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의 본질 – <루쿠루쿠> [경향신문 만화풍속사]

악의 본질 – <루쿠루쿠>

정의의 주인공이 사악한 악당을 물리친다는 설정은 확실히 매력적이다. 사람들은 선과 악이 명백하게 잘 나누어져 있고 그 중 결국 선이 승리하기를 바라며, 그 ‘선’이 하필이면 자신들을 위해주는 자들이기를 원한다. 그리고 이런 선악 구도를 가장 확실하게 상징화시킨 이야기 가운데 하나는 바로 기독교 신앙이다. 천사와 악마, 각각의 군단의 대격돌, 그리고 예언되어 있는 천사군의 승리. 이야기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동안 사랑받아온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의 궁극적인 구현인 셈이다.

하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의 풍속도는 이런 명쾌한 이야기와는 꽤 거리가 멀다. 선악의 경계선은 어디며, 선은 과연 어떤 경우라도 선인가? 뭐, 꼭 머리를 쥐어뜯으며 엄청나게 철학적으로 접근해야할 필요는 없다. 위트와 풍자, 뼈있는 농담으로 이런 지점들을 꼬집어내는 것이 더 핵심을 짚어낼 가능성이 크니까 말이다. 일본 작가 아사리 요시토의 <루쿠루쿠>(3권 발행중 / 북박스)가 좋은 사례인데, 여기서는 ‘지옥의 공주’로 불리우는 강력한 악마가 귀여운 소녀의 모습을 하고 남자주인공의 집안일을 해주는 역할로 등장한다. 지옥이 너무나 과밀인구가 되어버려서, 악마들이 나서서 인간들이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선도해주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저의를 수상하게 여기는 천사들 역시 인간계로 내려와서 이들과 맞서려고 하는데, 스님의 몸에  빙의되어 인간계로 내려온다든지 하는 등 좌충우돌 투성이다. 악마들이 쓰레기를 줍고 할머니가 길 건너는 것을 도와주는데 천사들이 악마의 ‘계략’을 막으려면? “쓰레기를 버리고 할머니를 넘어트려야지! 에에…자, 잠깐만!” 이런 식으로 말문이 막히는 천사의 모습이 주는 촌철살인의 블랙유머가 일품이다. 학원 코미디물에나 어울린다고 생각할 법한 둥글둥글하고 귀여운 그림체와 연출 속에 담겨져 있기에 그 울림은 더욱 크다.

어이없이 웃다보면, 뜨끔해진다. “우리는 정의를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아! 폭력을 막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지!”라는 천사의 대사가 이상하게도 낯익기 때문이다. 전쟁을 입에 물고 다니는 어떤 미국 침팬지를 떠올리든, 아직도 좌파공세 따위가 잘만 통하는 어떤 후진 사회를 떠올리든, 인터넷 게시판에서 뛰노는 악플러들을 떠올리든 말이다. 선과 악을 나누고, 하필이면 자신이 서있는 쪽이 선이라고  굳게 믿는 자들. 사실관계 확인과 토론이나 근거제시에는 인색하면서, 타인비방과 자기미화에는 놀라운 정열을 보여주는 자들. 이 복잡한 세상에서 단 하나 확실한 ‘악’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자기 이외의 모든 것들을 악으로 몰아붙이는 행위 그 자체다. 바로 그런 악이 뿌리 뽑히는 권선징악 정도는 꿈꿔 보아도 좋지 않을까.
[경향신문 04.12.03]

(* 주: 원출처는 경향신문 금요 만화 전문 섹션 ‘펀’의 칼럼인 <만화풍속사>입니다. 격주로 박인하 교수와 번갈아가면서 쓰고 있는 일종의 태그팀 같은 것이니 만큼, 같이 놓고 보면 더욱 재밌을 겁니다. 여기 올라오는 것은 신문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원본’입니다… 별 차이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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