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간 더 깊게 슈퍼히어로 만화를 읽기 [학교도서관저널 1110]

!@#… 물론 개인적으로는, 근육과 스판이야말로 히어로의 필수조건이라고 보지만.

 

약간 더 깊게 슈퍼히어로 만화를 읽기

김낙호(만화연구가)

인간처럼 보이지만 인간을 초월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의 모험은, 고대 신화부터 오늘날까지 꾸준히 대중들에게 주류적 인기를 끌고 있다. 인간과 비슷한 점이라고는 없는 추상적 초월체라면 캐릭터로서 감정이입할 구석이 없고, 능력이 엄청나지 않으면 현실의 중력권을 살짝 벗어나는 재미있는 이야기로 즐길 수 없다. 그렇기에 인간의 모습을 한 신이든, 엄청나고 기이한 훈련을 거친 인간이든, 기계 갑옷을 입었든, 인간과 닮은 외계인이든, 특수한 약물/광선/마법에 걸린 사람이든, 굉장한 능력을 소유한 주인공이 있다. 그리고 그는 사랑이든 미움이든 혼란이든, 인간적 고뇌를 겪으며 나아간다. 그런데 주인공만 대단하면 이야기가 재미 없어지는 만큼, 마찬가지로 인간을 초월한 적들이 나온다. 평범한 인간의 힘으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존재인데, 자연재해일 수도 있고 조직폭력이라든지 부패라든지 하는 사회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종종 적 역시 하나의 캐릭터로서 악을 행하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 즉 슈퍼악당이다. 그리고 이들이 벌이는 싸움의 향연, 특히 다양한 이능력들이 서로 맞물리는 과정 속에서 독자들은 즐거움을 얻는다.

어떤 작품과 어떤 독자들은 싸움 그 자체가 주는 재미로 만족할 것이며, 좀 더 깊은 작품과 독자들은 선악의 대결 혹은 선악의 경계가 흐려지는 모습에서 더 심각한 여운을 느낄 것이다. 그리고 한층 더 깊어지면 힘의 본질, 정의의 사회적 구성방식 같은 아예 해답이 없는 복잡한 화두까지 떠오를 것이고 말이다. 깊이 읽는다고 해서 활극의 재미를 버릴 필요는 없다. 다만, 좀 더 집요하게 작품의 재미를 캐내고 생각을 소화하는 쪽이 이왕 좋은 작품을 확실하게 즐기는 방법인 것이다. 다만 이왕이면, 순둥이 정의맨이 뿔달린 악인들을 맨주먹으로 때려주고 돌아오는 것보다는 좀 더 농익은 깊이가 있는 내용으로 말이다.

다크히어로? 안티히어로?
초능력 영웅이라고 해서 무조건 착하면 재미보다는 짜증을 준다. 권선징악에서 권선이 교훈이라면, 징악이 스토리가 되어준다. 세상은 복잡하고, 선의 기준은 갈수록 어려워진다. 모든 선을 포괄할 수 있는 엄청나게 보편적인 선은, 도대체 초등학교 도덕교과서를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반대로 복잡할수록 악은 좀 더 다양한 개별 사례 위주로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크고, 그 악을 분쇄하는 것만으로도 히어로가 될 수 있다. 제도화된 선의 집행 방식, 예를 들어 경찰 같은 경우 현실 속에서조차 개별적 무능이나 조직 논리로 인해 여러 한계를 드러내곤 하기 때문에, 이야기상에서 악으로 규정할 만한 이들을 거침없이 응징하는 이들을 꿈꾼다. 거칠고 암울한 응징방법에 집중하여 다크히어로로 칭하기도 하고, 히어로가 지녀야할 ‘선함’의 덕목을 걷어찼다는 요소가 강하면 안티히어로로 칭하기도 한다.

