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울의 움직이는 재앙>을 보고 오다

(애니품평이지만… 그냥 카테고리는 만화품평으로 넣었다. 서찬휘님 블로그에서 트랙백.)

!@#…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고 오다. 이후는 당연히 스포일러 주의. 아니 사실 스포일러라도 많이 보고 가는게 사실 관람에 도움이 될지도. 여하튼 딱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이런 폭탄맞은 시나리오라도, 미야자키 브랜드가 붙으면 히트치는구나!” -_-; 뭐랄까, 미야자키 할아버지가 늙으막에 린타로나 제리 브룩하이머 같은 화끈하고 골빈 선남선녀 대파괴 폭죽쑈에 손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흔히 capcold식 표현으로, “재앙영화”. 영화 자체가 재앙이라는 말이다.

!@#… 노장에게 새로운 것을 바라기보다 그 원숙미를 즐기라면서 호평을 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원숙은 커녕 자기가 쌓아올렸던 좋은 실력을 몽창 날려먹은 희대의 괴작으로 보였다. 무슨 과시욕에 사로잡힌 얼치기 신인 초짜 감독 마냥, 세계관도 채 제대로 소화하지 못하고 스펙타클 이벤트에 끌려다니기 바쁘다. 이건 유치한게 아니라, 그냥 골빈 거다. 작품 속에서, 마법의 힘을 제거당하고 치매 할멈의 모습으로 폭삭 찌그러져버린 황야의 마녀 – 그것이야말로 이번 작품에서 미야자키의 자화상이라고 할 수 있다.

!@#… 재미있게 보았다는 분들을 비난할 생각은 아니다. 뭐 나름대로 다들 이유가 있겠지. 그 중에는 합리적인 이유도 있을테고, 그냥 미야자키니까 하면서 부화뇌동하는 자기사고 제로의 바보들도 여럿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왜 이걸 재앙이라고 생각하는지 정리를 좀 해놓고 싶다. 시나리오의 뭐가 그리 노골적으로 불만이라는 것인가? 딱 3가지만 정리해보자.

1) 주인공의 갈등과 성장은 밥말아 먹었는가: <마녀의 택급편>에서 보여준 소녀의 섬세한 성장과정. 그 마법은 이 영화에서는 완전소멸이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에게 걸린 ‘늙는 저주’는 결국 마음의 활력을 반영한다. 마음이 소녀적인 활력과 사랑에 눈뜰 때, 그리고 무덤덤한 자기비하를 잊어버리고 잠을 잘 때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소녀로 돌아오는 소피. 이건 꽤 중요한 모티브이며, 작품을 끌어가는 갈등이자 원동력이 되어주었어야 할 물건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해결하기 위해서 선택과 희생을 치루며 결국 새로운 성장을 이루면서 끝나는 기승전결을 완전히 무시. 그냥 하울만 기다리고 쫒아다니다 보니 어느틈에 저주는 해결. 뜬금없음의 극치인 것이, 거의 원더풀데이즈 급이다. 동기 없이 돌아다니기는 하울 역시 대동소이하지만 말이다. 전쟁 중재? 양쪽의 정치인들을 만나가면서 설전을 벌이거나, 혹은 그걸 두려워서 피하거나. 그냥 흐린 하늘을 날라다니면서 곡예쑈한다고 뭘 해결한다는 건가. 주인공들의 성장은 설정상 주어진 것일 뿐, 시나리오 상에서의 설득 과정이 뭉텅 빠져있다.

