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묶는 영원의 흐름 – ‘불새’ [기획회의 296호]

!@#… 나온 후 얼마 안 지나 절판되고, 5년마다 재발매되는 이 작품이야말로 부활과 윤회의 ‘불새’가 아닐까 하는 뻘생각이 0.5초동안 들었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를 묶는 영원의 흐름 – [불새]

김낙호(만화연구가)

원래 책을 소개하는 지면이 가장 빛나는 순간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더 널리 그리고 깊게 읽혀질 가치가 있는 작품들을 설득력 있게 설명해낼 때다. 하지만 어쩌다가 한번씩은 정반대의 작업도 필요하다. 이미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충분히 걸작이라고 알려져 있고 여러 ‘명작 소개’ 지면에서도 종종 출몰하지만, 그래도 소개해야하는 경우가 생긴다. 바로 오랜만에 다시 구해볼 기회가 생겼을 때 말이다.

전후 일본 만화와 TV애니메이션의 장르적 발달과 기본 문법 정립은 물론 작가 육성까지 기틀을 다져놓아 ‘만화의 신’이라는 별칭으로 불리웠던 작가가 바로 데즈카 오사무다. 그런 그가 원래부터 강조했고 특히 작품 생활의 후기로 갈수록 깊게 심취하던 한 가지 주제가 바로 ‘업’이다. 삶의 인연의 역정, 역사의 흐름, 혹은 아예 불교적 윤회의 과정 속에서 누군가가 다른 이에게 가한 고통과 은혜는 다른 방식으로 비틀어져 돌아온다. 개별적 정의는 종종 이루어지지 않은 채로 남지만, 커다란 흐름 속에서 정의 없는 우매함은 결국 파멸로 이어진다. 그 속에서 헛된 과욕에 휩싸이는 이들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삶에 충실한 이들의 손을 들어준다. 후자들에게 무조건 해피엔딩을 줄 정도로 순진한 자비심을 발휘하는 평범한 작가와는 거리가 멀지만, 희망이라는 소중한 가치를 그들을 통해서 표현해낸다. 그리고 이런 주제의식의 정수를 정제해낸 것이 바로 그의 필생의 역작, [불새](데즈카 오사무 / 전 16권 / 학산문화사)다.

불새란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고 그 속에서 재생하여 영생을 누린다는 환상의 생명체로, 그 피를 마시면 인간은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전해진다. [불새]는 인류 문명의 여러 시대에서 영생을 욕망하는 인간들이 불새의 피를 매개로 자신들의 세상에서 만남과 헤어짐, 번영과 파멸을 맞는 내용의 작품들로 이루어진 연작이다. 개별 작품들은 독립적인 내용이되 공통된 주제의식과 함께 인연이라는 커다란 굴레를 통해서 서로 엮여있다. 여러 시대를 관통하며 비슷한 인물과 그를 닮은 후손들이 유사한 상황에 처하여 서로 조금씩 다른 대처를 하기도 한다. 어떤 시대에서는 최고의 불상조각가들이 엮어내는 깨달음의 이야기가 펼쳐지고, 또 다른 시대에서는 우주 이민의 과정 속에 벌어지는 애증과 생존경쟁의 싸움을 다루기도 한다. 고대문명의 왕들이 민중과 갈등하고, 미래사회의 혁명가가 영생의 꾀임을 당하기도 한다. 연작은 먼 과거, 먼 미래, 좀 덜 먼 과거, 덜 먼 미래 등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을 다루며 점차 오늘날의 현대에 가까운 방향으로 수렴되어간다.

워낙 일생에 걸쳐서 (연작의 첫 작품은 54년에 시작했고, 가장 최근작은 작가가 세상을 떠난 무렵에 가까운 88년에 완결되었다) 그려온 작품이기에 결국 현대편은 나오지 못한 채로 미완의 작품이 되었지만, 그것은 마지막 점을 찍지 못한 정도에 불과하다. 연작 가운데 전체 세계관의 핵심을 농축해서 보여주는 것이 바로 ‘미래편’인데, 여기서는 아주 먼 미래에 결국 인간이 멸망해버리는 것을 다루고 있다. 지나치게 발달한 인류가 결국 핵전쟁을 일으켜서 스스로를 멸망시키는데, 그 와중에 불새의 피를 먹게 된 한 명의 주인공만이 핵전쟁이 끝난 후 대피소에서 나와서 모두가 없어져버린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영원한 생명이란, 고작 폐허가 된 인간문명을 바라보며 한탄하는 찰나의 시간으로 끝나지 않는다. 수십수백만년이 지나면서 인간의 세계는 완전히 없어지고 그 흔적 위에 괄태충에 기반한 생물들이 새롭게 진화하고, 다시 영겁의 세월이 흐르면서 그들 역시 새로운 문명을 만들고 서로를 파멸시키고 끝난다. 그 와중에서 주인공은 몸조차 사라진 순수한 생명의 존재가 되어 다른 생물들에게 ‘신’으로 이해받게 된다. 그리고 다시금 오랜 세월 후에 결국 인간이라는 생물이 다시 등장하고, 고대문명이 시작되어, 먼 과거를 다룬 불새 연작의 첫 장면으로 연결된다.

