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이유를 유머로 캐묻다: 십자군 이야기
김낙호(만화연구가, 두고보자 편집위원)
“독으로 독을 치유한다” –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전 대통령이자, 수많은 전쟁범죄을 자행한 자의 초라한 말로가 뉴스를 타고 있는 지금 생각나는 구절이다. 현역 석유재벌인 부시라는 자가 세계 최강대국의 대통령이라는 위치를 이용해서 마음대로 남의 나라를 침략해서 사람들을 학살해도 용납이 되는 이상한 시대지만, 적어도 자기들끼리의 심오한 이해관계 충돌 덕분에 이 세상에서 독재자가 한명 쯤 줄어들었다.
전쟁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고 반복되는 패턴이 있다. 최근 출간된 <십자군 이야기>(김태권 작, 길찾기 출판사 / 전6권 예정 / 현재 1권 발매중)는, 전쟁의 이유를 직시하고 있는 교양만화다. 이 만화의 시각은 처음 몇 페이지에서 이미 명확해진다: “문명의 충돌? 문명끼리 어떻게 충돌합니까… 문명인들이라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해주죠.” 서로 다르기 때문에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충돌해야 할 어떤 필요성에 의해서 상대방을 완전히 미개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과정. 그것이 바로 로마시대 이래로 내려온 세계의 역사라는 말이다. 무지의 씨앗을 뿌려놓을 때 사람들은 충돌과 오해의 악순환 속으로 빠져들며, 그 와중에서 어떤 세력들은 살며시 미소지으며 자기 잇속을 챙겨나간다.
<십자군 이야기>의 주된 줄거리는, 중세 서양의 십자군 전쟁의 과정의 소개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전쟁의 스펙터클이 아닌, 다양한 이해관계에 대한 풍자에 있다. 그리고 놀랍게도 그 속에는 현재 21세기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는 동방과 서방, 이슬람의 정치권력 관계의 패턴이 재현되어 있으며, 지금 TV를 틀면 화면에 나올 법한 뻔한 정치인들과 그들의 행태가 그대로 이전에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뭔가 팍팍하고 계몽적인 느낌 – 다시 말하자면, “재미없는” 만화일 것이라는 걱정은 처음부터 접어놓기를 바란다. 작가가 매 순간마다 언어유희와 상황 개그를 일삼으며 독자들에게 말을 건네오는 실력은, 마치 지금까지도 이 분야의 고전으로 남아있는 <고우영 삼국지>과 <먼나라 이웃나라>의 장점을 섞어놓은 듯 하다. 무엇보다도 그 이전에, 아마도 부시의 선조인 듯한 호전적인 나귀와, 서방과의 우호관계와 자주적 실리 사이에서 희극적인 고민을 계속하는 동방의 어떤 황제, 각자의 잇속을 위해서 경주하는 여러 기사들이 벌이는 난리판 그 자체가 이미 일류 코미디인 것이다.
의도적으로 중세 서양화 풍으로 구사된, 단순하면서도 미려한 그림은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이다.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시대를 묘하게 왜곡되어 있는 그림들의 연속으로서 연출해나가는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시각적 연출 덕분에 설명 부분과 드라마 부분의 경계선이 한층 희미해지면서, 이야기로서의 재미와 유익한 교양정보의 전달이라는 두 가지 목표를 종시에 훌륭하게 충족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본서 작가서문의 마지막은 한 인용구절로 끝나고 있다: “기억은 약한 자들의 마지막 무기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것이 바로 <십자군 이야기>가 개인이든 대여점이든 도서관이든, 모든 서가에 꼽혀있여야만 하는 충분한 이유다.
[으뜸과 버금 2003.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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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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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ii4031 –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펌~ 2005/08/21 17: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