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피해가 있으니 사기다 [팝툰 만화프리즘/11호]

!@#… 지난 팝툰 칼럼. 이걸 탈고하고 나자 아프간에서는 인질들이 납치되고, 국산 괴수영화 한 편을 둘러싼 온갖 쌩쑈가 난무하기 시작. 종이지면에서 시사 칼럼을 타이밍 맞추기란, 한국에서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_-;

사기는 피해가 있으니 사기다

김낙호(만화연구가)

어느 시대이고 간에 크고 작은 부정직함은 넘치기 마련이지만, 최근 한국에서 벌어진 대형 사기사건은 너무나도 그 사기적 상상력의 포부가 거대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한 엘리트 코스 미대 교수가 젊은 나이에 대형 미술 행사의 총기획자로 뽑혔는데, 알고 보니 박사학위가 가짜, 더 알고 보니 석사도 가짜, 더 알고 보니 학부도 가짜, 경력도 수상하고, 한마디로 모든 단계에서 총체적인 사기였다는 것. 그리고 한번 이 사건이 확 뜨자마자, 유사 사례들이 줄줄이 이어졌다. 가짜 미국 대학에서 학위를 받아왔다는 사람들이 무더기로 걸리고, 한 영어강사도 학력 사기가 드러나고… 이런 고구마 줄기 캐는 듯한 흐름은 아마도 한동안 잠잠해지지 않을 듯.

그런 와중에, 일각에서는 또 다른 이야기도 나온다. 실력이 있으면 됐지, 학력이 무슨 상관이냐. 오히려 학력이 없음에도 그만큼 잘 나갔다는 것은 실력을 증명한 것이고, 한국사회의 학벌 만능주의를 깬 사건이라는 주장들 말이다. 물론 이것은 순진할 정도로 정의로운 주장이기는 하지만, 한 가지 중요한 전제가 빠져있어서 문제다. 바로 사기에는 피해가 따른다는 것이고, 사기를 정의로 인정해주는 순간 그 피해는 은폐되어버린다는 것이다.

『검은 사기』라는 만화는 온갖 종류 사기의 백과사전이다. 주인공은 사기꾼들을 전문적으로 사기쳐먹는 사기꾼인데, 덕분에 너무나도 기발한 사연들을 많이 접하게 된다. 원래 사기는 노리고 접근하는 사람, 멍청하게 속아주는 사람, 그리고 법적 제도적 허점들이 조화를 이루기에 사기는 성공하는데, 주인공은 그 삼각구도를 다시 한 번 살짝 비틀어줌으로써 원래 사기꾼이었던 자를 사기당하는 위치로 몰아넣는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어떤 수많은 사기 사건의 사연 속에서도 항상 공통적인 것이 한 가지 있다. 바로 사기에는 항상 어떤 피해가 뒤따른다는 점. 무언가를 빼앗긴다는 직접적인 피해, 그런 식의 사기가 통용된다는 점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겪는 사회에 대한 불신 같은 간접적인 피해 등 피해는 항상 있다. 심지어는 피해자가 사기 당해서 피해를 입고도 당한 줄도 모르는 경우도 있는데, 그렇더라도 피해는 결국 언젠가 발목을 잡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사기는 어떻게 포장되든, 심지어 주인공이 하는 ‘사기꾼에 대한 복수’로서의 사기라고 할지라도 여전히 범죄인 것이다.

꼭 돈 떼어먹은 것이 아니라 사기 명성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짝퉁을 만들기 위해서는 각종 도둑질이 동원된다. 이번에 걸린 큐레이터 미대 교수만 하더라도, 사기 명성을 높이기 위해서 남의 공로 가로채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한다. 전임자나 외부 큐레이터가 들고 온 기획도 다 자신의 것으로 했고, 사기 박사학위의 가짜 논문도 남의 것을 그대로 (심지어 제목도 안 바꾸고) 표절한 것이다. 영어강사는 자신에게 유명대 석사학위를 사기로 부여함으로써 어디엔가 있었을 수 있는 다른 실력 있는 경쟁자의 진입을 막았으며, 나아가 자신에게 부당한 불리함으로 작용했다고 생각했을 그 학벌 만능주의의 벽을 오히려 더 높였다. 그들이 증명한 것은 ‘실력’이 아니라 단지 ‘출세‘일 뿐이고, 출세를 위해서 사기를 쳐도 꽤 오래 통용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기는 사회적 피해를 입혔다.

실력과 출세를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 발생한 피해를 무시하고 성공의 화려함에만 높은 가치를 두는 이들이 사회 정의를 울부짖을 때, 제대로 실력으로 평가받는 사회는 한 발짝 멀어진다. 최소한 사기를 당했다고 밝혀졌으면, 피해를 평가하고 그 이상의 사기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 정상이다. 사기 사건을 바라보며 학벌 타파의 통쾌함에 쾌감을 느끼기보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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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팝툰>. 씨네21 발간. 세상사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그 양상을 보여주는 도구로서 만화를 가져오는 방식의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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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thoughts on “사기는 피해가 있으니 사기다 [팝툰 만화프리즘/1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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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않는다. 게다가 가끔은 줄줄이 사탕 현상도 있는지라, 지난 호에 썼던 학력사기 이야기가 다시 오만 사람들의 고백 행진으로 뻗어나가질 않나… 거의 3주 전에 […]

Comments


  1. 한마디로, ‘결과가 수단을 정당화한다’는 Post-IMF적 사고의 한 단면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건과 반응아닌가 싶습니다.

  2. !@#… advantages님/ post-IMF적이라기보다 post-광복적 사고 같더군요. 아니 어쩌면 더 거슬러올라갈지도? :-)

  3. 그런데 아랫사람 연구성과 가로채는 게 신정아 씨만 저지른 일일까요?
    학계에서 그런 착취를 ‘관행’으로 여기기 때문에 그냥 그러려니 했던 게 아닌지?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사기꾼임을 몰랐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영어 강사를 하고 싶고, 영어 가르칠 능력도 되는데 ‘학력’ 때문에 진입할 수 없다면?

    컬럼을 읽다보니 떠오른 생각입니다.

  4. !@#… IamX님/ 착취를 관행으로 여기는 것, 확실히 큰 + 만성적인 문제죠. 아마 더 자세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길겁니다. // 영어강사를 하고 싶고 가르칠 능력이 된다면, 원하는 직장에서 요구하는 학력 조건도 쌓는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아무리 운전솜씨는 두부집 아들이라도, 면허를 먼저 따지 않으면 도로로 내보낼 수 없듯이. 하지만 사실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건’은 의외로 그렇게 세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모 방송 영어강사만 해도, 그 정도의 학력을 애초에 실제로 요구한 적이 없으나 스스로 그 정도의 간판이 필요하다고 “느껴서” 사기의 길을 간 것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