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잡지 ‘헤비메탈’ 이야기 [판타스틱… 에 실리지 않음]

!@#… 장르문학/문화잡지 월간 ‘판타스틱’의 창간 준비호에 들어갈 예정이었으나, 스케쥴상 창간준비호 없이 바로 창간호가 나오고 창간호용 원고가 다른 기사로 이미 들어가버리는 바람에 졸지에 붕 뜬 글 (사실 칼럼 코너 자체가 지면 개편으로 2호 만에 없어지기까지…). 그냥 다른 지면 찾을 때까지 고이 보관해둘까 했다가, 그것도 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싶어서 그냥 적당히 공개. 아름다운 도판들은, 알아서 구글이미지검색님에게 물어보세요. ‘헤비메탈’이라고 키워드를 넣으면 아마 긴 생머리와 각진 턱의 기타 청년들 사진이 난무할테지만.

 

김낙호의 판타스틱 코믹스월드:
만화잡지 ‘헤비메탈’ 이야기 — 다른 세계의 풍광과 반라의 여자들

김낙호(만화연구가)

진지한 문학도들에게 환상 문학을 감상한다는 것은, 다른 룰에 의해 움직이는 다른 세계 이야기를 통해 우리 세계에 대한 각종 성찰과 비유를 즐긴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이야기 하면, 나에게는 끝내 주게 멋진/우울한 환상 세계, 또는 은하계 너머 어딘가에 있을 다른 세계의 풍광과 소품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자체가 주는 즐거움이 먼저다. 그 신기한 세계 속에서 주인공들이 음모에 휘말리고 모험을 벌이는 이야기가 재미있는 것이다. 이왕이면 에로틱한 상상도 자극하면 더욱 좋겠지. 장르 문학은 무슨 철학적 사유이기 전에 펄프 픽션을 발판 삼아 자라 온 정진정명 대중 문화다. 그렇기에, 아드레날린의 상상력을 눈에 보이도록 생생하게 그려내는 것이야말로 팬들의 근원적 염원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70년대, 판타지와 SF에 대한 관심은 치솟지만 소설들은 자꾸 관념적이 되어 가고, 영화로 표현하기에는 특수 효과 기술이 너무 빈약하거나 비싸던 시기, 그 염원을 담아 창간된 잡지가 하나 있었으니 바로 만화 잡지 <헤비 메탈>이다. <헤비메탈>은 7-80년대는 물론 90년대에 들어서는 시점까지도 서구에서 판타지와 SF 장르 성인취향 만화의 자극적 오락과 품격의 정점에 서있던, 아니 동의어로 쓰이던 잡지다. 이러한 대표성 덕분에 1998년에는 국내에서도 이 잡지의 한국판을 출간한 바 있다 (유감스럽게도, 장르 팬 기반이 부족했는지 3호만에 종간되었지만).

시작은 프랑스에서였다. ‘벅 로저스’ 같은 펄프 SF 시리즈, ‘슈퍼맨’을 위시한 각종 슈퍼 히어로 물 등 각종 미국 대중 문화의 세례는 물론, 로버트 크럼의 노골적이고 반체제적인 언더그라운드 만화의 영향을 더한 데다, 점점 철학적으로 발전하고 있던 당대 거장들의 SF 소설을 흡수한 일군의 만화 작가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상상력을 문자 그대로 ‘보여 주고’ 싶어했고, 그것도 최대한 성인 취향으로 폭력적이고 에로틱하면서도 동시에 스타일리시하기를 희망했다. 드넓은 세계의 풍광, 그 속의 폭력적인 모험들과 무척 시원스러운 복장을 하고 다니는 육감적 여인들. 그래서 이들은 1974년에 <메탈 위를랑>(울부짖는 메탈)이라는 잡지를 창간했는데, 계간에 전 68페이지 중 컬러 페이지는 얼마 되지도 않던 저예산 잡지였다.

그러나 그 시작은 작았으나 성장은 창대해서, 무한한 기하학적 공간과 비행 이미지의 달인 뫼비우스, 현란한 연출의 스페이스 오페라 명인 드뤼에, 폭력을 극단으로 끌고 가는 리처드 코벤, 뫼비우스의 아류로 시작했으나 특유의 정치적 비유로 금새 당대의 대표적 만화가로 발돋움한 엥키빌랄 등 수많은 빅네임들을 이내 양산했다. 물론 SF 단편 소설의 만화화 역시 종종 있었지만, 소설 특유의 관념적 느낌보다는 화면으로 펼쳐지는 환상 세계의 독특함과 모험물의 재미가 대세를 이루었다. 특히 뫼비우스는 70-80년대 내내 ‘아르작’ 연작, ‘밀폐차고’ 연작, ‘잉칼’ 시리즈 등 연타석 홈런을 날리며 이 장르 만화의 신영역을 개척해 나가고 있다.

