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전에 쓴 씨네21 단평의 확장판 격.
분야 전문가의 시대를 위한 삼국지 – [삼국지 가후전]
김낙호(만화연구가)
대중문화 작품에 대해서 그 안에 담긴 캐릭터들을 파고들며 세부적으로 심취하는 것을 ‘오타쿠’적이라며 폄하하기 좋아하는 기성세대들마저도, ‘삼국지’라는 중국 소설에 대한 심취 만은 대단히 주류적인 것으로 취급하며 시민권을 인정해왔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에 대해서 캐릭터 취향에 따라서 ‘레이파’와 ‘아스카파’ 팬덤이 갈리는 것은 의아하게 또는 한심하게 바라보면서도, 유비와 조조와 손권에 대해서는 편을 들고 리더십을 자랑스레 논하는 것이다. 나아가 원래의 이야기 뼈대를 새로운 시각으로 재해석하는 작품들이, ‘동인지’라고 칭해지기보다는 ‘신역’으로 불리며 필수도서로 등극하곤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삼국지를 세 번 읽은 사람과 말다툼을 하지 말라”라는 격언이 나름 유명하게 퍼졌을 정도로 어째선지 무슨 세상 살아가는 비급처럼 취급당하기 때문이다. 분명히 삼국지에는 다양한 도덕 관념과 재능을 지닌 여러 인물들이 협력과 충돌을 반복한다. 다양한 세력들이 난세를 평정한다는 목표를 향해 경쟁하고, 그 안에서 다양한 방식의 리더십에 입각한 조직 문화(!)가 선보인다. 이 모든 과정을 전개시키는 것은 주로 전쟁이라는 명확하고 긴박감 넘치는 무력충돌의 드라마틱함이다. 이런 요소들이 아무래도 고대 중국의 일화로 머물지 않고 우리들의 오늘날 사회 생활에서 공감대를 형성하는 부분이 있는데, 특히 늘 어려운 난세라고 주입 받으며 조직 안에서 전쟁 같은 사회생활을 하는 우리들의 오늘날과 맞닿아있기 때문일 듯 하다.
그런데 삼국지연의라는 원본 소설은 물론이고 수많은 재해석들은 전반적으로 리더의 이야기에 초점을 맞춘다. 하기야 난세에 우뚝 일어나 자기 세력을 만들고 전쟁에 나서서 천하를 평정하러 가는 것이 더 호쾌하기는 하다. 현대적 공감대를 표방한다고 새롭게 서술한다고 해도, 유비의 도덕정치보다 조조의 효율성을 근대적 가치로 포장한다든지 하는 리더십의 차이를 논한다. 하지만 정말 현대적 교훈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면, 리더보다는 분야 전문가의 대처에 대한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당장 독자인 나 자신이 리더가 되기보다는 어떤 그룹 안에서 특정한 역할을 하는 분야 전문가로 살아갈 가능성이 훨씬 큰데, 그런 조건 안에서 가장 확실한 역사적 이야기 거리를 남기는 방법은 무엇인가.
[삼국지 가후전](마사토끼, 브레이브치킨 / 애니북스 /1권 발매중)은 가후라는 모사, 즉 기획자를 주인공으로 하여 삼국지의 큰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가후는 한 나라를 이끄는 군주가 아니었음은 물론이고, 신의 같은 도덕적 가치에서 돋보이거나 적벽대전 마냥 거대한 전쟁에서 신출귀몰하게 사실상의 리더급 활약을 자임한 것도 아닌 인물이다. 하지만 난세의 와중에 여러 군주를 옮겨가면서도 늘 실패하는 전략적 선택을 하지 않았다. 즉 충성을 다하고 불꽃처럼 살다간 것이 아니라, 늘 전장의 기획을 맡으면서도 심지어 오래 살기까지 한, 삼국지 전반의 분위기와 묘하게 동떨어진 인물이다. [가후전]에서 현재까지 발간된 내용은 가후가 나이가 상당히 찬 이후에 처음 관직에 나서서 동탁의 수하로 스스로를 세일즈하는 과정, 동탁군에서 안전한 역발상 전략기획으로 성과를 올리는 흐름 등을 하나씩 풀어나간다. 그 과정에서 원래 삼국지의 주역들인 맹장들이 오가며 스쳐지나고, 점점 더 큰 이야기를 위한 준비를 하나씩 펼쳐낸다.
