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시민 별곡 –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기획회의 070615]

!@#… 하지만 거꾸로 소시민 정서 위주의 작품들만 남발되면, 짜증이 난다는 단점도 있다. 어디까지나 중요한 건 다양한 선택권.

소시민 별곡 –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

김낙호(만화연구가)

당신의 꿈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떤 답변을 할 수 있을까. 한 때는 너도나도 세계정복이니 세계평화니 하다못해 남북통일이라고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뭔가 멀리 있는 커다란 것에 대한 동경, 자신에게 아직 남아있는 성장 가능성에 대한 희망이다. 하지만 나름대로 정상적인(?) 경로로 나이를 먹고 세상에 적응하며 사회인이 된 사람이라면 목표의 거리 범위가 더 짧아지고 자신의 성장 속도가 어느 선을 넘지 못다는 것을 안다. 언젠가 품었던 것과 지금 품고 있는 것 사이의 괴리감에 괴로워한다면 몰라도, 만약 스스로 잘 받아들이기만 한다면 그것 자체로는 특별히 아깝거나 불행한 것도 아니다. 그저 세계평화에서 아파트 이웃 간의 평화로 목표가 옮겨가고, 세계정복은 직장의 철밥통 자리 정복으로 이동했을 뿐. 호연지기니 야망이니 어쩌니 교육받으며 자라난 교육환경과는 달리, 세상은 대부분 소시민적 가치로 가득하다. 그리고 자연스럽게도, 바로 그 속에 훨씬 더 많은 삶의 희로애락이 담겨있기 마련이다.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전3권/다카하시 루미코 作/학산문화사)는 소시민적 희로애락의 명품 컬렉션이다. 다카하시 루미코는 한국에서도 많은 팬층을 거느리고 있는 ‘란마1/2’이나 ‘이누야샤’ 같은 떠들썩한 대중적 소년만화로 유명한 작가이기는 하지만, 사실은 놀랄 만큼 다양한 폭의 정서를 담은 이야기꾼이라는 점 역시 적지 않게 알려져 있다. 인간성의 의미에 대한 섬세한 시선을 담고 있는 공포물 연작 『인어 시리즈』라든지, 권투선수와 예비 수녀의 이야기를 통해서 성숙한 유쾌함을 던져주는 『1파운드의 복음』같은 작품들은 그녀가 단순한 유행 제조기가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그 정점에 서 있는 것이 바로 다카하시 루미코가 지난 십 수년간 1년에 한 편씩 연례행사처럼 발표하는 소시민 정서의 단편 연작이다. 이 단편들은 줄거리로서 서로 연관되어 있지는 않지만, 소시민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원고가 축적되면 수년에 한번씩 이 작품들이 묶여서 단행본으로 나오는데, 현재까지 나온 3권의 단편집이 최근 국내에서 하나의 세트로 묶여서 출간되었다.

세 권의 책은 비교적 느슨하긴 하지만 각각 나름의 시선을 담고 있다. 첫 번째 단편집인『P의 비극』은 주로 주부/ 엄마의 시선, 두 번째 책인 『전무의 개』는 샐러리맨 남편의 시선, 그리고 세 번째 책인 『붉은 꽃다발』은 가족의 시선에서 그려진다. 그 시선들 속에서 다루는 소재들은 사실 약간만 거칠게 나가자면 아주 극단적인 이야기로 갈만한 것들 투성이다. 불륜, 가족동반 자살여행, 고부 갈등, 회사 내 인맥을 둘러싼 권력 암투…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다. 대부분의 이야기는 결국 일련의 소동을 겪고 나서 해결도 절망도 애매한 상태지만 각자가 아주 약간은 더 현명해진 듯한 이야기, 즉 잔학하지도 순진하지도 않은 블랙 코미디의 범주로 안전하게 들어간다. 기본적으로 바탕에 깔려있는 소심하지만 솔직한 인간 심성에 대한 낙관, 북적거리며 서로 충돌하지만 결국 어떤 식으로는 서로 적당히 잘 굴러가곤 하는 인간사에 대한 애정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작가 특유의 일관성 있는 유머감각은 그 어떤 현실적으로 암울한 소재라도 재미있는 이야기 거리이자 소시민적 감정 이입의 대상으로 만들어준다.

예를 들어 두 번째 단편의 표제작인 『전무의 개』를 한번 보자. 샐러리맨 아버지가 휴가 간 전무의 고급견을 집으로 맡아온다. 그의 마음에는 전무의 마음에 들어 출세가도를 달리겠다는 마음과 개나 맡아줘야 한다는 비굴함이 함께 한다. 그리고 서민 가정에 들어선 전무의 까다로운 고급견은, 집 안에서 가장 상전 노릇을 한다. 전무의 개는 이 가정에서 전무의 노릇을 하는 셈이고, 어쩌면 우리 주인공 샐러리맨이야말로 비유적 의미로 전무의 ‘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꽤 깊이 있는 인생 이야기가 결코 씁쓸하지 않게, 서민 가정집과 눈만 높은 고급견, 철없는 어린이들의 장난 등의 요소들이 한껏 섞이는 시끌법적한 유쾌한 난리통 코미디로 펼쳐진다. 유쾌한 이야기를 보며 나오는 박장대소와 공감대의 은근한 미소를 같이 자아내는 실로 노련한 솜씨다. 이런 소시민적 희로애락의 핵심인 동시대적 호흡 역시 섬세하고 유지되고 있는데, 3권의 마지막 작품인 ‘퍼머넌트 러브’에서는 무려 욘사마 표 한류 붐이 소재로 다루어지고 있을 정도다.