창간 3년 만에 <메탈 위를랑>은 이들의 영감에 모태를 제공했던 미국으로 역수입되었다. 사실 미국은 60년대 내내 만화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는 분위기였고 장르 만화 판에서는 아동/청소년 취향에 눈높이를 맞춘 슈퍼 히어로 물의 무한 결투 패턴만 무한 반복되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1977년에 미국 출판사에서 <메탈 위를랑>의 만화들을 개제하는 잡지를 창간, <헤비 메탈>이라는 제호를 붙인 것이다. 게다가 월간에 풀 컬러(당시 미국 만화책은 소위 신문 컬러라고 불리는, 제한된 색 수와 바랜 듯한 색조의 저가 인쇄를 이용했다)로 가는 모험까지 감행했을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하지만 <헤비 메탈>이 <메탈 위를랑>과 다른 자신만의 색을 찾게 된 것은 2년 뒤의 일이었는데, 출판인 레너드 모글이 SF 잡지 계에서 잔뼈가 굵은 테드 화이트를 영입한 것이다. 그 결과 1979년부터 미국 작가들의 작품을 싣는 자체 기획 면이 늘어남은 물론, SF 단편 소설, SF/판타지 영화 소개 및 칼럼이나 뉴스들까지 다루는 명실상부한 SF/판타지 전문 잡지로 거듭났다. 그 결과 (다소 매니악한) 청년 문화에서 <헤비 메탈>의 인지도는 점점 상승, 1981년에는 여러 에피소드들로 구성된 전설의 컬트 애니메이션 <헤비 메탈>이 제작되기도 했다. 애니메이션 판 역시 잡지에서 선보이는 강렬한 시각 체험을 강조했고, 비록 검열상의 문제로 성적인 부분은 순화됐으나 폭력성과 기이한 풍광 묘사는 상당해서 다양한 반문화 행사의 배경 화면으로 널리 애용되곤 했다. 이렇듯 미국의 <헤비 메탈>은 프랑스의 <메탈 위를랑> 이상으로 고공 행진을 하며 승승장구를 거듭했다.

모든 것은 차고 나면 기우는 법. 프랑스의 <메탈 위를랑>이 먼저 무너졌다. 8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서, 70년대부터 펼쳐진 특유의 거대한 스케일과 과장된 세계관이 점차 호소력을 잃어 갔던 것이었다. 록 음악에서도 판타지풍 설정의 과대망상 대하 서사 밴드들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고, SF 소설에서는 사이버 펑크 같은 현실주의적 미래 세계가 득세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만화 역시 압도적인 필력의 거대한 세계 묘사보다는, 소소하고 드라마틱한 이야기 위주로 취향이 바뀌고 있었다. 잡지 역시 그런 변화에 적응하려고 노력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게다가 당시 프랑스에서는 잡지 형식의 만화 읽기가 사라지고 있었기에, 결국 <메탈 위를랑>은 1987년에 종간을 맞이했다. 물론 <헤비 메탈>의 모태가 되어준 <메탈 위를랑>을 되살리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1998년에 <메탈 위를랑>을 출판했던 출판사 ‘위마노이드 아소시에’의 미국 지사 ‘휴머노이즈 퍼블리싱’이 다시 나선 것. 프랑스에서 만화 붐이 다시 시작되고 잡지 형식의 만화가 하나씩 고개를 들던 2002년에 재발간이 야심차게 이루어졌으나, 결국 2004년 14호만에 다시 종간되고 말았다.

미국의 <헤비 메탈> 역시 예외가 아니어서, 86년 이후 계간과 격월간을 오가는 등 경영난을 보였다. 하지만 이때 의외의 원군이 나타났으니, 바로 인디 만화가 출신으로 뜻밖의 대성공을 거두었던 케빈 이스트먼이었다. 처음에는 패러디 단편에 불과했던 ‘닌자 거북이’ 시리즈가 대박을 터트려서 모은 돈으로 잡지사를 1991년에 인수한 것이었다. 발행인의 인디 작가주의 옹호 성향 속에서, 결국 <헤비 메탈>은 예전의 영광과 대중적 인기는 없다 할지라도 비교적 안정적으로 2007년 현재까지도 성과 폭력과 드넓은 별천지 풍광과 모험을 결합시키는 자기 색깔을 유지하며 나오고 있다.

2000년대도 후반에 들어선 지 오래인 지금에 볼 때 <헤비 메탈>의 구식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비키니 모양 갑옷을 입은 여자들이 익룡을 타고 날아다니는 머나먼 은하계의 사막 행성 위에서 벌어지는 우주를 구할 절대 물질을 둘러싼 모험이 먹혀 들기에는 지금 시대는 너무나…… 인터넷과 휴대폰스럽다. 하지만 판타지를 즐기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바로 거대한 상상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질 때 오는 근원적인 즐거움이라는 생각은, 필자가 구식이기 때문만은 아닐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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