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은근히 이 연재물, 매번 새로운 ‘역경’을 생각해내느라 머리 아프다.
만화로 배우는 생존법:
인류가 멸망해도 살아가기
김낙호(만화연구가)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올드팝송 가운데 하나가 스키터 데이비스의 “The End of the World”다. 기본적으로는 내가 사랑이 깨졌으니 세상은 끝났다, 저 새들도 햇님도 뭣도 이제 세상이 다 끝났는데 그것도 모르냐고 푸념(관점에 따라서는 저주)하는 내용이다. 아니 자기가 사랑이 깨졌는데 왜 다른 모든 이들도 함께 사는 세상이 통째로 끝나야 하는 것인가. 이렇듯 사는 것이 힘들 때, 많은 이들이 가장 흔히 경솔하게 내뱉곤 하는 이야기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따위 세상 차라리 다 망해버려라”라는 말이다.
그런데 뭇 사람들의 그런 바람 속에 종종 깔고 있는 정서는, 이왕 세상은 다 망하고 나만큼은 살아남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정말로 단순히 죽도로 힘들어서 그런 것이라면 그냥 자신만 고이 세상을 떠나면 되지, 일부러 세상이 망하기를 바라는 것은 무슨 심보겠는가. 바로, 이놈의 말도 안되는 세상이 망하는 꼴을 자기 자신이 지켜보고 싶다는 심보다. 아니나 다를까, 인류가 멸망해도 누군가 하나는 남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는 상상력을 발휘하는 작품들은 꽤 있는 편이다. 모두 다 망하라고 외칠 때, 그렇다면 다 망한 뒤 무엇이 남아서 어떤 ‘그 이후’를 지켜볼 것이지 한번 상상해보는 것은 재미있는 일이다. 나가서 실천하지만 않는다면, 스트레스 해소와 정신수양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여하튼 영원히 살고 본다
데즈카 오사무의 기념비적 연작 『불새』는 먼 과거, 먼 미래, 좀 덜 먼 과거, 덜 먼 미래 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다룬다. 모든 이야기를 관통하는 하나의 소재가 바로 불새인데, 불새의 피를 마시면 영원한 생명을 누린다는 속성이 있기에 시대를 초월하여 인간들의 욕망의 대상이 되어준다. 일견 개별적인 이야기들은 사실은 인연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 불교적 윤회와 생명의 의미에 대한 성찰을 던져주는 방식이다. 그런 세계관을 가장 먼저 집대성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불새 – 미래편』인데, 여기서는 아주 먼 미래에 결국 인간이 멸망해버리는 것을 다루고 있다. 지나치게 발달한 인류가 결국 핵전쟁을 일으켜서 스스로를 멸망시키는데, 그 와중에 불새의 피를 먹게 된 한 명의 주인공만이 핵전쟁이 끝난 후 대피소에서 나와서 모두가 없어져버린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이란, 고작 폐허가 된 인간문명을 바라보며 한탄하는 찰나의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십수백만년이 지나면서 인간의 세계는 완전히 없어지고 그 흔적 위에 다른 생물들이 새롭게 진화하고, 다시 영겁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역시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서로를 파멸시키고 끝난다. 그 와중에서 주인공은 몸조차 사라진 순수한 생명의 존재가 되어 다른 생물들에게 ‘신’으로 이해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오랜 세월 후에 결국 인간이라는 생물이 다시 등장하고, 고대문명이 시작되어, 먼 과거를 다룬 불새 연작의 첫 장면으로 연결된다. 즉 우주의 윤회과정을 순환하는 영원한 존재가 되어, 모든 것을 영원히 바라보게 된 것이다. 이 정도면 고작 수백년 좀 살아왔다고 고뇌로 가득한 『인어의 숲』연작의 주인공, 고작 선사시대부터 살아왔고 모 역사적 인물들을 거쳐왔다고 해서 거의 해탈의 표정을 보여주는 『지구에서 온 사나이』의 주인공들이 민망해지리라. 여하튼, 인류는 멸망하고 또 태어나더라도, 나는 영원하다.
인간이자 인류가 아닌 것이 되자
나가이 고의 『데빌맨』의 주인공은 인류가 멸망한 뒤에도 계속 살아가는 방법으로 인류가 아닌 것이 되는 것을 선택했다. 다른 생물과 융합하는 속성을 지닌 데몬족의 습격, 거대한 아수라장 지옥도로 변한 세상 속에서 주인공 후도 아키라는 데몬족 최고의 전사 아몬과 융합한다. 그리고 나름대로 소중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상식을 초월한 괴물들과 끝없이 싸우는데, 아뿔싸 공포에 질린 사람들은 그런 그를 전혀 반기지 않는다. 나아가 완전히 폭도화되어, 그를 감싸주던 여자 친구를 본보기로 잔인하게 살해해버린다. 인류는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화를 재촉하여 여차저차 전멸. 그리고 데빌맨이 되어 인간을 벗어난, 하지만 여전히 인간의 마음을 지니고 있는 허망한 존재가 되어버린 후도 아키라는 그 후의 세계에서도 계속 싸워나갈 따름이다. 비인류화된 인간 데빌맨들과 데몬들의 싸움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인류가 다 멸망하는 싸움에서 살아남아봤자 인생은 첩첩산중.
