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실을 고백하건데, 나는 지로 다니구치의 만화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싫어한다는 건 아니고, 그의 만화들이 만화로서 우수하다는 것 역시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 가족관계에 대한 거의 맹목적인 향수, 따듯한 인간애로 세상의 모순마저도 통째로 덮어버리는 박애정신은 capcold의 코드에 적잖이 거슬린다. 연출 측면에서도 만화적 공간구성의 장점들을 살리기보다는 ‘영화적’ 미장센에 지나치게 집착하는게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너무 틀이 꽉 짜여져있다. 하지만… 중년 (남성) 독자들이 만화책 한권 추천해달라면, 그들의 취향에 맞을 만한 우수한 만화로서 별 망설임없이 추천해주곤 한다. 뭐 그런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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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들의 이야기 – <느티나무의 선물>
비단 만화뿐만 아니라, 영화든 게임이든 음악이든 대중문화 전반의 특징이 바로 대중적 성공을 노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대중 – 즉 나름의 주관에 따라서 대중문화를 향유하고 상품을 소비해줄 수 있는 일반인들의 폭은 갈수록 넓어진다. 특히 연령적인 측면에서, 점차 더욱 일찍 대중문화에 발을 들이게 된다. 이들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대중문화의 코드들 역시 점차 저연령화 되는데, 대략 중학교 1학년의 교양 수준에 맞추는 것이 관례가 된지 오래인(물론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고 한다) 텔레비전 교양/오락 프로그램의 예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자신들만이 즐길 수 있는 코드에 대한 욕구 역시 커지고 있다. 특히 오랜 역사동안 저연령에 대한 포섭능력이 최대장점인 것처럼 포장되어왔던 만화라는 대중문화 양식에 있어서, 성인들이 ‘자신들만의 코드’에 맞는 작품을 원하고 있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성인들을 위한 만화란 무엇일까? 섹스나 폭력 같은 것으로는 턱도 없다. 그것은 성인이기 때문에 비로소 즐길 수 있는 취향인 것이 아니라, 성인이 아닌 자들에게 사회적으로 그 쾌락을 금지시켰을 뿐이기 때문이다. 진짜로 성인을 위한 만화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 단서를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작품이 바로 <느티나무의 선물>(다니구치 지로 / 샘터)이다. 읽어보는 사람마다 “아, 이것이 바로 성인의 이야기다”라는 반응이 나오는 이 작품의 무엇이 과연 그렇게 성인스럽다는 것인가. 느티나무가 모든 것을 주는 것이 꼭 부모님들의 무한한 사랑 같아서? 글쎄. 그런 식으로 보자면 아동이나 청소년들이 보고 감동을 받기를 요구하는 동화류들과 기본 메시지가 크게 다르지는 않다. 감정이입할 주인공들이 다 중장년이라서? 그렇게 단순할 리가 없다. 어른들만 나오는 아동물도 얼마든지 많으니까. ‘성인스러움’은 좀 더 간단하고 쉬운 곳에 있다.
청소년/아동에게는 아직 없고, 성인에게는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일까. 바로, “과거”다. 지금을 신경 쓰고, 앞으로의 성장을 힘쓰느라고 고군분투하는 것이 바로 청소년의 고민과 갈등이라면, 성인에게는 뒤돌아볼 과거가 있다. <느티나무의 선물>은 바로 그 과거 돌아보기가 만들어주는 성인적 감수성을 잔뜩 적셔주는 단편들의 모음이다. 우쓰미 류이치로의 원작 단편 소설들을 바탕으로 재창조한 이 작품에서, 다니구치 지로의 중장년 주인공들은 모두 지금의 현재를 살아가는 평범한 어른이다. 하지만 어떤 계기로 인하여, 그것이 새로 이사온 집의 느티나무든, 오랫동안 못본 동생의 전화든, 그림 전시회든 간에, 과거를 돌아본다. 그리고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자신의 현재를 다시 돌아보게 되고, 한층 인간적이고 따듯한 생활로 다시 방향을 잡아간다는 이야기 구도의 반복이다.
