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위기가 닥칠수록 혼란에 빠져서 악수를 두고, 악수를 두어 더 큰 반발을 사서 더욱 위기가 강화되는 죽음의 하향나선에 빠져버린 듯한 어떤 동네가 있다. 그 동네에서는 이런 식으로 수습하겠어염, 하고 전략이 잡히고 있다한다: “배고파서 화났으니, 밥주면 조용해진다.” (기사 링크)
아니 뭐 그런 면도 당연히 있기야 하겠지만, 정말 상황을 쉽게 보는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별 생각은 하지 않은 것 같지만, 진짜 해답은 자기들이 이미 예전에 이야기했다. 바로 소통말이다. 지멋대로 하고 그렇게 했다고 알려주는 통보 말고, 대화와 토론과 결정을 거치는 그런 진짜 소통. 그런데, 소통이란 단순히 의지가 아니라 권력의 관계에서 나온다. 국민과 대통령 사이에 소통이 안되고 있다면, 그것은 소통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국민과 대통령 사이의 권력관계가 거지 같아서 그런 것이다.
!@#… 소통은 쌍방향 행위고, 쌍방향 행위가 되기 위한 기초중 기초는 바로 효능감(efficacy)이다. 한마디로, 내가 말하면 그것이 어떤 영향을 미친다는 느낌을 받게 하는 것. 그런데 수만명이 촛불들고 밤을 새야 듣는 척이라도 하는 정도라면, 효능감은 개뿔. 왜 열받은 시위대가 맞아가면서까지 청와대로 몰려가는 것 같은가(물론 capcold는 그것을 당연하면서도 잘못된 전략이라고 보지만). 우리가 무슨 말 하는지 좀 들어라 이 자식들아, 라는 항변 아닌가. 상대의 말은 듣는 척도 안하기 때문에 여기까지 온 것이고, 무려 독재 취급까지 받게 된 것임을 전혀 변인으로 고려하고 있지조차 않다. 자고로 CEO라면 아무리 무소불위의 경영권력을 휘두른다 해도, 자신을 고용한 주주총회의 말 정도는 들어야 할 것 아니냔 말이지(capcold는 대통령의 CEO론을 반박하겠다고하며 국민을 무슨 소비자나 고객에 비유하는 꼬라지가 무척 짜증난다).
그런데 솔직히, 상대의 들어주는 능력에 무언가를 의존한다는 것은 참으로 순진무구발랄한 일이다. 상대가 들어줄 수 밖에 없도록 해야 들어줄락말락 하는 것이지. 그러면서도 아무 말이나 다 이루어지지 않도록 적당히 합리적 수렴을 할 수 있는 장치도 필요한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재 한국사회에 필요한 것은,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직접민주주의다. 아니 무슨 칸톤이나 아크로폴리스로 가자는 것이 아니라(중등교육의 폐해), 충분한 민의가 모인 경우 그것을 반영할 수 있는 제도적 경로를 만들어내는 것. 민의를 모으는 것이 기술적으로 무척 어려웠던 시절이라면 모를까, 미디어 기술도 충분히 발전한 오늘날까지 쌩까고 있어야할 알리바이 따위는 없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원래 국회의 몫인데, 국회의 구성은 한 번 이루어지고 나면 지나치게 융통성이 부족하기 일쑤니까. 즉 소통을 위해서는, 국민들의 말이 씨알이 먹히기 위해서는, 국민들이 분노로 길거리에 나서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제도로서 강제력을 가져야 한다. 국민이 곧 국회의 역할을 하는 경로 말이다. 무슨 환타지가 아니라, 실제로 선진 민주주의 국가들에서 여러 형식으로 잘만 쓰고 있는 것들이다.
– 국민소환제. 국민들이 일정 정도 이상의 실효적 문제를 일으킨 자기 대표를 자르는 제도. 좀 더 실용적인 맛보기 차원에서는 지역구에서 쓰이는 주민소환제도가 있다. 누구나 원하고 있기에 수차례 상정되고 있지만, 몇 차 국회에서라도 절대 통과되지 않던 제도이기도 하다.
– 국민발안. 일정수의 유권자가 직접 법안/의안을 제출하는 제도. 한국에는 원래 무려 헌법에 대한 국민발안제도가 있었으나, 유신헌법과 함께 영원한 바이바이. 국회의 힘과 기능은 법을 만드는 것에서 나온다. 그러니까 ‘입법부’지. 국민이 직접 강제력을 발휘하고 싶다면, 법안을 만드는 능력부터다. 게다가 여러가지 이유로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한 신진 장외 정당에게 실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는 길이기도 하다.
– 국민투표. 이건 이미 하고 있기는 하지만, 지금은 국민투표를 붙일 수 있는 주체가 닥치고 대통령이다. 그것도 지금까지 사례로는 오로지 헌법개정에 관해서만. 최소한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는 결정권자가 오로지 대통령 하나에 머물지 않고, 국민의 민의에 의해서 국민투표 여부를 결정할 수 있는 방법이 있어줘야 한다.
이 3가지가 콤보로 쓰일 때 국민은 드디어 강제력을 가진다. 영 못하면 자르고, 법을 발안해서 그것을 투표로 의결한다. 미묘하게 기능이 마비되기 쉬운 국회가 못하는 지점을, 국회권력의 원소스인 국민이 직접 보충하는 것이다. 이런 힘이 있는 대상일 때, 비로소 소통을 강제할 수 있다. 대의민주주의 시스템에서는 국민과 행정부는 국회를 통해서 소통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세상이 좀 더 복잡해져서 국민과 대통령의 직접 소통 역시 필요한 시대라면, 국민과 대통령 사이의 권력관계 역시 직접 균형을 이뤄야 한다.
!@#… 이왕 (일정 부분 구라성 공포의 힘을 빌리는 폐단을 지녔던) 광우병 논리를 벗어던지고 통상과정과 이후 대처과정을 통해 드러난 이명박 정부의 실정 나아가 비민주성에 대해서 항의하는 쪽으로 움직이고 싶다면, 결국 무엇을 목표로 삼아야할지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대통령 탄핵 같은 법을 초월한 선언적 표어는 선명하지만 허망하다. 그보다, 제도를 만들자고 제안하라. 바보를 말리려면 다양한 브레이크가 필요하고, 그 브레이크를 국민이 직접 걸고 싶다면 우선 브레이크를 설치하기부터 해야하지 않겠는가. 국민소환, 국민발안, 국민투표. 시위현장에서 이야기하기에는 좀 복잡하다면, 온라인상의 담론부터 시작해도 좋다. 국민과 직접 소통하는 즉 국민의 목소리가 직접 반영되는 민주주의는, 외침에서 시작할지는 몰라도 제도가 되어야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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