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살기로 한자 익히기 – 마법천자문
(스튜디오 시리얼 / 2003, 아울북 / 현재 2권까지 출간중)
김낙호 (만화연구자/두고보자 편집위원)
아이들의 기억력이란 참으로 신기하다. 방금 삼십분전에 시킨 심부름이나 구구단 같은 것은 어느틈에 깨끗하게 잊어버리지만, 티라노사우루스 렉스니 벨로시랩터니 하는 그 길고 긴 공룡 이름들은 고고 생물학자들보다도 더 줄줄 외우고 다닌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모들이 애들은 여하튼 잘 외우는구나, 라고 생각하고 무조건 생물학 도감을 들이밀면 역효과만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 차이는 무엇일까?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핵심적인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몰입하는 것에 대해서는 엄청난 집중력과 학습능력을 발휘한다는 점을 많은 이들이 들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우리가 필요로 하는 대답은, 그렇다면 어디에 몰입하는지에 대한 것인데, 이 부분은 약간 더 어렵다(만약 확실한 답을 알고있다면, 한국땅에서는 쉽게 떼부자가 될 수 있으리라). 필자는 상식적인 수준에서의 접근을 좋아하는지라, 그 해답은 “자기들의 생활과 관계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애들이 무슨 생활? 모르시는 말씀. 아이들의 생활은, 부모들이 폄하하는 것 이상으로 심오하고 복잡미묘하다. 서로 다른 개성과 능력에 의한 경쟁관계, 성장, 강한 것에 대한 동경, 점차 복잡미묘해지는 인간관계 등이 여과되지 않고 날것 그대로 다가오는 시기인 것이다. 그런 생활경험에 기반한 욕구들을 반영하는 환타지를 하나의 줄거리로 담아내는 작품이라면, 열렬한 환영을 받게 된다. 쉽게 말해서, <포케몬>의 히트는 단지 피카츄가 귀엽게 생겼기 때문이 아니라는 말이다. 만약 그 지점을 확실하게 공략할 수만 있다면, 아이들에게 뭐든지 – 심지어 한자공부라도 – 시킬 수 있다.
그런데, 아니나 다를까 진짜로 그런 책이 나오고 말았다. <마법천자문>이라는 제목의 이 책은 서유기의 주인공들을 바탕으로 하는 소년만화 스타일의 작품으로, 필살기 중심의 대결구도가 펼쳐지고 있다. 소년취향 만화의 단골소재인 필살기라는 개념은, 사용자의 개성에 따라서 다르게 나타나며 그 상성이 다르기 때문에 무궁무진한 상상력과 승패결과를 조합해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 필살기로 한자를 사용한다면? 허공에 소(小)를 쓰면 상대가 작아진다든지, 화(火)를 쓰면 불길이 치솟는다든지, 그것을 수(水)자를 써서 물벼락으로 꺼트린다든지 하는 대결의 묘미가 생겨난다. 더 어려운 한자를 상황에 맞게 구사할 줄 아는 자가 바로 강자이며, 그러한 고수가 되는 것이 바로 성장의 척도가 된다. 악의 마왕에게 맞서기 위한 방법은 주인공의 끊임없는 수련 – 즉 한자공부다. 익숙하면서도 동시에 능숙한 장르법칙에 따라서 깔끔하게 연출되는 우정과 대결, 배신과 믿음,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성장해나가는 매력적인 캐릭터들의 모험. 그 모험에 동참하는 어린 독자들은 자연스럽게, 같이 그 한자를 되뇌이고, 종이에 끄적거리면서 다음 페이지를 넘기게 된다. 이런 방식이라면 천자문이 아니라 사서삼경이라도 어느틈에 다 익힐 수 있을 것이다!
학습만화의 미덕은, 단순히 얼마나 좋은 정보가 많이 들어있는지가 아니다. 얼마나 대상독자들의 눈높이와 관심사에 맞는 재미를 주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무언가를 배우도록 유도할 수 있는가다. 능숙하고 매끄러운 이야기, 깔끔한 화면연출, 매력적인 캐릭터 구축이라는 전통적인 만화 기반 위에, 한자마법 필살기라는 새로운 요소를 섞어넣은 <마법천자문>은, 홍은영의 <그리스/로마 신화>의 아성을 이어나갈 차세대 기대주로서 손색이 없다.
[으뜸과 버금 200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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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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