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작품이 작품이다보니 여러 지면에서 소개하게 되었고, 기획회의에는 책으로서의 맥락, 판타스틱에는 다른 꼭지들 사이에서 만화문화적 맥락으로 쓰게 된 물건. 민란이 일어나기를 간절히 바라는 듯 하는 압박스러운 정부와 초인을 자처하는 듯한 수장 덕에, 오늘날의 한국에서는 더욱 여러가지 의미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작품.
사회를 누구로부터 지키는가 – 『왓치맨』
김낙호(만화연구가)
문화권에 따라서 정도 차이는 있지만, 스스로 무장하여 질서를 지킨다는 생각은 오랫동안 큰 미덕으로 칭송되어 왔다. 민병대든 동네 방범이든, 이런 자경단 정신은 자율적 인간이 사회적 몫을 자발적으로 다하며, 나아가 사회 속 타인에 대한 애정까지 보여주는 것으로 쉽게 간주된다. 그 자발성이 지니는 도덕적 훌륭함의 느낌은 확실히 크다. 하지만 사회가 미국 서부 시대의 개척촌이나 나라의 기강이 무너진 임진왜란 한복판이 아니라면, 즉 사회가 나름대로 정의를 강행하는 시스템이 제대로 갖추어져 있다면, 자경단 정신을 칭송하는 것은 몇 가지 난점에 봉착한다. 제도의 정의와 개인의 정의의 마찰, 제도 속을 사는 일반인들과 제도를 넘어서는 영웅의 마찰, 공공선의 한도, 불의를 해결하는 방법에 대한 합의 등 끝이 없다. 이런 것은 특히 오늘날의 한국 사회에서도 비록 형태는 다르지만 결코 낯설지 않을만한 문제들이다.
<왓치맨>(앨런 무어 글, 데이브 기본스 그림/정지욱 옮김/시공사/전2권)은 자경단에 관한 슈퍼히어로 만화다. 그것도 86년 처음 연재를 시작하고 이듬해 책으로 묶인 이래로 계속 최고의 걸작으로 꼽혀온 이 분야의 대표작이다. 만화로서 최초로 SF 분야 최고의 영예인 휴고상을 받고 유일하게 타임지의 2005년 100대 영어권 소설에 포함되는 등, 단지 만화 분야에 머무른 평가가 아니다. 게다가 20년이 넘게 지난 2008년 현재도 꾸준히 매달 수 천 부씩 팔리는, 음반으로 치면 핑크 플로이드의 ‘다크 사이드 오브 더 문’에 비유할 수 있을 만한 스테디셀러다. 그런 엄청난 평판의 작품이 한국어판으로 드디어 출간되었다는 것에 대한 기대감이야 당연하다 치더라도, 무엇이 이 작품에 대한 그런 일방적 칭송을 가능하게 했는가, 궁금해 할 만하다.
‘맨’이라는 어미 덕분에 착각하기 쉽겠지만, <왓치맨>은 그 어떤 히어로의 이름도 아니다. 그냥 감시자들(watchmen)이라는 의미의 일반 명사일 뿐인데 저절로 그런 착시가 일어나고 마는 것이다(물론 이것은 의도적이다). 이는 사회를 감시하는 히어로라는 개념 그 자체이며, 외부의 정의로운 무력이 아니라 스스로 일어난 자경단의 개념이다. 자경단 그 자체야 슈퍼히어로물의 기본이지만, <왓치맨>은 이전에 좀처럼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던 한 가지 질문을 한다. “사회를 누구로부터 지키는가”. 이 질문과 그것을 대답하는 이 작품의 방식은, 이후 슈퍼히어로물은 물론 SF/판타지 문화 전반까지도 크게 바꾸어놓았다.
<왓치맨>의 이야기는 뉴욕에서 은퇴한 슈퍼히어로 한 명이 추락사를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세계는 1985년, 슈퍼히어로들이 실존하는 일종의 평행세계다. 하지만 초능력자들의 존재는 미소 냉전의 군비경쟁을 더욱 가속시키고, 세상은 일상성 속에서도 스트레스가 짖누른다. 그리고 일련의 사회적 충돌 때문에, 옷을 입고 장비를 갖추어 정의의 슈퍼히어로로 활약하는 것은 법으로 금지당한지 십수년이 지났다. 이렇듯 자경단 행위가 금지된 이 세상에서 아직도 자신만의 신념으로 활동하는 가면 히어로 주인공 로어샤크가 한 때 자신의 동료였던 그 히어로 ‘코미디언’의 죽음을 수사한다. 그 과정에서 은퇴한 히어로들의 우울하고도 충격적으로 지리멸렬한 일상, 여전히 깊숙하게 퍼져있는 사회문제, 초월적 존재와 인간의 관계가 만들어내는 갈등, 사회정의의 모순된 모습들, 그리고 파시즘의 여러 국면에 대한 이야기가 펼쳐진다.