재미를 만들어내는 또 다른 요소는 바로 이 작품들이 어디까지나 대중적인 만화 작가가 그려낸 대중적 재미를 추구하는 이야기들이라는 점이다. 현실적인 소재들을 담아내고 소시민적인 공감대를 자아낸다고는 하지만, 이 작품집의 단편들은 결코 일상 체험 일기의 길을 걷지 않는다. 오히려 현실적인 배경과 인물들을 놓고는, 그들의 현실적이고 안정적인 생활을 뒤흔드는 상상력 풍부한 엉뚱한 사건에 휘말리게 한다. 난데없는 사정으로 펭귄을 아파트에서 키워야 한다든지, 집의 수호신 정령 때문에 이사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든지, 소중한 집 앞이 어느 틈에 동네 쓰레기장이 된다든지 하는 식이다. 그리고 이런 황당한 문제에 봉착한 주인공들은 누구도 난데없이 초현실적인 힘을 발휘하지 않고, 비상식적으로 대범하게 사태를 극복해내지 못한다. 그저 당황하면서, 자신들의 생활과 소박한 꿈을 지켜내기 위해서 지극히 소시민적으로 대처할 뿐이다. 그 과정 속에서 누르고 있던 작은 희망들, 그것을 잃지 않기 위하여 고군분투하려는 의지, 작은 것에 화내는 분노, 그리고 어떻게든 해소를 한 후 느끼는 기쁨 등 다양한 모습들이 펼쳐진다. 일상적 세계에 비일상적인 사건을 던져줌으로써, 오히려 소시민적 생활 속에 담긴 풍부한 희로애락을 제대로 건드리는 셈이다.

주류 소년만화 히트작으로 단련된 편안한 그림체는 이런 이야기들을 확고하게 받쳐주고 있다. 게다가 장편 작가가 짧은 페이지 안에 많은 이야기를 담아내는 압축된 단편임에도 이야기의 페이스를 잃어버리지 않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데, 개별 캐릭터 매력의 강조 같은 형식상의 과욕을 부리지 않고 우직하게 이야기 자체의 효과적 전달에 초점을 맞추는 담백한 화면연출이 이를 가능하게 해준다. 단편집이라면 실험성이라든지 자유롭게 비틀어진 직설화법을 기대한 독자들에게는 만족스럽지 못하겠지만, 대중성 있는 일류 작가가 그려내는 유쾌쌉쌀한 인생극장 연작이라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면 값진 보석에 다름없다. 대중 장르만화의 현실도피성 기질에 질리고, 반면에 ‘작가주의’ 만화들의 낯설음에도 거부감이 드는 독자들에게 대중성과 인생의 깊이(…)를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좋은 경험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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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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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하시 루미코 걸작 단편집 박스세트
다카하시 루미코 지음/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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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소시민 별곡 – 『다카하시 루미코 걸작단편집』[기획회의 070615]

Comments


  1. 루미코씨 단편집은 은근히 부담되요;;; 읽기 쉽지 않음;;; 나도 소시민인데 왜 소시민을 보면 이렇게 열을 받는지;;; 끌끌;;

  2. !@#… 기린아님/ 몸은 소시민, 마음은 세계대통령이라서 그런지도… 핫핫핫.

  3. 안녕하세요. 눈팅만 하다 처음 글을 남기네요.
    위의 소개글을 읽고 주문, 얼마전에 다 읽었습니다. 메종일각이나 1파운드의 복음을 그냥 그렇게 본 터라 별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너무 좋네요. 하루에 3편씩 아껴 봤는데 일주일이 즐거웠습니다. 낭만을 파는 상인과 헬프가 특히 좋았어요.

    그래서 감사의 말을 드림과 함께, 이와 비슷한 작품 추천을 부탁드리려고 합니다. 내공있는 작가의 단편집으로, 삶을 되돌아 볼 계기를 마련해주는 작품이라면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림은 신경쓰지 않으니 마음놓고 추천해주시면 감사드리겠습니다.

  4. !@#… 소봉님/ 삶을 되돌아본다면… 음. 다니구치 지로의 ‘느티나무의 선물’도 좋고(가부장 전통가정에 너무 거부감이 없으시다면), 박흥용의 ‘호두나무 왼쪽 길로’도 좋고(박흥용의 베스트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만. 게다가 단편집이라기보다는 옴니버스), 순정만화에 대한 거리감이 없으시다면 김혜린 단편집 ‘노래하는 돌’ 이나 요시나가 후미의 ‘사랑해야 하는 딸들’같은 것도 좋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