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색 계열 표지의 시사영어사 영한대역문고로 ‘게으름에 대한 찬양’을 읽으며 허세부리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말이다.
진리를 찾는 과정에 관하여 – [로지코믹스]
– 김낙호(만화연구가)
버트런드 러셀이라는 이름은 고등학생 이상이라면 꽤 익숙한 이름이다. 수십년째 인기 교재인 ‘성문종합영어’의 단문, 장문 독해문에 워낙 단골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쪽을 통해 접하는 글들은 대체로 유려하고 고급스러운 문장으로 삶을 바라보는 자세에 대해 적당히 긍정적인 톤으로 인간성과 여유를 강조하는 내용들이다. 그런데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것은 러셀의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그의 뿌리 깊은 반전사상 같은 한국사회의 “보수”층에서 민감해할만한 더 날카로운 글들이 함께 소개되지 않았다는 정도가 아니다. 애초에 그는 수학자고, 수학을 논리라는 방식으로 치환하여 철학에 접목시킨 논리철학의 대가다. 다양한 경로를 합쳐가면서 결국 궁극의 진리를 탐구하고자 한 그의 방식이 공부하는 모든 이들에게 가르치기에는 더 영감을 줄 수 있기에, 그냥 둥글둥글한 에세이스트 비슷하게 치부하고 넘어가는 것은 너무 아깝다.
[로지코믹스](독시아디스, 파파디미트리우 글, 파파다토스, 디 도나 그림 / 전대호 역 / 랜덤하우스 코리아)는 논리철학자로서의 러셀을 주인공으로 하는 만화다. 일종의 ‘구도’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다만 그 구도가 구원이나 돈오 같은 종교적인 깨달음이 아니라 가장 완결무결한 논리를 통해서 흔들림 없는 진리의 기반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초월적 해탈이 아니라 인간에게 주어진 지식이라는 틀에서 진리의 핵심원리를 찾고자 하는, 일견 메마른 듯하지만 사실은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다. 이야기의 내용은 반전 지식인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노년의 러셀이 반전 운동 연설을 부탁 받고는, 관객들이 기대한 바와 달리 엉뚱하게도 자신의 일생을 회상하며 강연하는 식으로 진행된다. 어린 시절의 호기심, 명저 [수학원리]를 만든 과정, 수많은 인연들 등이 하나의 전기처럼 펼쳐진다. 그 과정에서 화이트헤드, 괴델, 비트겐슈타인 등 20세기 초반 수학과 언어와 철학의 지식 패러다임을 좌우한 커다란 이름들이 하나의 줄거리로 엮인다. 그런데 그 모든 것은 인생경로의 드라마를 펼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수학적 논리라는 경로를 통해서 궁극적 진리를 찾아 나서는 여정이다.
[로지코믹스]는 논리철학에 대한 단순화한 요점 정리를 해서 해답을 주는 책이 아니다. 흔히 소위 ‘학습만화’에서 쓰는 그런 접근법과 달리, 이 작품은 해답이 아닌 과정에 관한 책이다. 논리철학에 사용되는 수리공식들을 일일이 풀어주는 것이 아니라, [수학원리]라는 오랫동안 집필된 그 커다란 책이 결국 1+1이 2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목표와 방향성을 이야기하고, 그런 것이 왜 필요했던 것인지를 설명한다. 지식의 결론이 아니라, 지식을 탐구하는 맥락에 대한 모험기인 것이다. “논리야 놀자”류의 기법서와도 거리가 있다. 무언가를 탐구하는 적당히 정리된 방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어떤 식으로 문제의식이 형성되고 그것을 어떻게 그 사람들이 발전시켜 나갔는가, 서로의 융합하는 혹은 충돌하는 세계관 속에서 어떻게 방향이 바뀌어나갔는지가 중심에 놓여있다. 심지어 원래 러셀이 강연을 의뢰받은 목적인 전쟁 반대에 대한 결론도 그렇다. 논리를 탐구한 인생을 거울삼아 “반전은 바로 논리적으로 옳은 귀결이다”라는 식의 쉬운 결론을 내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들이 각자 해답을 찾아보시라는 제안을 던진다.