하지만 단순히 과거가 있는가 없는가 정도로 단순하지는 않다. 청소년 취향 작품에도 나름대로 과거 사연을 지닌 멋진 주인공들은 수도 없이 많으니까 말이다. 즉 보다 중요한 것은 그 과거가 어떤 의미와 역할을 해주는 것인가, 라는 차원이다. 청소년은 과거의 반성을 바탕으로 해서 앞으로 무언가를 더 이루고 싶어 아등바등 노력하는 성장을 하는 미래 지향이다. 과거는 극복의 대상이고, 다음 성장의 ‘이전 단계’에 불과하다. 하지만 성인은 과거의 경험을 다시 떠올리고 자신의 현재 위치가 과연 무엇인가 반추해보며 현재를 살아가는 것이다. 과거는 좋았든 나빴든 간에 지금의 나를 만든 재료다. 이것이 바로 성장 중인지 성장이 이미 끝났는지에 대한 차이다. 성인은 성장에 대한 욕심이 이미 한풀 꺾인 존재들이다. 아 물론 세속적인 출세를 여전히 꿈꾸기는 하지만, 그것조차 나름대로의 현실론 앞에서 스스로 한계를 지을 수 있는 것이 성인이다.
미래를 위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반추하는 과거의 정서는 때로는 복고 정서와 묶이기도 한다. 과거 “좋았던” 어떤 순간을 되돌아보며, 그다지 좋지 않은 현재와의 낯선 격차에 즐거워하는 감수성의 경향 말이다. 복고정서의 가장 큰 결점은 바로, 과거를 그리워 한다는 것이다. 현재를 위한 과거가 아닌, 현재를 잊고 과거에 잠시 칩거하기 위한 과거.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인정서가 아니라 그냥 현실도피일 뿐이다. <느티나무의 선물>은 현명하게도 복고 정서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우직하게 사람의 과거를 이야기한다. 사람이 아닌 느티나무의 과거를 이야기하는 표제작 단편마저도, 정확히는 느티나무와 함께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거다. 그리고 그 과거의 결과, 계속 느티나무와 함께 살아갈 것을 결심하는 새 집주인의 모습이 바로 성인이다.
이러한 정서를 묘사하기 위한 다니구치의 화풍은 그야말로 탁월하다. 특별히 역동적인 화면이나 재기발랄한 연출이 넘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세밀한 배경 덕분인 것도 아니다. 다니구치는 성인의 표정을 그린다. 말은 안해도 사연이 가득 담긴 표정, 의지보다는 관조가 넘치는 눈빛, 원만하게 적응하면서 살아가는 성인들의 세계에서 연마된 듯한 적당히 경직된 딱딱한 표정. 특히 말없이 눈빛을 아래로 내리는 묘사에 있어서 성인의 정서를 연기력으로 보여주는 강력한 필력을 자랑한다. 하지만 거꾸로 그런 화풍이 완전히 고착되어, 중간중간 드라마틱한 설정의 줄거리가 선보이는 부분에서도 그다지 강렬한 사건의 느낌으로 와닿지 않는 단점도 동시에 지니고 있다. 과거 회상 속 아이들마저 어른의 눈빛을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성인만화가 다 이래야만 한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느티나무의 선물>은 담백한 시골 나물반찬 같은 책이다. 물론 성인의 건강에 좋고 성인만이 즐길 수 있는 그립고 반가운 풍미가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평생 심심한 것만 먹어서야 식사가 즐거워질 리가 없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가끔 이런 풍미를 즐기는 것, 성인의 특권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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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이전에는 ‘송인통신’이었던 출판 전문저널.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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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덧글 백업]
– 정석환 – 그런 불편함을 지적한 경우는 capcold님이 처음이로군요. 이작가의 그런 무지막지한 전통주의를 지적한 이가 아무도 없다는 점에서 만화비평의 수준이 얼마나 뒤떨어져 있는지 실감했습니다.(사실 앙굴렘의 수준도 별거 아니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2005/10/07 13:19
– 캡콜드 – !@#… 아마, 현역 ‘비평가’들이 대부분 실제로 적당히 보수적인 중년 남성 가장이거나, 아니면 이런 작가에는 전혀 관심없는 BL주의자들이기 때문일겁니다! (퍼펑~)
!@#… 여담: 앙굴렘은 원래 성향이 보수적입니다(한국식 ‘보수’와는 좀 다르지만)^^ 프랑스에서 이 사람이 칭송받은 이유라면, 그 동네에서 이미 검증받은 전임자들의 융합같은 이미지라서 그런 듯 합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만화 <아키라>를 연상시키는 묘사력, 오즈 야스지로 영화들을 연상시키는 호흡. 그리고 칸 간의 전체 조화와 흐름보다는 칸 내부의 공간에 최선을 다하는 연출방식이 그쪽 사람들에게는 훨씬 더 친숙하게 다가올 수 밖에 없고 말입니다. (하지만 문화권간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언제 다른 기회에…) 2005/10/08 0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