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류 슈퍼히어로물을 통해 실로 많은 정치적 함의를 담아낼 수 있었으나, 시빌워 이벤트 이후의 뒷수습이나 후속 크로스오버 이벤트들을 통해서 그런 가능성들을 싸그리 날려먹은 케이스.
공권력과 자경단 – 『시빌워』
김낙호(만화연구가)
정의의 슈퍼히어로들이 정상적인 인간사회에서라면 사실은 꽤 민폐일수 있다는 아이디어는 사실 꽤 오래 전부터 활용된 소재다. 비교적 최근에 나왔던 배트맨 영화 ‘다크나이트’보다 훨씬 거슬러 올라가, 87년에 슈퍼히어로물의 새로운 자아성찰을 제시했던 만화 『왓치맨』에 쉽게 도달한다. 아니 한 발 더 나아가, 스파이더맨이 만화 지면에 처음 데뷔했을 때부터 작품 속에는 그를 ‘공공의 적’으로 묘사한 신문이 중심에 놓여 있었다. 이왕 정의를 위해 일을 해준다고 자처하니 그것은 뭐 반가운 일이지만, 인간사회의 힘으로 통제가 되지 않는 초월적 힘에는 항상 불안요소가 있다. 불안요소를 신앙으로 변환해서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의 해결책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했다가 뒤통수를 맞을 위험성을 배제하기에는 슈퍼히어로들이 너무 인간적이라는 것이 문제다. 인간적이기에 정의의 개념이 주관적일 수 있고, 결국 인간사회의 복잡한 이해관계와 얽히면 얼마든지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게다가 슈퍼히어로와 싸우는 적들 또한 종종 초월적 능력이 넘쳐서, 인간사회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지듯 위협에 처할 수도 있다. 힘의 의미와 책임감 있는 통제라는 핵심 테마가 초창기 슈퍼히어로물에서는 개인의 도덕성에 의존하고 끝났다면, 좀 더 훗날의 작품들은 그런 순박함을 벗어나 좀 더 사회적 장치들을 언급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슈퍼히어로물은 좀 더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도 현실의 반영이라는 양념을 뿌려가면서 시대에 적응해왔다.
『시빌워』(마크 밀러, 스티브 맥니븐 / 시공사)는 미국의 양대 만화출판사 가운데 하나이자 슈퍼히어로물 장르의 명가인 마블에서 2006-2007년에 진행한 대형 프로젝트에서 척추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원래 마블에서 출판하는 다양한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각각 주연으로 나오는 여러 만화 시리즈들이 있는데, 그 연재작품들이 하나의 스토리 속 이벤트를 동시에 각각의 방식으로 다루어주는 것으로, 소위 ‘크로스오버 이벤트’라고 한다. 그런데 이번 프로젝트의 핵심에 놓인 이벤트는 바로 마블 출판사의 주요 슈퍼히어로 캐릭터들이 거의 전부 두 패로 나뉘어 내전을 겪는다는 것이었다. 그 가장 중심이 되는 줄거리를 담아내는 것이 바로 『시빌워』다. 내용은 슈퍼히어로들이 악당을 쫒다가 사고로 대형 민간인 피해가 발생한 폭발사건 후, 미국정부가 슈퍼히어로에 대한 악화된 여론을 수습하는 일환으로 슈퍼히어로 등록제를 선언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즉 정부가 슈퍼히어로들의 인적사항을 파악하고, 그들을 공권력의 일부로 받아들여 관리한다는 것이다. 이미 민간 정체성이 만천하에 알려졌으며 경영자 마인드가 다분한 ‘아이언맨’이 등록파의 수장으로 나서서 다른 슈퍼히어로들을 끌어들이려 한다. 그 대척점에는 슈퍼히어로의 정체성은 힘을 가진 개인들이 정의를 위해 일어서는 자경단 정신에 있다고 보며 정치논리에 타락할 수 있음을 우려하여 현 상태를 유지하고자 하는 반등록파들이 있다. 반등록파의 수장에는 자신은 비록 군인출신임에도 공권력으로서 업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개인들의 용기로 성취하는 정의를 옹호하는 캡틴아메리카가 나선다. 반등록파에 대한 정부의 체포령이 떨어지고, 결국 수많은 슈퍼히어로들로 이루어진 두 진영이 서로 물리적으로 충돌하게 된다. 그 와중에 등록파로 나서서 대중 앞에서 가면을 벗은 스파이더맨이 그 결과 불행한 일을 당한 후 반등록파로 돌아선다든지, 반등록파를 완전히 압도하기 위해 등록파가 슈퍼악당들을 동원한다든지 하는 여러 이야기가 촘촘히 펼쳐진다.
