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르몽드디플로마티크 12년 11월호, 무게감 있는 ‘대선은 우리에게 무엇인가’ 특집 중 한 꼭지로 미디어와 대통령을 다뤄봄. 저널리즘론의 아주 기초적인 내용들을 바탕으로 시작했는데, 탈고하고 나니 더 해놨어야할 이야기가 100가지는 밀려오는 화두.
정치 언론, 열광과 환멸의 롤러코스터
김낙호(미디어연구가)
시민들의 여론에서 대통령 같은 고위 정치인에 대한 평가가 기대와 실망을 오가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큰 일이 벌어질 때 가장 큰 책임을 맡고 있다고 여겨지는 이에게 책임을 돌리는 것은 평범하고 효율적인 인지 과정이고, 새로운 리더와 새로운 해결책의 희망을 동격으로 놓는 것도 마찬가지다. 먼 옛날에 그것은 가뭄에 대한 책임을 물으며 왕의 목을 베는 것으로 나타났고, 덜 옛날에는 정국 불안만 있으면 “모든 것은 노무현 때문이다” 놀이로 나타나고, 현재는 불평등 심화에 한탄하며 “반MB로 대동단결”로 바뀌었을 따름이다.
이것이 대통령이라는 제도와 만날 때, 당선 당시 높은 지지율에서 시작하여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퇴임하는 패턴의 반복으로 나타난다. 미국의 경우도 프랭클린 루즈벨트 같은 소수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그랬고, 한국 역시 취임시 70%가량에서 퇴임시 14%로 떨어졌다는 김영삼, 80%에서 37%의 김대중(R&R 2003년 조사), 70% 남짓에서 후반기에 한 자릿수까지 떨어졌다가 그나마 25% 전후로 반등시키고 퇴임한 노무현 전임 대통령들이 있다.
정치지도자에게 기대와 절망을 하는 것은 가장 직관적인 방식으로 현재에 대한 불만을 구체화하고 나름의 희망찬 돌파구를 제시하는, 쉽고 매력적인 내러티브다. 문제는 이런 사고가 개개인의 차원을 넘어 언론의 적극적 개입과 만날 때, 본격적으로 증폭되며 롤러코스터에 오른다는 것이다. 기대는 비현실적인 열광의 수준으로, 실망은 정치 환멸의 수준까지 삽시간에 커져버리고, 많은 사회문제들이 여러 정권을 거치며 오래 축적되었기에 정권교체보다 훨씬 종합적인 대처가 필요하다는 기본적 전제조차도 쉽게 망각된다. 누구나 공감할 법한 이런 상황이, 해결은 커녕 점점 악화되어가는 듯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의 권력 속성
시민들은 누구라도 대통령이 국정을 잘 운영하고 있는지 각자 생활 속 체감을 통해서 판단을 내릴 수 있다. 하지만 내 감각이 과연 근거가 있는 것인가, 내가 느낀 것 말고도 구체적으로 무엇을 잘 못하고 있는지 등을 생각해야할 때는 결국 언론 보도를 재료로 한다. 언론은 시민들이 대통령과 정치현실을 인지함에 있어서 유일하지는 않더라도 매우 중요한 렌즈이기에, 원래의 형상을 어떻게 굴절시킬지 정하는 하나의 권력을 지닌다.
렌즈의 힘을 쓰는 목적에 대한 규범적 모범답안이 필요하다면, 정확하고 공정한 소식을 사회 곳곳에 소통하여 민주적 의사결정을 촉진하기 위함이라는 듣기 좋은 말을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미디어 정치경제학 분야에서 오랫동안 강조하고 있듯, 현실적으로는 정치 참여자로서의 언론 그리고 산업적 이득이라는 두 가지 목표가 크게 작용한다.
우선 정치 참여자라는 속성은 언론사가 정치 감시자 기능을 넘어 능동적 주도자의 기능을 지향하는 것으로, 역사적으로 민주화 기여부터 권언유착까지 여러 방식으로 나타났다. 김영삼 대통령과 조선일보의 끈끈했던 관계라든지(97년 한겨레21의 ‘오만한 언론의 대통령 만들기’에 흥미로운 일화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에 큰 역할을 했다고 흔히 화자되었던 오마이뉴스 등의 사례는 물론이고, 나아가 공영방송을 표방하지만 경영구조상 정권방송으로 타락하기 쉽기에 지금까지도 마찰이 많은 KBS, MBC뉴스를 떠올려도 된다.