증거라도 남기자
박무직의 SF단편 『호텔』은 두 가지 버전이 있다. 하나는 원작을 제공하고 박지홍 그림으로 완성되어 모 공모전에서 당선된 버전이고, 다른 하나는 직접 그림을 그려서 일본 ‘모닝’지에서 발표한 버전이다. 물론 두 버전 모두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인류가 전지구적 자연재해 이후에도 지구상 생물들의 유전자를 남겨두기 위해 호텔이라는 별명의 거대한 컴퓨터 관리시설을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는 그 시설을 관리하는 인공지능 컴퓨터가 수천만년의 세월을 살아가는 과정을 담아낸다. 다만 일본 버전 쪽이 인류라는 존재의 미래에 대한 여운이 한층 고급스러워졌는데, 여하튼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긴 세월이 지난 후에도 인류의 유전자 흔적은 남게 되었다. 하지만 사실 인류가 있었다는 진짜 증거는, 사실은 인류의 유전자가 아니라 2천만년도 넘게 인간다운 의지와 가족적 애정으로 자리를 지켜온 관리자 컴퓨터의 존재 그 자체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인류라는 종족은 없어지고 난 후라도 ‘인간성’은 오래 지속된다는 메시지의 감동은, 스케일 큰 SF의 고전적인 코드니까 말이다. 인류는 멸망했지만 인간성은 인공지능 속에 살아남아, 그 이후를 오래도록 관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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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가 멸망해도 무언가 흔적이 남을 것이라는 것, 그것은 인류가 자신의 존재에 무언가 의미가 있기는 하다는 자기위안과, 스스로의 어리석음으로 멸망할 수 있다는 나름대로의 죄책감을 섞어넣은 정서의 발로다. 멸망이 끝이 아니라는 약간의 희망과, 멸망의 비극적 순간을 동시에 대중문화로 즐기는 무척 인간적인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여튼 뭐, 인류가 멸망해도 어떤 형태로든 계속 남는 것은 생물의 본연인 삶에 대한 의지이자 결국 여하튼 살아가는 게 최고라는 역설이기도 하다. 아니면 이왕 망한 셈, 멸망한 셈 치고 다시 차근차근 인류문명을 쌓아올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한번 멸망으로 갔던 스스로의 어리석음을 반성하며 지도자도 잘 뽑고, 자신들 맘대로 사람들의 입을 틀어막으며 암울한 규칙들을 강요하려는 기득권들을 예방할 방법들도 고안하고, 여하튼 무척 건설적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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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만화로 보는 생존법’ 칼럼: 험난하고 이상한 세상의 어떤 괴이한 조건에서라도 여하튼 그럭저럭 살아가보기 위한 지혜를 만화에서 빌려보자는 컨셉.)
— Copyleft 2009 by capcold. 이동자유/수정자유/영리불허 —
그러고보니 이제 인류멸망까지 왔는데 다음호에선 또 어떤 ‘역경’이…
제가 좋아하는 작품들만 쏙쏙.(호텔이 두 버전이 있었군요.)
그런데 다음에는 좀 더 친절하게 작품에 대해 발표연도라도 표기되었으면 좋겠습니당.
역경만들기는… 16년동안 사람들에게 역경만을 선사해주신 가카께 여쭈어 보심이 ㅎㅎ
데빌맨 마지막이 그랬군요.
!@#… 언럭키즈님/ 아, 그 다음 원고는 다시 약간 소소한 걸로 돌아갔습니…;;;
nomodem님/ 작품 세부소개까지 다 넣으려면 지면이 좁아요 흑흑.
ullll님/ 사실 정치사회 관련은 하나 건너 정도로 쓰려고 하는데, 그 부분은 소재가 넘쳐나서 걱정 없습니다. (에에… 좋은건가)
Jnine님/ ****가 사실은 데몬의 제왕 사탄이었던겁니다. 난데없는 비장함의 극치.
– 호텔이란 작품이 있는 걸 처음 알았습니다. 한번 찾아봐야 겠군요.
– 이 글을 읽고 퍼뜩 생각나는게 10여년전 어딘가에서 본 서기 만년까지 존속하는 시계를 만든다는 프로젝트 였습니다. 현재의 인류문명이 흔적만 남기고 소멸해도 후대에게 계속 유용한 정보를 주기 위한 기계를 만든다는 내용이었는데 찾아보니 실제로 진행중이고 상당한 진전도 있는 것 같더군요. http://en.wikipedia.org/wiki/Clock_of_the_Long_Now
– 인류멸망 이후에 비교하자면 스케일이 작지만 그래도 현실에서 저런 걸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게 놀라울 따름… ^^;;
!@#… 지나가던이님/ 호텔의 경우 한국버전은 과학동아 공모전 사이트 통하면 읽으실 수 있고, 일본버전은 아직 한국어판이 나온 적 없습니다. 조만간 일본에서 나올 단편집에 포함시킨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머지 않아 기대할 수 있겠죠.// 후대에 유산을 전해준다는 만년시계 컨셉을 보면, 저는 서울시 600년 타임캡슐이 떠오릅니다. 아아 블루씨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