 수 있는 즐거운 웰메이드 작품들이 다시 주류가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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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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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니클스 1
홍성군 그림, 김기정 글/거북이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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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e thought on “아이들에게 재미를 허하라 – 『크로니클스』[기획회의 070515]

Comments


  1. 우와~ 캡좋다.

    캡콜교수님이 가시고 나서, 강사장님과 홍작가님이 저 작품가지고 고민할때 저도 옆에서 마구지지배배 거렸어요. 도움이 된 구석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