산업적 이득이라는 목표는, 비용과 노력은 줄이고도 겉보기에 그럴싸한 결과물을 내놓으며 광고주와 모기업, 다수 독자들의 성향에 편승하여 불편함보다는 만족감을 제공하여 사회적으로 잘 팔리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잘 팔리는 상품임을 다시금 영향력의 척도로 과시하여 산업적 지위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는데, 발행부수를 들며 ‘1등 신문’을 운운하는 모습이 바로 그렇다.
정치권력은 렌즈를 통해 전달되는 상이 자신에게 유리하기를 희망하고, 미디어권력은 어떻게든 자신의 목표를 위해 렌즈의 힘을 발휘하고 싶어 한다(물론 언론이라고 해도 다양한 개별 언론사가 있고 그 안에서도 사주와 일선 기자들 등 여러 주체들의 이해관계가 있지만, 이 정도는 공통점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두 가지가 꼭 상충하는 것은 아닌 만큼 협력과 반목이 이뤄지는데, 극명한 예로 참여정부와 3대 보수일간지, 속칭 ‘조중동’ 사이의 공방을 꼽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은 후보시절부터 해당 언론들에 대한 직접적 대립각을 세웠고 그들 역시 기본적 저널리즘 규범을 벗어날 정도로 악의적 비난을 구사했다. 그런데 한편에서는 정부가 그 중 중앙일보에 대해서만 따로 친화 제스쳐를 보내는 한층 복합적인 관계였다.
정치권력이 미디어권력에 압력을 행사하는 것은 독재시절에는 보도지침과 경영개입 등으로, 민주화 이후에는 정보 통제나 기자실 같은 제도 손보기 등으로 이뤄졌다. 반면 미디어권력이 정치권력에 힘을 과시하는 방법은 오로지 사안들을 발굴하고 틀을 씌우는 것 뿐이다. 그렇기에 더 극명하게 사안을 포장해낼 수록, 즉 큰 칭송과 엄청난 비난이 널뛰기를 하며 그것으로 여론의 반응을 크고 빠르게 얻어낼수록 강력한 힘을 자랑할 수 있다. 즉 희망은 칭송으로 실망은 좌절과 혐오로 포장해낼 동기가 충분하다. 미디어가 정치현실, 그리고 그 정점에 있는 대통령을 띄우고 때리며 현상을 강력하게 증폭해내는 것은 권력이라는 관계로 볼 때 언론에 있어서 본연적 기능, 혹은 관점에 따라서는 먹음직한 독사과인 셈이다.
열광과 정치혐오의 양상
누군가에 대한 열광을 만들어내는 것은, 정치참여자 속성으로도 산업적 이득으로서도 양상이 선명하게 보인다. 언론사가 지지하는 정치인이 정치권력을 확보하도록 여론화로 돕는 것이 정치참여고, 특정 정치인 지지자 집단에게 우리 편이라는 환심을 사들임으로써 그들에게(또는 그들에게 광고를 보여주고 싶은 이들에게) 영향력을 확대하는 것이 산업적 이득이다.
