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한 엘리트 독재의 허실 – 『슈퍼맨: 레드 선』[기획회의 272호]

!@#… 물론 이 레드썬이 아님(당연하지). 참고로 한국어판의 번역 품질에 대해서는 상당히 심각한 문제제기(클릭)가 나온 바 있으니 참조요망.

 

완벽한 엘리트 독재의 허실 – 『슈퍼맨: 레드 선』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사회의 부실함(이 나에게 주는 피해)에 스트레스 받는 나날들로부터 잠시 도피할 수 있는 가장 간편한 방법은, 바로 초월적 존재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이다. 눈앞에 쌓인 거대한 문제들을 해결해 줄 능력이 있는 존재가 있고, 그가 활약하는 이야기를 나눈다. 아예 스케일 크게 가면 종교와 신화가 되겠지만, 좀 더 인간의 관점에서 소소하게 적용하고 싶다면 초인 정도로 충분하다. 리얼리즘을 원하면 영웅적 인간을 상상하고, 분방하고 호쾌한 상상을 원하면 슈퍼히어로를 그려내면 된다. 그런데 부딪히게 되는 문제는, 초인이 문제를 해결하는 이야기라면 그 속에 정작 인간들의 역할은 애매해진다는 것이다. 초인이 물리치는 외부의 거악에 같이 분개하며, 그가 지켜내는 우리 사회의 이념적 지향과 이상향에 동의하며 박수를 칠 수 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 그렇기에 그 방향으로 부주의하게 너무 멀리 밀고 나가면, 권위주의적 전체주의를 지지하는 모양새가 될 우려가 있다. 그런데 그 문제를 보여주기에 가장 적합한 슈퍼히어로 캐릭터라면 역시 ‘슈퍼맨’만한 이가 없다.

『슈퍼맨: 레드 선』(마크 밀라 글, 여러 작가 그림 / 시공사)는 슈퍼맨이라는 캐릭터가 지닌 과거 설정의 중요한 요소 하나를 살짝 비틀어 만들어낸 가상역사(?)물이다. 그것은 바로 멸망한 별 크립톤에서 지구로 떨어진 슈퍼맨이, 약간의 궤도 차이로 인하여 미국이 아닌 소련에 떨어지는 것이다. 미국의 소시민적 보수 가치의 상징과 같은 캔자스 대신 우크라이나의 농부 부부의 손에 의해 키워지고, 미국식 자본주의 급성장이 아니라 소비에트 공산주의 혁명의 시대를 살게 된다. 원래 스토리에서는 클락 켄트라는 이름으로 기자로 일하며 비밀리에 영웅노릇을 하던 슈퍼맨은, 이 스토리에서는 국가의 전면에 나서는 인민영웅이 된다. 그리고 슈퍼맨이 주도하는 소련식 평화 번영을 세계로 확산하려는 노력, 그리고 그에 반대하는 미국의 모습이 익숙한 DC코믹스 계열 캐릭터들의 조금씩 혹은 많이 달라진 요소들과 함께 펼쳐진다.

『레드 선』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통해서 제기하는 것은, 정치학의 오래된 생각거리인 “완벽한 엘리트 독재”의 문제다. 물론 실제 세계에는 권력의지에 오염되지 않는 이상적 엘리트들의 체제가 유지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하고(박정희 신봉이 말기 암 수준에 도달한 자들이라면 어떻게 생각할지 몰라도), 애초에 정말로 모든 것이 우월한 엘리트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착각이다. 그래서 그나마 민주주의의 권력분립에 의한 견제 시스템이 대규모 인류사회를 가장 덜 망가지게 만들 수 있다고 얼추 역사적 학습을 한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만약 그런 엘리트가 있다면 어떨까. 모든 것을 감시할 수 있는 슈퍼맨의 힘을 통해 안정적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것의 반대편에는 개인의 자유에 대한 억압이 있고, 이상적 초인에 의한 지배에 반기를 들고 개인의 자유를 되찾고자 하는 것은 평화적 번영을 해치는 테러리즘이 되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그래도 인간들은 자신들의 자유를 소중히 여겨서 결국 그런 엘리트 독재를 뒤집을 것이라는 식의 순진한 희망은 이 작품에는 설 자리가 없다. 슈퍼맨은 그냥 완벽하기 때문이다. 사회의 평화라는 가치를 정의로 세워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추구하고, 사심에 의한 권력욕 따위는 눈꼽만큼도 없으며, 야망에 의한 것이 아니라 우월한 능력에 의해 확실한 엘리트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다. 그래도 감시받지 않는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를 걸고 그 체제에 반기를 들어야할까?