2) 세계관도 설명 못하면서 뭘 그리 벌려놓는가: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에서는 전쟁으로 치닫을 수 밖에 없는 인간들의 욕망, 그리고 박애 넘치는 해결과정을 방대한 세계관과 함께 자연스럽게 전달해낸다. <하울...>은 도저히 같은 감독이라고 상상도 할 수 없다. 하울에서 전쟁을 한다는 그 양쪽 나라의 논리는 전혀 밝혀지지 않고 있으며, 일반인/정치가/마법사/정령/악마 등 여러 종족과 계층들의 관계 역시 얼렁뚱땅 설명 없이 넘어간다. 설명 없어도 이해할 만한 거라면 좋겠지만, 스토리상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건너뛰는 것이다. 그래서 칼시퍼가 하울에게 들어가게 된 과거 회상에서 애초에 왜 칼시퍼가 지상으로 소환당했는지, 어째서 그 합체의 과정 속에서 하울은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하다못해 그 저주의 구체적인 내용이 뭔지(그냥 힘쓰다보면 괴물로 변한다는 거 말고, 제대로 된 ‘규칙’말이다) 모두 생략. 그렇기 때문에 후반에 들어가서는 모든 스토리 전개의 논리가 급격하게 붕괴된다. 전반에 세계관 구축을 하고 후반에 그 속에서 사건들이 벌어지고 수습되는 구조여야 할 것이, 세계관 구축도 안된 상태에서 사건만 뜬금없이 계속 연속되다보니 망가지는 것이다. 덕분에 소피는 ‘쓸데없이’ 성을 무너트렸다가 다시 세우고,  하울은 왜 싸우는지도 모르는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뭘 하는지도 모르겠지만 여튼 고생하고 다닌다. <하울...>에서는 스토리 전개 자체에 매우 중요한 세계관 설명이 뭉텅이로 빠졌다. 불친절한 시나리오와 멍청한 시나리오는 한끝 차이다; 유감스럽게도 <하울...>은 후자다. 원작 소설을 찾아읽어보라고? 제대로 된 시나리오 각색에 실패했다는 시인이겠지. 여튼, <하울...>의 시나리오는 작품 속 세계의 구동 원리를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것에 처절하게 실패하고 있고, 그 덕분에 결국 남는 건 미야자키 하야오표 ‘코드’들 뿐이다. 날라다니다가 추락할 때 손을 잡아준다든지, 자연 평원과 기계 무기의 대립된 이미지라든지, 고풍스러운 환타지 비행선들의 공중전이라든지 말이다. 각각 그 자체로만 보면 매력적일 지라도, 통합된 추동력 없이는 키치처럼 보일 뿐이다. <온 유어 마크>에서 무려 6분 만에 모든 세계관을 다 표현하고도 여유가 남아서 복합 선택형 스토리구조까지 도입한 천재감독은 도대체 어디로 간건가?

3)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은 디자인에서 나오는 게 아니다: <이웃의 토토로>에서 보여준 환타지 캐릭터들의 활기찬 생명력도 모두 소멸. 그냥 처진 눈에 분주하게 제자리를 돌기만 할 뿐인 개는 아무 매력이 없다. 그냥 쫒아다니면서 가끔 도움을 주기만 하는 허수아비도 마찬가지다. 갈등도 뭣도 없는 꼬마 마법사 역시 마찬가지. 뭐랄까, 마치 <포카혼타스> 이후로 점점 망가져 가던 디즈니 클래식의 동물조연들을 보고 있는 느낌. 그 난잡한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에서조차 이렇게 망가지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임무와 역할과 상징이 있는 캐릭터가 아니면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천공의 성 라퓨타>의 거신병 같은 초절정 사연만땅 조연 캐릭터는 다시 만나기 힘든 것인가. 개연성 없는 주연 캐릭터들은 앞에서 이미 언급했으니 패스.

!@#… 지금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전 세계의 관객들을 대상으로 실험을 하고 있는 중이다. “세상에, 이래도 나를 추종할래?” 라는 도발이다. 출중한 이야기꾼으로 자기 입지를 확보해온 지브리, 그중에서도 미야자키 감독이 이렇게 망가질 줄이야. “너따위가 뭔데 대 감독님의 시나리오를 씹는거냐?”라고 항의하는 분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그런 대 감독이, 나 따위한테도 씹힐만한 시나리오를 들고왔는데 어쩌란 말이냐!”

