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번 주 출간된 최호철 작가의 데생 모음집 ‘걷는 그림’에 들어간 책 속 추천사. 세상사 이야기가 담겨 있는 그림을 그려보고 싶은 만화 또는 기타 미술 장르 종사자 내지 지망생들에게는 그냥 당연히 구비해야 할 책이다. 굳이 이렇게 무려 홍보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뭔가 잘못된 것 같다.
삶과 사연을 그려내기 위한 소스코드
김낙호(만화연구가)
한 작가의 완성된 작품이 아니라, 스케치 모음집을 본다는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물론 스케치 자체가 지니는 미적 감각이 마음에 드는 경우도 있고, 그 작가의 열혈 팬이라서 그의 모든 것이 신기하고 궁금하여 구경하고자 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라면, 완성작이 만들어지기까지 아이디어가 축적되고 구성요소들이 어떻게 조립되는지 설계하고 가다듬는 과정의 이면을 보는 것이다. 스케치북이란, 작가의 작품들을 우리 눈앞의 그것으로 만들어주는 소스코드, 그것도 개발과정의 빌드를 분석하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스케치북을 엿보는 것이 상대적으로 더 흥미로운 작가들이 있다. 장인 정신이 뛰어난 유려한 완성도의 그림을 자랑하는 작가에 관한 스케치북 정도만 되더라도, 아마 작법서로서의 기능을 충족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재미있는 경험은 층층으로 의미가 담겨있고 서사적 연출의 묘미가 살아있는 작품들을 만드는 작가의 스케치북이다. 어떤 식으로 세상을 포착하며, 그것을 어떻게 그림으로 정리해 넣는가. 넣고 싶은 그 수많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효과적으로 추려내고 시점과 연출을 만들어 내는가. 그런 것을 만드는 과정에서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런 측면에서 볼 때 누군가가 필자에게 오늘날 한국에서 스케치북을 엿보고 싶게 만드는 만화 작가를 꼽아보라면, 길게 생각할 것 없이 ‘최호철’이라는 이름을 내밀 것이다.
큰 스케일의 민속풍경화든 작은 생활그림이든 서사만화든 혹은 그 중간 어디쯤 형식을 결합한 것이든, 최호철의 작품들은 늘 독특한 일관성이 있다. 첫째, 삶을 담아내는 공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특정 현실 속에 살아가는 삶의 모습을 공간묘사로 전달해줄 수 있는 민속적 디테일이 살아있다. 일례로 ‘태일이’ 같은 작품에서 70년대 평화시장의 공간을 부감으로 설명하며 묘사하는 방식은 혀를 내두르게 만든다. 둘째, 사연을 담아내는 데생을 구사한다. 그가 그려내는 사람들은 그 몸짓, 표정, 공간 속에서 무엇을 하려 하는지 그 모든 것 속에 단순히 현재의 단상이 아니라 현재까지 이르게 된 사연을 상상하게 만드는 방식이다. 그의 가장 널리 알려진 작품 가운데 하나인 ‘을지로순환선’에 그려진 여러 승객들은 각각 그들의 피곤하고 찌든, 하지만 그래도 살아가야할만한 삶의 사연들을 절로 상상하게 한다. 셋째, 흐름을 담아내는 그림 연출이 있다. 시야의 왜곡, 부감과 조감, 소실점의 운용으로 만드는 공간의 이야기성이 탁월하다. ‘악!법이라고’ 릴레이 만화의 일환이었던 4대강 훼손 반대 만화, 또는 촛불시위를 묘사한 만화 등이 그런 장점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경우다.
이런 특성들은, 결코 단순한 천재성으로 일필휘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끊임없이 관찰하고, 인간사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단순히 그림실력이 아니라 더 나은 표현을 위해 계속 정진하고, 중간 과정에서 계속 생각하며 수많은 설계와 정비를 거치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의 작품들을 존경하는 것은, 그 근간에 있는 소스코드를 궁금해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바로 이 책은 그런 이들에게 보물섬과도 같다. 간혹 작가의 개인 공간이나 기사에서 언뜻 조금씩 노출되었던 중간과정들의 감칠맛을 벗어나, 본격적으로 묶여 나온 스케치북이다. 이것을 읽는다고 누구나 제2의 최호철이 될 리는 없겠지만, 이 정도의 노하우가 공개된다는 것만으로도 좀 더 다음 세대의 좋은 작가들, 혹은 좋은 독자들이 꽤 늘어나지 않을까 희망을 가져본다.
— Copyleft 2010 by capcold. 이동/수정/영리 자유 — [ <--부디 이것까지 같이 퍼가시길]
Pingback by Nakho Kim
[캡콜닷넷업뎃] 삶과 사연을 그려내기 위한 소스코드 – 최호철 '걷는 그림' http://capcold.net/blog/6526 | 책 속 추천사. 그 작가의 사회성과 인간미 넘치는 작품을 보고 경탄한 적 있다면, 필수 도서.
Pingback by Kyungshin Kwak
삶과 사연을 그려내기 위한 소스코드 – 최호철 '걷는 그림' [책 속 추천사] http://t.co/NQPQ5xE via @capcold
Pingback by kimtae
RT @kayshini: 삶과 사연을 그려내기 위한 소스코드 – 최호철 '걷는 그림' [책 속 추천사] http://t.co/NQPQ5xE via @capcol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