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러고보니 한 일주일 남짓 전부터, 표현자유위축을위한나경원법 (한때 그들이 최진실법이라 운운한) 이야기가 여러 공식 언론 통로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물론 주가철도 999의 충격이라든지 큰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깨끗하게 이슈가 잠수타는 것은 위험한 징조다. 여튼 지난 팝툰에 올라간, 관련 칼럼.
악플 없는 무균질 세상을 선전하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84년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유명한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라는 작품이 있다. 인류의 전쟁으로 세계가 멸망하고 엄청난 오염 속에 다른 세상이 되어버린 환경 속에서, 인간들이 다시 문명을 일구고 또 싸우는 와중에 공존에 의한 진정한 구원을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자연보호와 생태주의에 대한 깊은 울림을 준다. 덕분에 SF/판타지 장르에서 고전급 반열에 올라가 있고 여전히 각종 환경보호 행사마다 단골 상영작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사실 미야자키 감독 자신이 아니메쥬라는 애니메이션 정보지에 계속 연재하여 9년대 중반에야 완결된 원작만화의 초반 극히 일부분의 내용만을 담고 있다. 애니메이션은 주인공 나우시카가 오염의 바다인 부해를 지배하는 거대생명체 ‘오무’들의 마음을 열어 인류와 그들을 화해시키고, 독성 가득한 부해의 바닥에는 자연정화과정에 의하여 새로운 청정 환경이 자라난다는 희망을 주며 끝난다. 그러나 정작 원작은 훨씬 중요한 한 단계를 더 나아간다. 이미 오염된 환경에 적응한 인간들의 몸에 있어서, 청정한 세상은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애니에서 전달하는 환경보호라는 직선적인 메시지는, 만화에서 더욱 다층적인 생태계와 그 속에 있는 인간들의 선택에 대한 진지한 문제제기가 된다. 그렇듯, 닥치고 아름다운 자연 깨끗한 강산이 아니라 자연 속을 살아가는 여러 주체들의 거래와 균형이 중심에 놓이는 것이 바로 생태계다.
그런데, 숲 속의 생명체들만 생태계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충분히 많은 다양한 이들이 서로 부대끼면서, 그들이 살며 내리는 자신과 타인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미치는 선택들이 서로 겹치다 보면, 일종의 생태계 패턴이 만들어지게 된다. 서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거나 같은 방향에서도 수준차이가 나서 각종 크고 작은 문제들이 생기지만, 반대로 새로운 공생관계가 만들어지거나 협력에 의한 전혀 새롭고 우수한 진화가 이루어지기도 한다. 그리고 각각은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무조건 나쁜 균과 해충을 박멸한다고 덤벼들다가는 더 큰 재앙을 불러오기 십상이다. 『나우시카』에서 암시하듯, 인위적으로 고정된 질서를 유토피아의 이름으로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성과 상호작용이 갖추어진 생태계적 균형 속에서 순리와 함께 살아가는 것이 개체에게도 전체 환경에도 바람직하다.
담론의 세계, 즉 사람들의 수많은 의견과 표현들이 오고가면서 세상을 바라보는 어떤 ‘인식’이 만들어지는 것 역시 하나의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특히 표현의 자유를 바탕으로 하는 민주주의 사회라면 당연히 그렇고, 인터넷 등 미디어 활용의 문턱이 각 성원들에게 더할 나위 없이 넓게 열려있는 오늘날이라면 더욱 그렇다. 인류 문명의 발전이라도 앞당겨줄 것 같은 감동적인 이야기도 퍼지고, 한 눈에 봐도 화장실 낙서급인 욕지거리도 똑같이 퍼진다. 사랑도 미움도 선의도 악의도 현명함도 멍청함도 이 담론 생태계 속에서 각각의 생명을 이어나간다. 그렇기에 어디서부터 ‘악’으로 규정할지, 누가 그것을 정할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야할지는 여러 영향관계를 살펴보며 구체적인 사례 위주로 살펴봐야할 섬세한 문제가 된다. 자칫 경솔하게 접근하면, 비판의 목소리를 틀어막으려는 권력자들에게 판을 내주게 된다. 혹은 박제된 평온함을 추구하는 비뚤어진 이상주의자들에게 말려들어 모든 발전의 가능성을 포기하게 될 수도 있다. 담론생태계의 생명력을 유지하는 표현의 자유라는 기본 원칙 자체가 자기 검열으로 인한 위축효과 속에 소멸될 수 있다. 그렇기에 담론 생태계에는 융통성 없고 권력의 이해에 봉사하기 쉬운 국가적 감시와 규제 및 정보의 집적화를 최소화하고, 융통성 있게 개별 사안들에 대처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자율 정화 기술과 당사자 간 합의에 의한 처벌과 보상 기제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하지만 반대로, 앞서 이야기한 그런 이들은 총력을 다해서 무균질 유토피아를 선전하곤 한다. 너도나도 실명을 까고, 너도나도 검열에 나서고, 나서지 않으면 처벌하는 세상을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극적 효과와 감정적 연결을 동원하기 마련이다. 어영부영 그들에게 말려들어갈지, 제대로 담론 생태계 속에서 균형을 맞춰가면서 발전할 수 있도록 지혜를 모을지, 선택의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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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양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만화를 가져오는 방식의 칼럼.)
PS. 그러고보니 최근 이명박정권의 꽃 유인촌 문화부 장관께서 친히, 대부분의 악플에 면죄부를 부여하는 논리를 만들어 주셨다: “(뉴스동영상으로 공개된 “아 씨발 찍지마”라는 발언은) 스스로 격한 감정을 자신에게 드러낸 것이 잘못 알려진 것”. (클릭) 앞으로 악플이라는 용어는 폐기하고, 스스로격한감정을자신에게드러낸플™이라는 용어를 사용할까 심각하게 0.5초간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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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ingback by minoci's me2DAY
민노씨의 생각…
스스로 격한 감정을 자신에게 드러낸 것이 잘못 알려진 것 (유인촌. via capcold 블로그) . 잘.못.알.려.진.것???…
Pingback by capcold님의 블로그님 » Blog Archive » 온라인 표현의 자유 개악 법안은 현재진행형
[…] 경제침체에 맛이 가고 통화 스왑에 마취되고 있는 동안에도, 모든 것이 망각 속에 살포시 내려앉은 그 순간 그들은 […]
Pingback by Nakho Kim
@jellicho 아, 그건 옛날 박찬종씨의 '무균질 우유' 광고를 염두에 두고 사용한 표현이었습니다. :-) 자세한 이야기는 덧글 부분에 남겼습니다: http://t.co/7Fa7BJW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