!@#… 만약 쓸데없는 전쟁 이야기가 빠지고 마법사들끼리의 세력/파벌 다툼이 중요한 축으로 다루어졌다면 어땠을까. 그럼 황야의 마녀도 선생님도 그렇게 낭비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울의 저주를 풀기 위해서는 소피가 자신의 저주를 푸는 것을 포기해야만 한다면? 소피의 자기희생과 진정한 성장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다못해 주인공이 고민하고 갈등하는 모습 정도는 구경할 수 있었을테지. 하울과 캘시퍼의 운명공동체적 애증관계가 좀더 잘 묘사되었더라면? 서로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아니 어쩔 수 없이 정들어버렸으면서도 힘으로 균형관계를 유지할 수 밖에 없는 묘한 긴장감이 돋보였을 것이다. 만약, 만약, 만약… 좀 더 낳은 시나리오가 될 수 있던 수많은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매력적인 프로젝트에서,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이런 물건이 탄생했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 뭐, 적어도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은 이래서는 “이번 것이 진짜 은퇴작이었습니다”라는 선언은 못할 것이다. 어서 설욕작을 새로 만들지 않으면, 막판에 치매성 졸작으로 자기 얼굴에 먹칠을 한 감독으로 대대로 기억당할테니까. 이것이 바로 나름대로 <하울...>의 의의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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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thoughts on “<하울의 움직이는 재앙>을 보고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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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울의 환장하는 성 01/04 00:34 잠보니스틱스
    하울의 재미없는 성, 매우 곤란하다. 01/03 11:59 책장이 멋있는 여자..
    하울의 움직이는 성을 보다가 01/03 01:18 쿠루쿠루(enterani)

Comments


  1. [네이버덧글 백업]
    – 제이 – 치매성 졸작;;; 뭔가 설명이 안되는 부분 때문에 이건 tv용 26화짜리 에니였으면 어땠을까 하고 보게되긴 했습니다 ㅎㅎ;; 2005/01/03 00:32

    – 쿠쿠 – 히야… 2005/01/03 09:22

    – BeEye – –; 저만 ‘TV판이나 OVA 였으면 어땠을까?’라고 생각한건 아니었네요. 2005/01/03 11:34

    – 잠본이 – 확실히 시나리오만 좀 더 나았어도 보기가 편했을텐데 말이죠…뜬금없음의 연속이라서. 2005/01/04 00:38

    – 기린아 – 저는 이 작품에 ‘곤조’가 들어 있었다는 것에 모든 것을 납득해 버렸습니다.(아아, 미야자키 할아범에 대한 믿음은 이리도 단단하단 말인가.-_-;;) 2005/01/04 12:49

    – 코믹도치 – 그의 작품들은 언제나 맘에 와닿는 스토리를 그리길래 이번에도 그런 기대를 하고 갔다가 대략 혼이 빠져서 나왔습니다 물론 좋아서가 아니라 아무리 생각해봐도 미야자키 작품으로 생각이 되질 않아서 였지요…(하울의 성 포스트를 쓸 맘도 않나더라는… ㅡ ㅡ;) 2005/01/04 22:25