[다크나이트 리턴즈]는 1987년 작으로, 배트맨이라는 슈퍼히어로 탐정 캐릭터를 본격적으로 어둠의 자경단으로 재해석한 만화다. 원래 배트맨은 라디오 탐정극의 틀거리에 슈퍼히어로물의 활극 요소를 더한 것에서 시작하여 6-70년대를 거치며 당시 좀 더 본격적인 캐릭터 액션 물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은 배트맨을 다시 탐정물로 되돌리며, 현실의 갑갑함과 모호함을 반영하는 범죄극인 ‘느와르’ 범죄소설들의 분위기를 입혔다. 도시는 범죄로 더럽고, 정부는 번드르르하고 시민들을 통제하려고만 할 뿐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 고분고분한 성격인 슈퍼맨은 그간 정부의 하수인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은 중노년을 바라보는 은퇴한 배트맨 브루스 웨인이 다시 망토를 두른다. 자신의 터전을 자신들이 일어나 지킨다는 미국식 자경단 정신을 그대로 구현하며 범죄자들을 분쇄해나가고 결국 동조자들을 규합하여 더욱 조직화해나간다. 이야기도, 그것을 담아내는 화폭도 시원시원하기 그지없다. 물론 제도권에 대한 불신, 개인의 정의감에 대한 과신이 우익정서의 위험수위 가까이에서 출렁거리곤 하지만 말이다.

만약 그런 자경단 슈퍼히어로들의 싸움이 한 발짝 잘못 나아가, 정의감이 극단적으로 밀어붙여지는 세상이 오면 어떨까. 위선과 갑갑함 아래에 사람들이 거짓 평화를 누리며, 그 밑으로는 다시금 통제되지 않는 일상적 폭력이 싹튼다. 히어로질을 위해 악당을 찾고, 히어로가 잘못된(사실 전쟁으로 간 것 자체가 항상 잘못이지만) 전쟁에 동원되고, 정부에 대한 불복종이 악으로 간주되기도 더할 나위 없이 간단하며, 활극에 관한 사람들의 순박한 상상과 현실의 거친 잔인함이 사사건건 충돌한다. 그런 시궁창 같은 가상세계, 그런데 이상하게도 친숙한 모습들이 바로 [왓치맨]이 묘사하는 곳이다. 타협하지 않는 거친 성격의 얼룩가면 히어로 로어세크, 우울증 중년 나잇오울, 궁극의 선을 추구하는 오지만디어스, 인간의 물질구조와 시공간마저 넘어서버린 초인 닥터 맨해튼 등 한때의 영웅들이 자신들의 당시 동료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며 다층적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시각적 형식, 이야기 구조, 챕터 사이사이의 자료와 복선 등 구성의 완성도가 대단한 작품이다. 딱히 위악을 떨지 않더라도, 히어로와 안티히어로는 생각보다 종이 한 장 차이인 것이다.

히어로의 다층성
히어로의 이미지를 뒤집는 것 말고도 깊이를 넣는 또다른 효과적인 방법은, 다양한 이해관계와 성격양상을 지니는 초월적 존재들을 함께 뒤섞어 충돌시키는 것이다. 선과 악이라는 두 가지 진영으로 간단하게 나누어지는 것이 아니라, 마치 자연현상 속 생태계의 서로 물리고 물리는 기제처럼 이야기는 끝없이 풍부해지고 히어로에 대해 생각할 지점은 늘어난다. 힘이라는 것에 대해서, 정의를 서로의 이해에 의해 중간 어딘가에서 합의해내는 것에 대해서, 어떨 때는 그 모든 것의 허무함에 대해서 말이다.

[샌드맨 연작]에는 “슈퍼”히어로라는 표현만으로도 부족한, 살아가는 모든 것의 가장 중요한 몇 가지 양상들을 자신의 속성으로 체화시킨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무한한 자(Endless)” 7남매가 그들인데, 운명, 죽음, 꿈, 파괴, 욕망, 절망, 분열이 그들이다. 그 중 꿈의 현신이 바로 꿈의 제왕, 혹은 모르페우스, 혹은 샌드맨, 혹은 기타 각 문화권에서 부여한 이름으로 규정되는 존재이자 이야기들의 가장 중심에 놓여있다. 꿈은 바로 이야기의 영역이기에, 작품 전체가 온 세상의 이야기적 상상력이 탄생시킨 각종 고대 및 현대 신화들을 서로 엮어 넣는다. 그 안에서 기이한 호러 에피소드, 삶과 죽음에 관한 간명하고 깊은 성찰, “인간”드라마로서의 성장물, 재치와 능력을 겨루는 신화적 모험 활극 등 여러 가지 취향의 내용들이 이어진다. 초월적 능력을 지닌 이들은 하염없이 많이 나오지만, 어느 하나 그 자체만으로 완벽하고 선한 것, 혹은 세상의 문제를 온전히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없다. 파괴와 행복의 사이에서 항상 양면적으로 저울질할 뿐인데, 그것을 가장 역설적으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마음씨 착하고 센스 있는 쾌활한 아가씨의 모습으로 등장하는 ‘죽음’이다(사신이 아니라, 죽음이라는 개념의 현신이다).