이 작품에서 가후는 정의롭되 지루한 선비가 아니고, 그렇다고 권력에 배고픈 사악한 야심가도 아니다. 세상이 이러다가 어떻게 굴러갈지 눈 앞의 호기심을 위해 자신의 기획능력을 하나씩 실현해 나아갈 따름이다. 민중의 행복을 위해 큰 국가의 틀을 그린다고 자처하기에는 너무 냉정하며, 충성이란 고용주가 자신의 기획을 실현시켜주기에 바치는 업무적 협력에 가깝다. 다시 말해 가후는 현대적 개념의 분야 전문가에 가까운 인물로 묘사되고, 주어진 역할에서 자신의 기획력을 최대한 발휘한다. 그렇기에 그가 만들어내는 것은 명분들이 충돌하는 세상이 아니라 명분을 오히려 치워버린 차가운 정치와 전략이 맞붙는 곳이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원래 삼국지가 그렇다. 도덕군자 느낌을 소설적으로 과장한 한 줌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대부분은 서로 무력으로 밟아버리고 치열하게 사기를 쳐서 눌러버리는 내용이 대부분이다. 결국 제후들이 자기 욕심에 따라서 서로 전쟁 벌이는 ‘난세’의 이야기인데 그 위에 창작자와 독자들의 소망으로 교훈이 될만한 정신적 틀을 입힌 것이라는 말이다. [가후전]의 가후는 이런 현실을 마치 꿰뚫고 있듯, 난세의 상황을 뚫으면 세상의 큰 발전이나 민중의 행복 그런 것이 올 것 인양 거창한 명분이 없다.
이렇듯 기획자라는 분야 전문가의 지극히 업무적인 욕심을 중심에 놓고 삼국지의 이야기를 전개하다 보면 재미가 떨어질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가후는 성공을 위해서 동료들을 규합하고 친한 그룹을 만들어서 어떻게 해보는 것도 거의 없고, 오히려 반대로 자신의 친구들이나 은사에게까지도 완전히 의지하기보다는 매사에 적당한 프로페셔널한 거리감을 둔다. 어떻게 보면 관조적이기도 하지만, 반면 자신의 기획이 실현되도록 만드는 과정에 있어서 만큼은 서슴지 않고 자신의 목숨을 포함하여 커다란 도박을 건다. 처세에 있어서는 쓸데없는 적도, 반드시 구해내야 하는 혈맹도 만들지 않는데,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누구의 친절이든 신뢰든 마다하지 않고 이용해버린다. 뛰어난 현실감각과 그것을 강행하기 위한 무모한 도박 사이의 미묘한 불균형이 바로 이 작품에서 가후를 매력적으로 만드는 핵심 요인이다.
일에 담긴 냉정한 합리성과 열정 사이의 시소게임을 그려나가기 위한 소재로 삼국지의 사건들이 재구성되는 방식은, 스토리를 담당한 마사토끼 작가 특유의 미스터리 추리 구조를 장점으로 활용한다. 뜬금없어 보이는 발상의 기획의 제안, 그 것을 받아들일 것인가를 둘러싼 캐릭터들의 심리전, 그 발상 안에 담긴 알고 보면 지극히 합리적인 접근법, 그런데 다시금 가장 중요한 부분에서는 사람들의 초인적 결단을 요구하는 무모함 등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이런 방식은 자신의 기획에 심취하는 분야 전문가의 집요한 활약을 몰입감 넘치게 그려내는 것에는 대단히 적절하다.
반면에 대하서사로 기획자의 업무모험담을 만드는 이런 변칙적 접근은, 세상사에 대한 폭넓은 해석이라도 펼치기에는 곤란하기는 하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훈계를 던지는 순간 낯간지러워지고, 냉소하는 순간 냉소를 넘어서기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삼국지라는 텍스트는 워낙 잘 알려져 있기에, 대비 효과만으로도 독자들은 손쉽게 나름의 감상을 얻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삼국지 가후전 1 배민수 그림, MASA 글/애니북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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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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