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소재 극만화의 길 – 테르마이 로마이 [기획회의 298호]

!@#… 언제 한번쯤 ‘전문만화’에 낀 괴상한 거품을 본격적으로 빼내는 글을 써봐야할 텐데, 몇가지 내용만 먼저 살짝 여기에.

 

전문소재 극만화의 길 – 테르마이 로마이

김낙호(만화연구가)

전문 분야를 소재로 하는 극만화가 마치 선진적 만화의 표본처럼 취급받는 흐름은, 90년대 중반 이래로 주욱 존재했다. ‘전문만화’라는 애매한 약칭까지 붙여가면서, 특정한 소재를 깊게 파고들며 많은 고증을 통해서 세부사항들을 열거하여 그것을 중심으로 극을 전개하는 것이 지금 한국만화에 부족한 우월한 방식이라는 듯한 주장들이 나돌았다(한국의 만화출판업계는 취재인력을 지원하지 않는다는 비판도 늘 하나의 세트처럼 따라다녔다). 일본만화의 유입확대 속에 전문소재 극만화 가운데 [맛의 달인](요리), [닥터스쿠르](수의학), [마스터키튼](고고학, 현대전쟁사 외)를 포함한 우수한 작품들이 대거 유입되어왔고, 특히 당시 한국의 십대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던 농구라는 소재에 대한 디테일이 뛰어나고 캐릭터 드라마로서 강력한 위용을 자랑한 [슬램덩크]가 확실한 참조 모델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고도로 발달하다가 결국 노쇄하는 장르들이 흔히 그렇듯, 전문소재 극만화 역시 대부분의 작품들이 흔하게 빠져드는 문제점이 생겨났다. 특이한 소재가 지니는 한정된 관심층과 폭넓은 독자층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지나치게 손쉬운 공식에 의지하게 되었다. 바로 최대한 사소하고 특이한 느낌의 소재를 잡으면서, 그것이 사실은 인생사와 사회상의 모든 것을 해결할 열쇠라는 식으로 과장하는 것이다. 라면 국물의 비밀에 커다란 사업이 뒤흔들리고, 발레로 텔레파시를 하며, 와인 한잔을 고르는 것에 수 십년 원한과 오해가 풀리고, 몸짓 한 두 가지로 사람의 마음을 다 읽어내거나 조작한다. 디테일의 힘을 극적으로 과장하여 떠벌리기에 바빠서, 종종 그 소재의 매력과 극적 긴장감을 오히려 반감시킨다. 즉 좋은 전문소재 극만화의 조건이란, 무엇보다 다루는 소재에 들어있는 섬세하고 작은 차이의 즐거움과 놀라움을 그 자체로 즐기게 하는 것이다. 학습정보만화로 취급받지 않도록 캐릭터 상황극을 녹여내면서 말이다.

세계를 구해야 할 것 같은 과장법도, 학습만화적인 설명문의 지루함에도 빠지지 않고 매력적으로 전문소재를 다루어내는 썩 훌륭한 최근 작품 중 하나는 바로 [테르마이 로마이](야마자키 마리 /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1권 발매중)다. 우선 전문 소재의 특이성으로 치자면, 무려 목욕탕을 다루고 있다. 고대 로마의 한물 간 취급을 당하던 목욕탕 설계사 루시우스가, 현대 일본으로 타임슬립했다가 돌아오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는데, 매번 고대 로마에서 목욕을 하는 와중에 현대 일본의 목욕 현장으로 갔다가 돌아온다. 스스로도 꿈인지 사실인지 모를 상황이지만, 미래의 유물 한조각이 종종 돌아온 그의 근처에 따라온다. 그리고 미래를 엿본 루시우스는 그가 본 것을 고대 로마의 목욕문화에도 살짝 적용하고 그렇게 해서 역사의 한 조각이 완성된다. 시놉시스로 써놓고 보면 참 별 것 없는 이야기 같은데, 실제 완성된 작품을 보면 빼어난 코미디이자 서로 시간과 공간이 다른 문화권 사이에 공감의 다리를 놓아주는 훈훈한 작품이라는 점이 특징이다.

[테르마이 로마이]는 고고학으로 밝혀진 고대 로마의 목욕문화, 그리고 현대 일본의 목욕문화를 전문소재로 하고 있다. 목욕탕의 벽에 자연풍광을 그려넣는 운치, 목욕을 마치고 하는 한잔의 우유 같은 소소한 세부사항들이 모두 하나씩 에피소드의 중심이 되어준다. 로마에 관한 것은 각종 고고학적 유물과 기타 기록에서 얻어낸 지식들, 현대 일본에 관한 것은 지금의 방식들에 대한 세세한 관찰에서 나온다. 주인공 루시우스는 그에게 이상한 세계인 현대 일본에서, 목욕의 작은 디테일들이 주는 그 차이를 경이로운 눈으로 발견하고 배워간다. 그 과정 속에서, 작은 관습 혹은 기술 하나하나가 얼마나 목욕이라는 생활경험을 더 쾌적하게 만들어주는지 독자들에게 발견시켜준다. 루시우스는 세계를 구하지 않고, 그가 적용한 목욕 방식을 거친다고 사람들이 무슨 해묵은 원한이 풀리고 감동의 교훈들이 널려있지 않는다. 하지만 로마 사람들의 입가에는 만족한 웃음이 스며들고, 독자들 역시 다음번에 목욕을 할 때 작품 속 장면들을 생각하며 좀 더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공감은 전문소재로서의 세부 디테일을 추구하면서 보편적 독자층의 만족을 이끌어낼 수 있는 방식이다.