영원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비슷한 욕망과 비슷한 오류를 저지르지만, 그 와중에서 또 다른 희망을 꿈꾸기도 한다. 개별적 상황 속의 희로애락, 더 큰 인연의 흐름, 그리고 생명과 영원을 받아들이는 거대한 생각들까지 하나의 자연스러운 줄거리 흐름 속에서 건드린다. 큰 이야기와 작은 이야기들이 일관된 흐름으로 엮이는, 영생이라는 키워드로 인간사를 논하는 실로 종합적인 작품인 셈이다.

통일된 주제의식과 인연의 굴레로 맺어져있지만, 연작 속 각 작품의 독립성은 높은 편이다. 닌자 활극에 가까운 작품도 있고, 고전 SF를 연상시키는 스케일 큰 우주론의 작품도 있고, 심지어 짧은 실험만화 형식의 단편도 있다. 나아가 각 작품 안에서도 다채로운 매력을 쉴 새 없이 보여준다. 작가 특유의 낙관적 유머감각이 발휘되는 순간도 많고, 형식 실험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다중적 상황을 보여주기 위해 평행 칸 전개를 시도하고, 고전 인형극의 느낌을 주기 위해 작품 전체를 영화의 ‘롱테이크’에 해당할 만한 같은 구도의 정형화된 반복칸으로 제시하기도 한다. 아이콘화된 등장인물들과 대비되는 섬세하고 커다란 세계가 배경으로 그려지며, 이 작품의 밀도 높은 칸 전개를 보고 있노라면 그 후 수 십년간 과연 만화는 얼마나 더 노력을 기울였는가 회의가 들 정도다. 거장으로 인정받는 이에 대해 일방적 찬사를 늘어놓는 것은 꼴불견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게 되기에 거장인 것이다. 비록 요즈음 가장 유행하는 정형화된 그림체에 익숙한 이들에게는 열광할만한 귀여움의 요소가 부족해보일 수도 있으며, 캐릭터 속성보다는 드라마 자체에 집중하는 모습이 90년대 중반 이후 일본만화의 팬들에게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하지만 반대로 요소 단위로 공식화된 캐릭터 상호작용과 승부규칙이 아니라, 자기 인생을 살아가는 캐릭터 및 주제의식 자체를 형상화하기 위한 줄거리 흐름을 갈구하는 독자들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축복이다. 역사적 혹은 과학적 디테일에서 어긋난 부분들도 없지는 않지만, 이야기 전체를 즐기는 것에 지장을 줄만큼 소재를 마구잡이로 다루지는 않는다(다만, 한국독자 입장에서는 ‘태양편’의 시작이 임나본부설을 기반으로 하는 매우 거슬릴 만한 대목이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불새] 한국어판은 이번에 같은 출판사에 의하여 3번째로 출간되는 것이다. 이전 02년과 07년 두 차례의 출판에서는 확고한 구매층을 상정한 소량만이 출판되어 대중적으로 큰 화제를 모으는 일 없이 금방 서가에서 사라지곤 했다. 그간 조금 바뀐 만화시장 상황을 반영하여 이번에는 박스세트 형식으로 출시되었는데, 부디 한 분야의 ‘고전’에 걸맞도록 스테디셀러로 계속 사람들이 구해볼 수 있게 되기를 기원한다.

불새 박스 1~9 세트 110점
데즈카 오사무 지음/학산문화사(만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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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꿈의 포로 아크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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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즈카 오사무의 [불새] 걸작이란 얘기 이미 많이 들었고 언젠가 사야지 하고 전부터 생각해 왔지만, @capcold님의 글http://j.mp/jryq1c 읽고 구매욕 급상승, 인데 늘 그렇듯 잔고가 문제..+난 왜 이렇게 글을 쓰지 못하는 거냥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