반면 실망을 증폭시키는 것은 특정 정치인에 대한 안티를 넘어 종종 정치 자체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기에 더 미묘한 부분이 있다. 정치참여자라는 속성에 대해서는, 정치혐오를 조장하여 반정치적 태도를 유도하는 행위 자체가 정치의 힘을 약화함으로써 한국 사회 보수 기득권이 권력을 지키는 전략이라고 최장집 등 정치학자들이 주장해온 바 있다. 그런 맥락에서 현재도 대선공정보도실천위원회 같은 곳은 보수 대형언론들이 편파적, 정치혐오적 보도로 투표율 저하를 유도한다는 의심을 자주 표현해왔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개혁/진보성향 언론이나 개인들도 정치 전반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현상을 설명하기 힘들다. 이데올로기적으로 포섭되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편리한 해설보다는, 정치 혐오가 산업적 측면에서 유리하다는 현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작성하는 이들도 더 간편하고, 향유하는 이들도 더 안락하게 받아들인다. 우선, 부정적 충격효과로 선정주의 쾌락을 부여하는 것이 뉴스 주목 가치를 높이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점은 애초부터 저널리즘의 오랜 골칫거리다. 나아가 갈등을 불편하게 여기며 해소를 바라는 사회적 인식에 편승하는 쪽이 폭 넓은 호응을 얻기 용이한데, 하필이면 정치는 바로 사회적 갈등의 제도화된 조율 과정이다. 갈등 자체를 부정적으로 본다면 당연히 정치 과정 전체가 부정적인 것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주목은 높이고 갈등 과정은 폄하하는 패턴으로는 가장 대표적으로 양비론이 있고, 또는 단편적인 부정적 요소를 발굴하여 최대한 증폭하는 ‘가차 저널리즘’ 등이 있다. 한편, 정치 소식을 더 많이 소비하게 만드는 것도 산업적 과제인 만큼 다시금 열광의 동원이 필요하다. 바로 이런 지점에서 기성 정치 바깥의 초인이 나타나서 항상 싸우는 정치판을 정리해줄 것이라는 식의 내러티브가 등장 기회를 얻는다. 나아가 그 위에는 사회적 갈등의 세부요인보다는 당선이라는 승부의 세세한 추이에만 몰입하는 ‘경마 저널리즘’이 더해진다. 반면 열광과 혐오 속에 만들어지는 이미지화와 정책 현실 사이를 연결해주는 보도는, 만들기도 어려우며 독자에게 즉각적 호응을 끌어내기도 힘들기에 우선순위가 밀려난다.
개선의 관건은 이해관계의 활용
언론이 대통령과 예비후보들을 열광과 혐오의 롤러코스터에 태운다고 한들 사람들이 받는 영향이 미미하다면 사실 크게 신경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미디어 환경의 발달, 특히 온라인을 매개로 한 뉴스 소비의 ‘탈묶음 현상’(기사가 실린 매체를 통째로 읽지 않고도 특정 기사를 뽑아 읽을 수 있게 됨)과 소셜네트워크를 통한 큐레이션 등으로 인해 전통적 대형 언론사들의 의제설정력이 저하되었다는 이야기도 흔하게 들린다.
그러나 정치참여와 주목을 노리는 것은 특정 언론사들의 속성이라기보다는 미디어를 통해 정치 사안을 소통하는 주체들 누구에게나 공통된 지점이다. 더 스케일과 속도가 증가하고 복합적으로 얽히게 된 뉴스 경로 속에서, 열광과 혐오로 정치인의 평가를 단순화하는 기존 언론의 문제들은 증폭되기 쉽다. 다만 그 사이에서 일시적으로 균열의 가능성이 생기기도 하기에, 미국 퓨(Pew) 리서치의 조사 결과처럼 온라인에서 한쪽으로는 의견의 양극화가 이루어지면서도 동시에 다른 쪽에서는 반대 의견도 많이 접한다는 양가적 현상이 발견된다.
이런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언론이 어떤 식의 보도를 해야 하는지 규범적인 접근은 이미 덧붙일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언론계 안팎에서 자주 제기되었다. 유권자 중심 보도, 정책의 입체적 비교, 지역감정 등 정치혐오 조장 보도 지양, 기계적 객관성이 아닌 종합적 공정성의 보도 가치, 팩트 체킹 기능 강화 등 바람직하고도 중요한 목표점들이 넘친다.
하지만 정작 관건은 규범을 넘어 실제 인센티브를 고안하는 것이고, 그런 의미에서 산업적 이해관계의 다른 축인 독자들의 뉴스 소비 역시 함께 성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뭉뚱그려서 정치 자체를 혐오하는 것을 피해야함과 마찬가지로, ‘한국 언론’ 자체를 무시하기보다는 극소수라고 할지라도 유용한 정치 보도들을 체계적으로 발굴하고 소비해줌으로써 장려해낼 필요가 있다. 개인, 개인들이 함께 만들어 내는 네트워크, 그런 것을 돕는 또 다른 미디어서비스들의 차원에서 그런 변화를 일구어낼 때, 미디어권력 또한 방향을 틀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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