『시빌워』가 반영하고 있는 시대상황은 두말할 나위 없이, 포스트 9/11의 미국사회다. 9/11 테러가 불러일으킨 ‘공포’ 분위기는 미국 사회 전반의 가치관을 수년동안 완전히 바꾸어놓을 정도의 힘이 있었다. 미국에서는 오히려 보수층이 매우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인 개인의 자유 보장이, 사회의 안전을 위해서 상당 부분 양보해도 되는 것으로 치부되었다. 감시와 검열을 폭넓게 허용하는 애국자법 같은 제도, 이웃집 아랍계를 신고하는 불신의 문화, 그리고 무엇보다 근거 희박한 침략전쟁이라도 안보의 이름으로 정당화시키는 국가급 악행이 버젓이 지지받았다. 그런 분위기를 슈퍼히어로물에 반영하여, 개인의 자유라는 가치와 사회 안전을 위한 일정 정도 희생을 놓고 서로 갈등하도록 만든 셈이다. 비록 작품상의 결말은 한쪽의 사실상의 승리로 끝나서 완결성을 주려 하지만, 이야기 내내 어느 쪽의 손도 들어주지 않기 위해 큰 공을 들이고 있다. 두 진영의 세력과 물리력을 균등하게 배분하는 기계적 배분만이 아니라, 양측의 주장 모두 일리가 있도록 만들고 서로의 이야기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게 포장하고 있다. 정부요원으로 등록을 하는 한이 있더라도 시민의 불안감을 줄여야 슈퍼히어로로서 정의를 계속 추구할 수 있는 것도 사실이고, 정치권력의 일부가 아니라 개인의 자발적 정의의 상징이어야만 슈퍼히어로가 역할모델로서 의미를 지니는 것도 사실이니까 말이다. 다만 아쉽게도 이미 주어진 조건으로서 당대 현실을 작품 속에 그대로 이식했을 뿐이지, 그런 갈등을 강요하는 사회분위기 자체가 과연 옳은 것인가에 대해서는 유감스럽게도 성찰이 그다지 깊지 않다. 작품의 주인공은 슈퍼히어로들이지, 그들이 사는 세계의 시민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정치사회적 맥락을 뒤로 하고서라도, 슈퍼히어로들끼리의 대규모 대결이라는 점에서 이 작품은 장르적 재미가 상당한 수준에 이른다. 수십년간 ‘어벤져스’ 특공대로 힘을 합쳐 악인과 외계인, 괴물들을 물리치던 마블의 핵심 캐릭터들이 절반으로 나뉘어 서로 싸운다니, 얼마나 흥미진진한가. 누가 어떤 능력으로 상대를 제압할지 초능력의 상성까지 생각하면, 이런 대규모 난전은 더욱 재미가 붙는다. 『시빌 워』는 시각적 측면에서도 수많은 캐릭터들이 한꺼번에 등장하고 서로 어지럽게 섞여도 꽤 뚜렷하게 구분할 수 있는 세밀하고 정확한 필력이 돋보인다. 비록 그림체가 역동적인 과장이 부족한 스타일이라서 골수 미국만화 팬들에게는 단점으로 지목되기도 하지만, 적당한 취향의 일반 독자들에게는 이쪽이 훨씬 호소력이 클 법하다. 꽤 많은 이야기를 무리 없이 소화하는 압축적 연출력도 주목할 만하다. 물론 마블 슈퍼히어로 세계관에 충분히 익숙하지 않은, 즉 장르에 친숙하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기존 캐릭터들이 한꺼번에 별다른 설명 없이 쏟아져 나오기에 난감한 구석이 많다. 그 경우에는 실존인물들을 바탕으로 한 역사극을 보는 기분으로 보면 좀 더 쉽게 적응할 수 있을 것이다.
통합된 세계관과 교차출연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 슈퍼히어로물에 처음 입문하는 분들에게 권장하기는 다소 망설여지지만, 반대로 그 취향의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고 싶은 분들에게는 반드시 추천할만 하다.
Civil War 시빌 워 마크 밀러 지음, 최원서 옮김/시공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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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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