선악 개념이 뒤엉키는 것으로 치자면, 신필 김용의 무협물들을 빼놓을 수 없다, 그중 만화로 특히 잘 옮겨진 [신조협려]는 선악의 뚜렷한 경계를 긋는 척하면서 계속 뒤집는 것의 모범적인 사례다. 정파와 사파, 이성적 대의와 감성적 정분, 의협과 사익에 대한 고정관념들이 매 순간마다 깨진다. 그러면서도 전체의 흐름 속에서는 협의를 이야기하는, 지극히 인간적인 이야기로 완성된다. 주인공들은 각자의 성격을 자신들이 구사하는 무공의 종류를 통해서 드러내는데, 이들의 초인적 능력 결투는 단순히 사람 대 사람이 아니라 가치와 가치의 격돌이다. 결국 모든 것을 가장 유연하게 받아들이면서 결국 대의를 새로 만들어나가며 사람의 정을 선택한 주인공이 최고 고수로 등극한다. 피상적으로 즐기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단순히 기술 많은 자가 이겼다는 수준의 쾌감을 주겠지만, 좀 더 느끼고자 하는 이들에게는 조화와 열린 자세를 통해서 결국 인간으로서 성장하고 세상을 바로잡는 것에 대한 우화로서의 즐거움까지 준다.

우리 동네 히어로를 찾아서
더욱 깊게 즐길 수 있는 슈퍼히어로물의 방향을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더 소개한다. 여느 장르들과 마찬가지로, 슈퍼히어로물 역시 아무리 비현실적 세상과 능력으로 무장한다고 하더라도 당대의 현실과 바람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아예 좀 더 우리 현실을 노골적으로 꼬집는 쪽을 찾아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 현실과의 접점, 그리고 비현실적 상상으로 현실의 갑갑함을 부수는 즐거움이라면 굳이 미국이나 가상세계만 찾을 이유가 없다. [대한민국 황대장], [신한국 황대장], [시민쾌걸]로 이어지는 김진태의 슈퍼히어로 개그물들은 80년대말부터 00년대초반의 한국사회를 실시간으로 반영하며 종종 여느 시사만화들보다 뛰어난 해학과 풍자를 선사했다. 강풀의 [타이밍]은 한국적 귀신과 한의 정서를 평범하게 살아가고자 하는 여러 시민 군상들의 시간과 관련된 초능력에 엮어 넣은 흥미로운 스릴러다. 스판덱스와 터질듯한 근육의 쾌감이 좀 부족하더라도, 잘 만들어진 현실 밀착형 우리 동네 히어로 작품들의 재미는 상당하다. 책 속의 세상과 이어지는 책 바깥의 나머지 세상이 바로 작품으로 자극받은 상상력의 든든한 확장이 되어주니까 말이다.

앞서 소개한 작품들에서 보았듯, 좋은 위인전은 반드시 “성공한” 사람의 이야기일 필요도 없고, 초인적이어야 할 필요도 없으며, 때로는 해당 개인의 삶이 중심 주제가 아니어도 되고, 심지어 모든 것이 엄격한 사실이어야 할 필요조차 없다(물론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부터 가상인지 독자가 어느 정도 판별할 능력이 된다는 전제 하에). 본받아야 한다는 듯 스스로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세상과 상호작용이 남달랐던 이들이 펼치는 완성도 높은 서사를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작품, 그래서 그들의 삶으로 우리들의 맥락까지 둘러볼 기회를 주는 작품을 찾아 읽는 것이 가장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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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학교도서관저널. 특정 컨셉 아래 청소년들에게 추천하는 책들을 묶는 내용으로, 만화를 진득하게 즐기는 것의 즐거움과 세상사에 대한 관심을 적당히 배합해보자는 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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