두 목욕문화에 대한 섬세한 고증이 전문소재라는 측면을 담당한다면, 낯선 환경에서 좌충우돌하는 진지한 주인공을 그리는 속칭 “어항 밖의 물고기” 코미디가 극으로서의 재미를 맡고 있다. 루시우스는 진지하기 그지없는 중년 건축가인데, 그가 현대 일본에 떨어지면 난데없이 동네 목욕탕(또는 온천, 혹은 좀 더 극단적인 목욕탕 장면)에 나타난 훤칠한 벌거벗은 서양인인 것이다. 목욕가운을 토가처럼 걸치고 대로를 활보하며, 보이는 모든 것에 깜짝 놀라며 배우려고 하는 괴상한 외국인이다. 악의 없는 소동의 중심에 선 주인공, 그런 주인공을 애써 태연하게 대하며 상황을 수습하는 현대 일본인들의 ‘친절’ 또는 오해가 즐거운 웃음을 만들어낸다. 로마제국의 우수함에 대한 자존심이 깨지며 겸손해진 주인공이 고대 로마로 돌아가서 자신이 배운 바를 적용할 때 나타나는 미묘한 시대착오 상황, 그런데 그것이 그다지 시대착오적이지 않았음을 나중에 에피소드 끝에 달린 설명에서 볼 때 코미디는 완성된다. 가장 편안한 휴식 중 하나인 목욕이라는 활동, 혹은 그것을 매개로 해서 슬쩍 드러나는 전반적인 사람 사는 모습이 문화마다 공통점이 많음을 엿볼 때마다, 살짝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고대 로마 대리석상에 바가지나 수건 같은 목욕용품을 들려준 표지그림의 정서가 작품 전반의 시각적 느낌을 결정하고 있다. 많은 잔선으로 묘사하는 진지한 표정들, 별 것 없는 대목에서 주인공이 감동을 느낄 때 등장하는 마치 대리석상 소묘 같은 진지한 신체 구도의 데생은, 전반적으로 성인순정만화 느낌이 강한 그림체에 이 작품만의 뚜렷한 개성을 불어넣는다. 개그를 위한 과도한 그림변형을 피하고 상황 자체에 개그를 집중하는 것 역시 시종일관 진지한 주인공의 상황을 잘 나타내준다.

전문소재 극만화들이 주욱 빠져있던 타성을 벗어나 이 정도의 완성도를 보여준 만큼, 이 작품은 일본에서도 출간과 함께 2010 일본만화대상, 데즈카오사무문화상 등을 수상하는 영예를 누렸다. 모든 작품들이 앞으로 [테르마이 로마이]를 모방해야 한다는 것은 물론 아니지만, 전문소재 극만화의 매력이 애초에 어디에 있는 것인지 다시 돌아보기 위한 중요한 사례로 남을 것이다.

덧. 한국어판의 마케팅 역시 작품에 걸맞는 성의 있는 모습을 보였는데, 초판 특별부록으로 속칭 ‘이태리타월’로 불리는 때수건을 동봉했다.

 

테르마이 로마이 110점
야마자키 마리 지음, 김완 옮김/애니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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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 이름이 영웅인 주인공의 좀비도망극(?) 아이 앰 어 히어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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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1. 헐 뭐야 코멘트 삭제가 안 되네
    근데 에 없던 숫자 놀음이 추가된 거 보니까 김낙호가 쫀심 상한 일이라도 있나 부넹 이런 식으로 검열하는 거 보니깐 ㅇㅇ

  2. !@#… ne1님/ 바로 옆을 보시길. “캡콜닷넷은 광고스팸만 아니면 딱히 덧글과 트랙백을 막거나 삭제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코멘트를 남긴 당사자에게도 해당됩니다(15분쯤 오타수정할 시간은 있습니다). // “숫자놀음”의 이유는 그걸 물어보는 질문에서 유추하시길: “Are you a human?” 중딩영어로 괴롭혀드려서 죄송합니다.

  3. 전문극 소재로서 나름 재밌기는 한데 이야기 구조가 단순해서 좀 식상하더군요. 목욕탕이나 로마사에 관심이 없다면 재미를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저나 are you a human?은 좀 재밌군요. ^^;; 백만 년만에 댓글 달러 들어와서 저런 게 생긴 줄 몰랐습니다.

  4. !@#… 지나가던이님/ 반복적 패턴이 되기 때문에, 사실 너무 시리즈를 길게 가지 않는게 좋죠. 편집부는 인기가 생기면 무조건 계속 가려고 하곤 하지만;;; // 아무래도 스팸봇댓글이 좀 기승이라서요. 스팸이 아닌 사람악플러는 반갑게 응대라도 해주지만(한번 싸지르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니 사실 내막은 비슷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