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그의 호흡에 관하여 – <트라우마> [으뜸과 버금 0405]

개그의 호흡에 관하여 – <트라우마>

김낙호 (만화연구가 / 웹진 <두고보자> 편집위원)

만화라는 말을 들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입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해보도록 하자. 설마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날 아직도 ‘유치하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르시는 시대착오의 화신같은 분들은 다행히도 거의 멸종하셨으리라 믿는다. …이렇게 겁을 주고 나면, 대부분의 경우는 ‘유머’라는 이미지가 당장 떠오르는다고 대답하기 마련이다. 아니나 다를까, 만화를 영어에서 지칭하는 용어는 이미 잘 알려져있다시피 ‘코믹스’다. 의미 그 자체에 코믹한 것이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이 용어는 만화가 지난 역사동안 간직해온 대표적인 얼굴이 (좋든 싫든) 유머에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만화를 통해서 폭발적인 웃음을 만들어내는 것이 다른 장르보다 더 쉽다거나 하는 것은 결코 아니지만 말이다.

유머를 단지 만화의 한 요소로 활용하는 것 이상으로, 아예 그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장르를 흔히 ‘개그만화’라고 부른다. 개그만화는 주어진 단위 지면 안에서 확실한 웃음을 이끌어 내는 것이 최고의 미덕이다. 때로는 200여 페이지짜리 책 한권, 때로는 한 페이지에 불과한 그 속에서 어떻게 독자들의 웃음보를 터트릴 수 있을까. 가장 중요한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기발한 소재의 발굴이며, 다른 하나는 이야기의 리듬을 조절하여 독자들의 몰입도를 가지고 장난치는 것이다. 특히 매일 4페이지 가량씩 연재되는 표준적인(?) 스포츠신문 개그만화의 경우, 위의 두 가지 요소를 거의 공식화시키기에 이르렀다. 독자들에게 친숙한 짐짓 진지한 상황을 때로는 있는 그대로, 또는 만화적 비유를 통해서 약간 틀어서 점차 고조시킨 다음, 마지막 한칸을 통해서 화려한 반전을 주며 독자를 놀래킨다. 그 마지막 반전 장면이 성공하면, 독자는 작품에서 눈을 떼면서 순간 폭소를 터트린다.

하지만 다른 방식의 개그 리듬은 어떨까. 반전이 한박자 일찍 찾아오고, 그 뒤에 다시 한번 짤막하게 개그를 반복하는 경우를 생각해보자. 엇박자인 셈이다. 달변의 자타공인 개그맨이 화려하게 이야기를 풀어놓는다는 느낌보다는, 어눌하게 실없는 농담을 하면서 사람들의 반응이 썰렁하다 싶으면 그 개그를 다시 한번 구차하게 반복해주는 느낌이다. 전자의 경우는 한번의 폭소를 폭발시키는 것이 장점이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야기가 끝난 다음까지도 계속 키득키득대고 다시 한번 생각나게 만드는 효과가 있다. 엄청난 상상력을 발휘할 듯 하면서도 사실은 일상적이고 소심한 상황으로 수렴되는 소재와 결합할 때, 이런 ‘허허실실’ 개그 리듬은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스포츠서울에서 인기리에 연재중인 <트라우마>라는 만화는 바로 이런 만화다. 엇박자의 개그와 ‘쪼잔한’ 캐릭터들의 향연 속에서 4페이지 단위로 매일매일 독자들에게 웃음을 선사하여 많은 인기를 누려왔다. 그리고 이들의 기대감 속에, 우선 두 권의 책으로 묶여서 단행본이 발간되었다. 물론 단행본으로 묶이면서 하루에 4페이지짜리 에피소드 한개씩 찾아보는 일상적 즐거움의 리듬은 아쉽게도 사라졌지만, 대신에 각 권 400 페이지를 넘는 두터운 레퍼토리의 융단폭격이라는 새로운 무기로 독자들의 웃음보를 공략하고 있다. <트라우마>는 재능이나 발상에 전적으로 의지하기보다는, “부지런한” 개그만화다. 그 부지런함은 바로 개그 리듬을 재창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때로는 실패할 때 – 즉 안 웃길 때 – 도 있지만, 독자들에게 충격과 부담을 주지 않고 자연스럽게 실없는 농담을 건네고자 하는 작가의 노력은 어떤 경우라도 즐거움을 주고야 만다. 개그만화로서의 미덕, 최종목표는 모로 가나 도로 가나 결국 채워넣고야 마는 <트라우마>의 스타일이 앞으로도 지속되기를 바랄 뿐이다.
[으뜸과 버금 2004.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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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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