과정으로서의 진리 탐구라는 테마를 잘 구현한 부분 가운데 하나는 바로 이야기 형식이다. 논리를 통한 진리 탐구라는 러셀의 일대기가 그의 반전 강연이라는 창틀 속에, 그리고 그 강연은 다시금 만화작가들이 결코 녹록치 않은 이 작품을 만들기 위해 회의를 한다는 내용 속에 창틀로 들어가 있다. 작가들이 이 작품을 구상하는 과정 자체가 작품 속에 줄거리 중 하나로 들어가 있기에 이야기 속과 밖의 경계가 더욱 희미해지는 셈이다. 모든 것은 줄거리에 완전히 몰입하기보다, 중간에 자꾸 질문을 던지고 그간 생각거리를 점검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들이다. 왜 이런 생각에 도달하는가, 도달한 그 생각은 어떤 의미인가, 때로는 비유로 때로는 직접적으로 풀어주면서 그 다음 질문을 위한 판을 깔아준다. 그렇게 하나의 문제에 대한 하나의 방향을 선택하고 그것이 새로운 질문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바로 진리 탐구의 모험이자, 러셀의 일대기이자, 당대 최고 지식인들이 함께 만들어나간 하나의 ‘판’이다. 그리고 극 속에서 강연장의 청중들이 러셀에게 기대한 바와 달리 답이 아니라 과제만 잔뜩 얻었듯, 이 작품 역시 독자들에게 단순히 논리철학을 학습시키기보다는 논리를 추구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질문을 던진다.
과정을 실감나게 보여주면서 재미를 주는 핵심은 디테일에 있다. 당대의 사회상, 어떤 생각이 나오기까지 기여한 소소한 일화들, 고민이 뒤바뀌고 뒤집히는 모습, 진리를 탐구하다가 대상에 압도되어 제정신을 잃은 모습들, 아집을 고수하는 모습과 인생의 역작도 과감하게 버리는 모습들이 넘친다. 20세기 초반 현대과학의 급격한 발달 속에서, 분과학문의 기계화된 틀에 안주하기보다는 궁극의 진리를 찾고자 했던 지식인들이 모습이 생생하게 제시된다. 물론 모든 디테일을 일괄적으로 강조하는 것은 아니어서, [수학원리]가 수학을 통한 논리구조의 틀을 닦아서 나중에 결국 컴퓨터공학의 발달에 기여했다든지 하는 식의 세부적인 성과 보고 같은 것은 오히려 과감하게 생략한다. 오로지 진리의 탐구과정, 생각과 문제의 발전과정에 대해서만 디테일을 발휘할 따름이다. 어떤 종류의 지식, 생각의 발달을 고민해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감명하고 영감을 얻기 좋도록 특화된 방식의 작품인 셈이다.
단순히 지식을 담은 것이 아니라 명실상부하게 “지적”인 내용 덕분에, [로지코믹스]는 그리스 현지에서 출판되고 또 영어판이 나오면서 평단과 시장에서 많은 호평을 얻었다. 그 모든 독자들이 논리철학이라는 특정 분야에 관심이 있어서라고 보기는 어렵고, 치열하게 지적 탐구를 하는 과정을 담아낸 모습에 손을 들어준 것이 아닌가 한다.
한국어판은 수학 서적 번역/저술을 전문으로 하는 번역자를 선정하는 등 내용면에서 세심한 신경을 썼으며, 두꺼운 올컬러인데도 상대적으로 낮은 가격으로 출시하는 등 제작 측면의 품질이 높다. 아쉬운 점은 마케팅 측면인데, 띠지를 의도적으로 넓게 제작하여 표지의 만화 그림을 덮어서 이 작품이 만화라는 사실을 가리고 있다. 적어도 독자의 손에 쥐어질 때까지는 만화임을 의도적으로 숨기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은 “소설과 일러스트 형식으로 재구성한 작품” 운운하는 출판사 보도자료 내용에서 확신으로 굳는다. 만화라는 표현 양식을 활용하여 형식실험과 선명한 설명력을 만들어낸 것이 명백한 장점인 이 작품을, 사람들이 만화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는 출판사의 편견으로 이렇게 판촉하고 있는 것은 한국어판에 남는 유일한 아쉬움이라고 할 수 있다.
로지코믹스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랜덤하우스코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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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주간 <기획회의>.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발간. 여기에 쓰는 글에서는 ‘책’이라는 개념으로 최대한 접근하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찌되었든. 즉, 업계인 뽐뿌질 용.)
다음 회 예고(즉 현 발간호 게재중인 글): 실종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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