<왓치맨>을 읽는 것은 멋진 독서경험이다. 무엇보다, 입체적이면서도 작위적이지 않다. 만화는 슈퍼히어로물의 전형적인 그림체나 연출을 보여주는 듯 하면서도, 읽다보면 반듯한 페이지 당 9개의 세로 칸의 갑갑함으로 끌어들인다. 슈퍼히어로물을 소재로 들고 오면서도, 특유릐 호쾌한 활극의 모습 없이 갑갑한 작중 현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더할 나위 없는 연출이다. 칸 연출에서 특히 자주 활용되는 것이 비슷한 형상이 반복되며 시간과 장소, 인물들 사이에서 의미의 연상 작용을 이끌어내는 것인데, 너무나 교묘하게 복선들이 촘촘히 배치되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을 때마다 무릎을 치게 만든다. 또한 사건이 전개되면서 각 주인공들의 과거가 하나씩 드러나면서, 그 과거들이 서로 연결되며 전체 세계관을 그려내는 방식 역시 빼어나다. 시공간의 한계마저 뛰어넘은 절대적 초월자 슈퍼히어로 닥터 맨하탄의 이야기는 특히 백미인데, 현재와 과거 미래의 모든 것이 동시에 펼쳐져 있는 그의 인지세계를 만화로 서술하는 방식은 난해할 듯 하면서도 대단히 직관적으로 표현된다. 나아가 기본 줄거리는 만화로 펼쳐지면서, 각 단원 사이에는 당대의 사건을 기록한 문서기록, 신문보도, 광고 등 현실감을 극대화시키는 자료들이 삽입되어 있다. 내용적 측면을 모두 차치하고 단순히 효과적인 연출 측면 만으로라도 이미 <왓치맨>은 부동의 지위를 누릴 수 밖에 없다.
<왓치맨>은 다양한 영문학이나 당대 예술의 맥락을 자유롭게 끌어들여서 깊숙하게 소화해내어 복합적 이야기를 만들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슈퍼히어로 장르로서 재미있다는 것이다. 단지 진지하고 예술적인 방향으로만 임팩트를 주었다면 컬트일 뿐이다. 하지만 <왓치맨>은 어떤 부분은 이미 담겨있는 깊이를 재발굴해내고, 어떤 것은 자신의 압도적인 스토리 솜씨로 만들어나가며 장르 자체를 진화시켰다. 물론 슈퍼히어로물이라면 응당 필요한 매력적인 캐릭터 역시 절대 빠지지 않는다. 무늬가 계속 바뀌며 표정 아닌 표정을 만들어내는 얼굴 전체를 뒤덮은 흑백 가면을 쓰고, 악과 타협하지 않고 폭력적 처벌을 일삼는 도덕적 절대주의자 로어샤크는 최근 만화전문지 위저드매거진의 역대 200대 만화캐릭터 순위에서 6위를 차지했을 정도다. 이외에도 원자의 모든 구성 원리를 깨닫고는 인간을 너무나 많이 벗어나버린 닥터 맨하탄, 심약한 배트맨류 천재 히어로 나이트오울,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신적으로 완벽한 영웅이자 기업가 오지맨디어스 등 매력적 캐릭터의 향연이다.
이번에 출간된 <왓치맨> 한국어판에 대한 평가는 팬 층 사이에서 다소 평가가 엇갈린다. 출간 자체가 무척 기쁜 일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고 세밀한 주석 작업 등에 대해서는 일치된 호평이지만, 다소 직역체의 느낌을 주는 번역에는 호불호가 갈린다. 또한 비단 이 작품뿐만 아니라 서구 만화의 국내 출간 시에 자주 지적되곤 하는 글씨체의 문제 등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더 자세한 분석을 하기에는 이 작품이 쌓은 미덕이 너무 거대하고 지면은 좁다. <왓치맨>은 만화라는 양식이 담아낼 수 있는 깊이에 대해서 한 번이라도 의심해본 적이 있는 모든 이들에게 확실한 대답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권력과 정의, 사회와 개인에 대한 가장 훌륭한 성찰 가운데 하나로 지금까지 오래, 그리고 앞으로도 오랫동안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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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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왓치맨 Watchmen 1 Alan Moore 지음, 정지욱 옮김/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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