슈퍼맨이라는 초인의 이상적 지배에 저항하는 것은, 그의 지배에 완전히 복종할 만한 일반인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초월적 능력을 지닌 이들이다. 슈퍼맨의 숙적인 인간 천재 렉스 루터는 이 스토리에서는 미국 대통령이 되어,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인간들의 영웅으로 맞선다. 자경단의 상징인 배트맨도 슈퍼맨에게 저항하는 테러리스트다. 원더우먼도 슈퍼맨에게 협력하다가 결국 맞서는 역할이다. 그런데 확실한 인류 공동의 적으로 설정할 수 있는 초월적 독재자가 있기에 이들도 하나의 진영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만약 그런 저항이 성공한다면 어떤 세상이 펼쳐질 것인가.

흥미롭게도, 사실 이런 극단적인 역할 전환극이 아니라 원래 설정으로 치더라도 슈퍼맨은 비슷한 길을 걸을 가능성이 다분하다. 마찬가지로 대안스토리이기는 하지만 좀 더 원래 설정에 충실한 『배트맨: 다크나이트 리턴즈』에서 슈퍼맨은 보수주의 레이건 정부의 요원이다. 자국 내 평화를 가능하게 하는 국가 이익 추구에 충실하며, 공권력보다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 범죄를 소탕하려는 배트맨과 대결한다. 애초에 고전적 슈퍼맨 이야기들에서도, 그는 인류 평화를 지키기 위해 외계인도 국내외 슈퍼악당도 테러단체도 물리치는 것에 조금도 망설임이 없다. 그저 세계를 물리적 파괴로부터 지킬 뿐 잘못되어가는 권력을 뒤집을 궁리도, 인간 사회의 모순을 직시하지도 않는다. 다만 미국인이기에, 그가 주로 지키는 사회가 개인의 자유를 중시하는 가치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만약 그가 지키는 사회의 가치가 노동해방이고 그것을 위해 개인의 자유 제한 같은 것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식이라면, 그리고 여전히 슈퍼맨은 의문을 품지 않는 성격이라면, 『레드 선』 같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작품 만큼 대안스토리가 평단과 독자들의 호응을 받을 수 있는 경우는, 아무리 설정이 바뀌어도 그 캐릭터라면 그 조건에서는 이렇게 행동할 것이라는 개연성의 공감대가 있을 때 뿐이다.

전통 슈퍼히어로물 세계의 설정을 살짝 비틀어서 현실적 문제들을 가미하는 내용을 대중적으로 성공시키는 재능을 여러번 선보인 마크 밀라 답게, 이야기는 흥미로운 화두로 가득하다. 다만 앨런 무어의 『워치멘』과 달리, 화두로 던진 것을 직접 더 깊게 대화로 파고들며 중층적 모순을 파고들기보다는 바로 액션활극으로 넘어가곤 한다. 따라서 더 많은 것을 생각하는 것은 작가의 질문보다는 독자의 몫이 된다. 하지만 이런 무거울 수 있는 소재를 다루는 것 치고는 그만큼 오락적 재미가 의외로 대단히 뛰어나다. 소재의 의외성이 의존하기보다, 기존 스토리들에서 성립된 여러 캐릭터들의 능력들로 벌어지는 위기와 극복과정의 극적 긴장감이 탁월하고, 그것을 재현하는 그림과 연출 역시 골든에이지 고전 만화에 대한 향수와 현대적 구도들을 조화시키며 재미를 준다. 여러모로, 『슈퍼맨: 레드 선』은 웰메이드 작품이라는 흔하게 남용되는 수식어의 본래 의미에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는 작품이다.

슈퍼맨 : 레드 선
마크 밀러 외 지음, 최원서 옮김/시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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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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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thoughts on “완벽한 엘리트 독재의 허실 – 『슈퍼맨: 레드 선』[기획회의 27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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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Pingback by Nakho Kim

    [캡콜닷넷업뎃] 완벽한 엘리트 독재의 허실 – 『슈퍼맨: 레드 선』(기획회의 272호) http://capcold.net/blog/5973 | 그냥 대충 전복적 설정의 재미로만 읽어도 무방하긴 하겠지만.

  2. Pingback by onoma_

    Superman – Red Son : 충격과 공포…

    전부터 간헐적으로 이어져오기는 했지만, 몇 년 전부터 시공사를 비롯한 몇몇 출판사가 해외 그래픽 노벨들을 본격적으로 번역해 오고 있다. 이 덕분에 우리는 소위 “위대한 1986년”[각주:1] 이후 발간된 현대 그래픽 노벨 명작들 가운데 일부를 우리말로 소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시공사가 내놓은 책이 바로 “슈퍼맨: 레드 선”이다. 우리나라에서 만화책이 갖는 인지도와 편견을 생각할 때, 나는 이들의 지속적인 시도에 감사를 마…

Comments


  1. 막판의 반전도 일품이지요. 수퍼맨 본명 성씨를 그렇게 엮을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능….

  2. !@#… 기불이님/ 실로 우아한 마무리죠! 같은 스토리작가의 이후 다른 히트작들(시빌워, 원티드, 킥애스 외)에서는 다시 보지 못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