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의 한 섬나라에는, 한 왕자님이 살고 있다. 나름대로 동화같은 풍모가 있는 나라에서 국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명예롭게 생활하는 귀티나는 왕자님. …그런데, 그 사람의 어머니되는 여왕님이 워낙 오래 살며 왕직에 눌러앉아있는 바람에 중년이 넘어가도록 계속 왕세자다. 그 왕자의 부인인 세자비는 진정한 ‘공주’의 풍모를 풍기며 대중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듯 했으나, 악성 파파라치들에게 쫒기다가 허무하게 생을 마감해버렸다. 예산낭비를 줄여야 한다고 왕실폐지를 주장하는 정치인들이 심심치않게 나타나지만, 각종 스캔들과 가십을 소비하면서 스트레스를 풀고자 하는 국민들을 위해서 제단에 올라가야 하는 운명이다. 뭐, 현실이라는 것은 대충 이런 것이다.
<궁>은 한국에 만약 왕실이 있다면, 하는 설정을 핵심으로 하고 있는 만화다. 조선 왕가의 혈통이 이어지면서 현대까지 경복궁에서 살고 있는 로얄 패밀리를 상정하고 가는 것이다. 그리고 평범한 여고생이 할아버지들의 약속에 떠밀려서 왕실로 시집을 가면서 겪는 좌충우돌 소동과 로맨스가 이 만화의 줄거리다. <궁>은 너무 늘어지지도 가쁘지도 않은 깔끔한 연출 패턴, 궁중의례 등에 대한 성의있는 고증, 현대 한국에서 입헌 군주제가 이루어진다면 있을 법한 다양한 일화들의 세심한 편성 등 많은 미덕을 지닌 만화다.
하지만 <궁>의 인기 비결은 무엇일까? 사실 <궁>에서 왕실이 담당하는 역할은 기존 여러 ‘들장미소녀 캔디류’ 순정만화 작품들에서 재벌 가문이나 유럽 귀족 가문이 해왔던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낮은 신분의 저돌적인 여자 주인공이 높은 신분의 고고한 남자 주인공을 후려쳐서 결국 반하게 만들기 위한 통과의례 정도인 것이다 (솔직히 대체역사물이라고 보기에는 입헌군주제가 된 한국이라는 역사적 흐름과 그 의미에 대한 고민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렇다고 해서 단지 ‘여주인공이 고군분투하는 내용이 재미있으니까’ 라고 편리한 해답을 제시하기에는 한국의 왕실이라는 소재 자체가 가지고 있는 매력을 과소평가하는 듯 하다. <궁>에서 왕실이라는 설정을 끌어들이는 방식은 현대 사회에서 입헌군주제가 가지고 있는 이미지 그 자체다. 중학교 사회시간에 배우듯이, 실질적인 통치제도로서의 민주주의와 왕실이라는 개념을 양립시키기 위해서 만들어진 제도가 바로 입헌군주제다. 입헌군주제에서 왕실은 통치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권위와 정통성을 구체화한 궁극의 마스코트다. 이 사회에서 왕실은 범접하기 어렵고, 권위있고 전통을 따지는 고고한 사람들의 집단으로, 내부에서 권력다툼과 스캔들이 벌어지는 대가족이다. 한마디로, 해당 국가의 전통문화 가운데 가장 고급스러운 부분들로 잘 포장된 최고의 오락거리라는 것이다. 본질적으로 훌륭한 오락거리로서 만들어진 제도인 입헌군주제 왕실을, 트렌디 연애물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도입해 들여온 셈이다. 좋은 선택이다.
<궁>은 독자들에게도 좋은 반응을 얻고 있으며, 최근에는 오늘의 우리만화상을 수상하는 등 상복도 다분히 많다. 게다가 tv드라마로 제작 진행중이라는 소식도 들려오는 등,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는 작품이다. 오락으로서의 왕실이라는 본래의 본분을 넘어서서 갑자기 심각한 노선으로 돌변하지만 않는다면, 앞으로도 많은 재미를 줄 수 있는 멋진 작품으로 남게 될 것이다.
[으뜸과 버금 2004. 7.]
(* 주: 원출처는 YMCA에서 운영하는 ‘으뜸과 버금’의 월간 소식지입니다. 좋은 만화를 소개받고자 하는 업주들을 대상으로 하는 이 지면의 성격상… 분량도 capcold답지않게 짧고, 주례사 느낌이 강합니다;; 닭살이 돋더라도 참으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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