    – 난나 – 낙호님의 모든 지적엔 공감하지만 저는 단순한 범작 혹은 졸작이라고 보진 않아요. < 세계를 상대로 도발>한다는 표현엔 공감하는데, 미야자키는 정말로 < 센과 치히로..> 이후 이야기 구성의 접근법을 < 의식적으로> 바꾸어 버린게 아닐까 하거든요. 이야기의 논리가 상당부분 무너진 대신 강력한 설화적 모티브를 중심에 두고, 앞뒤 맥락 잘라버린 배경을 느슨하게 펼쳐보이는 식으로요. 어찌보면 미야자키는 이제 이야기의 원형을 추적해서 현대적으로 구성해 나가기 보단 자신의 작품이 어떤 이야기의 원형이 되길 바라며 산만한 소재들을 그저 던져놓곤 뒤돌아 추이를 살피는 듯 합니다. 구조적인 약점을 들어 낙호님과 같이 실망한 분이 있다면, 저 같은 중년 관객(-_-)의 입장에선 설명되지 않은 이야기와 이미지들을 감상하는 재미도 만만치 않답니다. 굳이 그의 전작과 비교하진 않아요. 그저 어렴풋하게 짐작하고 지나쳐 가는 전쟁과 유사가족의 이미지들, < 개구리 왕자> 혹은 < 미녀와 야수>의 변형적 내러티브 등등을 물 흘러가듯 감상해 주는 거죠. 일종의 추상화가 아닐까 싶기도 한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웅변이 감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는건 대단한거죠. 이제 범상한 계몽주의자보단 위대한 애니메이션 아티스트로서 자신의 노년을 설계하는 건가, 미야자키.. 2005/01/05 16:11

    – 캡콜드 – !@#… 난나님/ 정말로 그렇다면, 제가 좋아하는 방향과는 다르지만 뭔가 발전하고 있는 모습이기는 하겠죠. 하지만 저는 좀 더 물리적인 이유가 있다는 쪽에 손을 들어주고 싶군요… 예를 들어, http://blog.paran.com/gazzet/3334273 같은. 2005/01/05 17:01

    – 난나 – 글 잘 읽었구요.. 이생각 저생각 하다가 두고보자 내부 게시판에 아예 감상문을 하나 통째로 써서 올렸답니다. 요새 게시판도 썰렁하기에.. 2005/01/05 22:17

    – 기타로망 – 하야오를 그렇게 좋아하진 않는 사람 입니다… 영화 재미있게 봤구요.
    당연 놀랄만한 작품이다.. 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하야오의 핵심 주제들은 연속된 작품에서 별로 달라지지 않고 전개 방식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수용자로서 기대하는 바가 크지 않습니다.
    돌아다니다 늦게 봤습니다만, 트랙백된 이 리뷰 혹은 감상문을 보고 있자니 유치하다는 생각만 드는건 어쩔 수 없군요.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고 하면, “이번 하야오 작품에서 ‘설명’을 들을 수 없고 친절하지 않다.” 인데, 초등학생입니까? 전작들이 그랬던 것 처럼 주저리주저리 설정에 설명을 덧붙이고, 캐릭터의 행위와 이야기의 전개가 개연성과 당위성을 확보되는 방식에 무척이나 길들여지셨던 모양이지만, 어떤이는 오히려 그런식 보다는 과감한 생략을 통해 수용자가 음미할 수 있는 여지를 두는편이 한층 ‘노련한’ 것이라고 느낄 수도 있습니다. 주변 캐릭터의 성격 및 특성 살리기도 과감하게 생략할 수 있는 것이고 그리 중요한게 아니라고 봅니다. 리뷰 쓰신분은 디즈니를 너무 좋아하시는건 아닌지.. 저는 신나고 즐거운 환타지를 하야오 식으로 잘 버무렸다고 평가하고 싶네요. 2005/08/09 10:04

    – 캡콜드 – !@#… 기타로망님/ 화내시는 건 자유지만, 자위행위 하는 것은 사절입니다. (본문에 언급된 제 디즈니에 대한 생각 하나조차 안읽고 장문의 멘트를 다시는 것은, 음… 곤란하군요). 본문도, 그 밑에 달린 리플들의 논의도 뭐 하나 제대로 안읽으시고도 자신있게 제 이야기를 딱 한마디로 요약하시는데, 그 요약이 전혀 틀려버렸을 수 있다는 가능성 정도는 항상 상정하시는 것이 좋겠군요. 앞으로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중학교로 진학하실때 많은 도움이 될 겁니다. 2005/08/09 16: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